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이 의미 없는 세상에서

타이틀 없이, 처음부터 다시 쌓았다

by 템즈강변의 태양


부르는 사람도,

캘린더도,

마감도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회사 명은 있었지만,

명함도 있었지만,

설명할 언어는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공간,

텅 비워진 캘린더,

메모 되지 않은 일감들.



그 한가운데,

오직 나라는 사람만이 매일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스스로 만든 타이틀 하나 없이,

직장인 시절 부여받은 직함의 여운을 끌고 다녔다.


조직의 말버릇과 어투가 습관처럼 튀어나왔다.


아직도 시발 비용을 쓰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면서 자꾸 생각했다.


“내 회사가 너무 작아 보이면 어쩌지?”

“처음부터 초짜 같다는 인상을 주면 어떡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아직 대기업의 외피를 벗지 못한 나였던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작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은

내가 어떤 회사 출신인지, 일부러 먼저 말했다.

이력으로 신뢰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은, 침묵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뭐야, 이 사람..."이라는 기류가

공기 중에 느껴졌다.



처음으로

스펙이라는 것이

아무 힘도 갖지 않는 세계에 들어왔다는 걸

실감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이 뭘 할 수 있죠?"



대화의 흐름은 결국

이 말 없는 질문에 닿아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 세계에서 먼저 보려는 건

'살아 있는 태도'라는 걸.



그들이 궁금했던 건

'어디 출신인가'가 아니라

'혼자서도 이 일을 할 수 있는가'였다.



나는 결국,

나의 홀로 있음으로

내가 실력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조금씩,

하나씩.


말하는 방식,

행동하는 태도,

나와 회사를 소개하는 문장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나의 이름으로 만나주는 곳은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회사,

초짜의 기색이 드러나는 말투와 문장.



공장에 전화를 걸어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하고,

계약을 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고객’이었지만,


그 순간,

더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일하는 내가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지시를 따르던 사람이 아니라,

결정을 만들고 관계를 쌓아야 하는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에너지가

내 안에서 확실히 자리잡았다.






회사에서 월급 받던 시절,

“사직서를 내고 나갈지언정,

상사 앞에 엎드리진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나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엎드렸다.


내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인 대상은

함께 만들어가는 협력자들이었다.



그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존중이었다.





그때부터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창업의 본질은

사업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을.





아직 제품도 없고,

매출도 없고,

고객도 없던 시절.


회의 안건도 없고,

보고할 대상도 없고,

지시도 없었다.


모든 결정은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로 끝났다.



그 허무함.


그리고 동시에 밀려오는

묵직한 책임감.



그게 바로

창업 초기에 찾아오는

낯설고도 선명한 정서였다.



자유라는 말보다

막막함이 더 크게 느껴졌던 시간.



그때부터,

나는 나에게 말 걸기 시작했다.





보여주기 위한 문서가 아니라,

나를 납득시키기 위한 계획표.


누군가의 확인을 위한 보고서가 아니라,

내 안의 확신을 위한 기획서.



나의 언어로 자라고,

나의 방식으로 쌓아가야 할 것.


그것은 결국,

나의 이름으로 만든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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