나태주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수려한 표현, 비문 없는 완벽한 문장, 문맥 흐름이 딱 떨어지는 구성. 잘 쓴 글엔 여러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진심이 담긴 글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이 모든 걸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자리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만 보고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쓰는 게 과연 잘 쓰는 걸까 항상 고민합니다.
그렇기에 '잘' 쓰는 사람을 만나 고견을 듣는다는 건 귀한 경험입니다.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님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쓰는' 사람을 자청하고 살며 꼭 한번은 뵙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닿았던 건지 드디어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잘'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키즈노트 공지 사항에 학부모 대상 교육 일정이 올라왔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꼭 들어야겠지요. 무심코 뱉은 말과 태도가 아이에게 어떻게 전해지는지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평일 오전에 하는 교육은 제게 언감생심이었지요.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업무는 쌓일 테니까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심드렁하게 공지를 넘겨보다가 초빙된 강사 이름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시인 나태주
너무나도 뵙고 싶었던, 그분의 이름에 밀려올 업무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사무실에 미리 말을 해둔 뒤, 나태주 선생님을 만나 뵐 준비를 했습니다. 혹시라도 교육이 끝난 뒤 잠시나마 인사를 드릴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요. 조금 욕심을 낸다면 '잘' 쓰는 법도 듣고 싶었고요. 그래서 선생님의 시집을 한 권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본인의 시집을 가져오면 '풀꽃' 전문을 적어주신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서점까지 달려갈 여유는 없었기에 인터넷을 찾아봤습니다. 만나 뵈면 무슨 말을 건넬까 망상에 가득 찬 채로요. 그러다 문득 팬임을 자처하면서도 그분에 관해 잘 몰랐다는 게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시집을 찾아보던 손을 잠시 멈췄습니다. 그리고 '시인 나태주'가 아닌 '인간 나태주'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나무위키, 유튜브 등에 저장된 그분의 이야기는 풀꽃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아이를 닮은 천진함도, 시어에서 묻어나는 청록파 시인의 결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으니, 왠지 그분의 시작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나태주 선생님의 등단작인 '대숲 아래서'가 실린 첫 시집을 주문했고, 다음 날 손에 들 수 있었습니다.
며칠 뒤, 설레는 마음으로 교육장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교육 시작 전이라, 가지고 간 시집을 펼쳤습니다. 요즘 작품과는 느낌이 다른 긴 호흡의 시. 박목월 시인의 눈에 든 이유를 알겠더군요. 오랜 세월 시를 쓰며 호흡은 짧아졌지만, 나태주 선생님이 사랑받는 이유를 알기엔 충분했습니다. 대숲으로 시작했던 그분의 노래는 이제 작은 풀꽃이 되었지만, 시가 주는 느낌은 언제나 편안하고 쉬웠습니다. 그런 감상에 빠져 있다 보니 곧 교육이 시작되었고, 기다리던 나태주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상징과도 같은 베레모, 작달막한 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매체에서 봤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말씀은 또 어찌나 재미있게 하시던지요. 학부모 대상 교육이었지만, 주제는 그리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선생님의 이야기는 어떤 교육보다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에 시 쓰는 방법까지 간단하게 배울 수 있었어요.
정작 선생님은 아이들을 살뜰히 챙기지 못했다며 부끄럽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당신도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다고도 담담히 말씀하셨어요. 교장 임용시험 뒤, 밤별 내리는 들판에 누워 아버지를 용서했다는 이야기엔 눈물까지 났습니다. 시나 기고문 등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이야기였지만, 직접 들으니 조금 더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강의가 진행될수록 점점 '시인 나태주'와 '인간 나태주'의 구분이 희미해졌어요.
'잘' 쓰는 게 아닌 잘 '살아오신' 분. 이게 제가 느꼈던 나태주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손끝이 아닌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감정에 솔직한,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는 태도가 선생님의 글에 온전히 담겨 있었어요. 그럼에도 뭔가 선생님만의 '잘' 쓰는 비결이 있진 않을까 하는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육이 끝난 뒤, 혹시라도 사인받을 수 있을까 싶어 기다렸습니다. 저 말고도 시집을 가져온 사람이 꽤 있었어요. 주최 측에 이야기했더니 선생님께서 흔쾌히 사인을 해주시겠다는 허락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차례를 기다리며 또다시 생각에 빠졌습니다. 어떤 이름을 알려드릴까 하고요.
본명을 쓸지 필명을 쓸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남철우'와 '보리아빠'는 잠시 마음속에서 아옹다옹했지만, 결국 보리아빠가 이겼습니다.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도 '쓰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싶은 게 욕심이었거든요. 전 하고팠던 말을 품고 차례를 기다렸고, 보리아빠는 선생님께 인사드리고는 가지고 간 시집을 건넸습니다.
"오래된 시집을 가져오셨네요."
"선생님의 시작이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꺼내며 제 필명을 알려드렸어요.
"보리아빠... 보리는 아이 이름인가요?"
"네! 태명으로 소중히 품었던 이름입니다.
지금은 서윤이란 이름으로 잘 자라고 있어요."
"보리라는 이름의 뜻은 뭔가요?"
"저희 부부는 불자라, 부처님 마음을
가진 아이를 바라며 지었어요, 선생님."
전 선생님의 시작이 궁금했지만, 선생님은 보리의 시작이 궁금하셨나 봅니다. 활짝 웃으며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는 선생님이 참 인간적인 분이라 느껴졌어요. 왠지 모를 그 포근함에,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게 사라졌습니다. 선생님과의 짧은 대화로도 조금은 알 것 같았거든요.
"항상 참아주고, 항상 기다려주고,
항상 져주는 거, 꼭 잊지 마세요."
강의 중 유일하게 나왔던 가르침의 말을 다시 해주셨습니다. 아이를 키울 때 마음가짐이지만, 신기하게도 글을 쓰는 태도와도 비슷하게 들렸습니다.
글을 쏟아내고 싶어도 한 번은 '참아주고'
글이 풍성하게 익어가도록 '기다려주고'
글을 읽어주는 이의 생각에 '져주는' 것
그것이 '쓰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라고 느껴졌거든요. 물론 저의 자의적 해석이었지만, 깊은 가르침을 보여 주신 덕분에 작았던 사고에 조금은 살이 붙은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큰 가르침을 기억하겠습니다. 글을 쓸 때도, 보리를 키울 때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참고, 기다리며, 져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아직 '쓸 만한 사람'이 되지도 못했지만, '잘 쓰는 사람'이 되기를 욕심 내 보겠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저도, 오래 보면 예쁘게 보이는 풀꽃 같은 글을 쓸 수 있겠지요. 잘 살고, 잘 써보겠습니다. 그리고 보리도 잘 키우겠습니다.
덧붙이는 말
나태주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고민하다 올리진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분이라 해도, 동의 없이
사진이 여기저기 알려지는 건
선생님께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