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를 구성하듯이, 좋은 것을 보고 들어야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몇 개월간 애청했던 드라마 영 쉘든이 그랬다. 시즌 6으로 구성되고, 매회 22화가 있는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빅뱅이론이라는 미국 드라마의 스핀오프이다. 스핀오프이지만 빅뱅이론을 보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도, 팬에게도 사랑받는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지난 3개월간 영쉘든에 푹 빠져있었고, 마지막 시즌까지 완독 하며 이 드라마를 인생 드라마로 꼽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글은 영쉘든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키우면서 생기는 문제와 부모의 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영쉘든은 천재다. 삼 남매 중 형과 쌍둥이 여동생은 그에 비해 평범하거나, 학업으로 따지면 하위권에 가깝다. 쉘든의 부모도 평범하다. 9살에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11살에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천재에 가까운 쉘든을 그저 천재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지능과 학업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 공감능력이 부족한 쉘든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쉘든보다 지능은 낮지만 쉘든의 형과 쌍둥이 여동생은 각자 나름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형인 조지는 세일즈, 장사, 사업에 재능을 가지고 있다. 망하는 문구점에서 스노볼을 싸게 사게 사서 집집마다 방문하며 방문 판매를 시도한다. 물론 결과는 대실패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는다. 눈이 오지 잘 오지 않는 텍사스에, 눈이 내렸던 때를 떠올리며 스토리를 함께 판매하자 스노볼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완판에 성공한다. 할머니를 도와 빨래방, 도박장, 비디오 대여소 운영도 하며 성장하는 조지의 모습을 보는 것도 흐뭇하다. 모두가 공부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공부가 꼭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조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했는데, 이를 보고 있는 시청자도 그때에는 안타까웠다. 하지만 조지의 인생에서 고등학교 중퇴 학벌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쉘든의 쌍둥이 여동생 미씨는 자라면서 내내 쉘든은 특별한 대우와 관심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을 깊게 가지고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미씨가 집을 나가서 돌아다녀도, 아빠의 픽업트럭을 몰고 나가 몇 시간 동안이나 운전했을 때도 그녀의 부모는 알지 못했다. 무관심 속에서도 미씨는 뛰어난 사회성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인싸이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는 특히 인간관계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쉘든의 부모 또한 완벽하지 않다. 쉘든의 엄마는 쉘든을 너무 특별하게 생각한 나머지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그런 그녀의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드라마에서 긍정적인 측면만 보지 않는다. 쉘든도 엄마에게 왜 나를 특별하게 대우해 줬냐고 따지기까지 하니, 부모로서는 속상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풋볼 티브이를 보는 것이 직업이 아닐까 의심이 들게 하는 쉘든의 아빠는 딱 전형적인 아빠이다. 너무 무관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적극적인 아빠이다. 옆집 아줌마의 관계에서도 선을 넘지 않고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했고, 끝까지 그 경계선을 유지한 점도 칭찬할 만하다. 그래도 같은 엄마의 입장에서 쉘든의 아빠에게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들을 향하는 마음만은 분명하다.
2. 아이들이 올바르게 크는데, 조부모(할머니)의 역할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우리 집의 초등학생 딸들은 외할머니가 어렸을 때, 자신들을 따끔하게 혼내줘서 자기들이 잘 컸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한다. 3살, 5살쯤 유모차를 갖고 서로 타겠다고 싸웠는데, 나에게는 친정엄마이지 그녀들에게는 외할머니가 아주 따끔하게 혼내주셨다. 그 외에도 음식을 편식하거나 투정을 부릴 때 엄하게 다루셨는데, 그런 모든 꾸짖음이 성장에 도움이 됐다고 얘기한다. (벌써?) 그래서 자신들은 아기를 낳으면 어릴 때 외할머니한테 보내서 인성 교육을 제대로 시키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 꽤 놀란적이 있다. 이처럼 조부모님들은 부모가 하지 못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쉘든의 엄마인 메리도 결혼 후 아이를 키우며, 결국 친정 앞으로 이사를 왔다. 전업주부로 학령인구의 세 자녀를 키우는 그녀지만 그녀를 돕는 것은 친정엄마이다. 쉘든 삼 남매는 각각 할머니와 돈독한 관계를 때로는 엄마, 아빠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로 지내며, 할머니에게 배우고 성장한다.
사실 쉘든 할머니는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다. 도박을 좋아하고, 술을 마시고, 거짓말도 잘하고, 아이들의 도움도 차갑게 거절할 때도 있다. 하지만 손자, 손녀들이 정말 곤경에 처해있을 때 뜨겁게 아이들을 북돋아주고 진심으로 도와준다.
미시가 중학생이 돼서 연애상담을 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이다. 쉘든이 먼 대학교까지 청강수업을 들으러 갈 때도 할머니가 라이드를 대신해 준다. 마지막이 가관이다. 할머니는 첫 손주인 조지가 사고를 쳐서 9살 연상의 여자친구가 아이를 낳게 되자, 집세를 내서 쫓겨난 여자친구에게 자기 집의 방을 내어주고, 산부인과 병원비를 대신 내준다. 조지와 여자 친구가 아이의 이름을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틴이라고 지은 것도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3. 영쉘든에서는 끊임없이 텍사스임을, 텍사스 정신을 강조한다.
쉘든에 나오는 텍사스 사람들은 동부사람들을 양키라고 배척하고, 캘리포니아 사람들도 싫어한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텍사스 사람이라는 노래를 불러줄 정도로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텍사스 대표 요리인 텍사스 브리스킷 레시피는 장모님이 사위에게 가르쳐주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무형 자산이다. 물론 쉘든이 신적인 기억력으로 할머니가 아기시절 얘기해 준 레시피를 아빠에게 전해줌으로 에피소드는 막을 내린다.
또 한 번은 쉘든이 노교수님 두 분과 함께 캠핑카를 타고 가다가 길가에 아마딜로를 차로 치게 된다. 다친 아마딜로를 살리기 위해 우연히 들어간 텍사스 외곽의 작은 술집에서는, 양키들은 저리 가라고 전화 한 통 빌려주지 않는다. 이때 쉘든은 나는 자랑스러운 텍사스 사람이고, 텍사스에서 나고 자랐다고 당차게 얘기한다. 그 얘기에 그토록 무섭고 사나워 보였던 술집 여주인은 쉘든에게 수화기를 내어준다.
쉘든이 고등학생 시절 과학예산 편성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전교회장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상대는 전교에서 인기가 많은 여학생이었다. 쉘든은 패배가 뻔히 예상된 상황에서 보기 좋게 승리를 거두는데 그가 바로 텍사스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상대 후보인 여학생은 동부출신으로, 실제 텍사스를 싫어하고, 동부를 좋아하는 비밀이 있었는데 이를 쉘든이 폭로한다. 학연, 지연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 그러한 자부심을 보여주는 내용을 보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4. 자극적인 영상이 없이 따뜻하고 말캉말캉한 사람 사는 얘기, 공동체에 대한 얘기가 담겨있다.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아침마다 빠지지 않고 챙겨보시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쉘든을 보기 전까지. 쉘든의 나이 또래의 사람으로 9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쉘든은 여러 편의 인간극장을 보는 것 같았다. 향수를 자극하는 콘텐츠, 예를 들어, PC통신을 이용하면 전화를 사용할 수 없었다거나, 집전화기로 다른 식구들의 통화를 우연이 엿들을 수 있다거나, 비디오 대여점에 갔던 기억이나, 마이키 이야기 같은 옛 영화 얘기부터, 그때 유행했던 pop 가수들에 대한 얘기까지 1990년대 감성에 공감하기 쉽다.
그 시절 공동체에 대한 얘기들도 가득하다. 지금처럼 인터넷, 핸드폰이 없던 시절, 가정, 학교, 교회, 동네를 주축으로 쉘든 가족들은 울고, 웃고, 성장하고, 함께 고통을 이겨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금은 약해진 가정, 학교, 종교, 동네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향수를 자극한다.
5. 아름다운 주택과 동네가 보는 눈을 편안하게 한다.
영쉘든의 주 배경은 쉘든의 집과 쉘든 할머니의 집이다. 아담한 단층주택인 쉘든의 집 외관이 매 회차 인트로 화면에 나오는데 소담한 집과 잘 가꿔진 정원을 보면 보는 사람의 안구도 정화된다. 이 집은 방이 3개, 화장실이 1개밖에 없어도 다섯 식구의 따뜻한 보금자리이고, 몸이나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 잠시 거치며 쉬어가는 쉼터의 역할을 한다.
쉘든 할머니의 집은 더 아름답다. 집 곳곳에 할머니의 취향이 반영된 소품, 인테리어가 그녀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얼마나 집을 가꾸고 노력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아름다운 건축물이 보는 즐거움을 더하며, 쉘든을 보는 내내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 준다. 자기 전에 한편씩 보니, 다른 여타의 자극적인 콘텐츠에 비해 숙면에 도움이 될 정도였다.
6. 뛰어난 각본이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어 다음 편을 계속해서 보게 된다.
영쉘든을 보며 스토리에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떻게 이렇게 스토리를 정교하게 맞췄지 하며 놀래기도 했고, 예측불허의 결말로 뒤통수를 맞은 적도 많았다. 만연 악역도 없고, 선인도 없는 우리 인생 주인공들을 스토리에 녹여내며 보여준다.
영쉘든은 올해 2월 시즌 7로 막을 내린다고 한다. 지난 3개월간 몸에 좋은 간식처럼 또는 밤에 습관처럼 먹는 야식처럼 야금야금 꺼내먹었던 영쉘든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헛헛하다. 아기였던 쉘든과 형제자매들이 훌쩍 커버린 것을 보고, 우리 아이들이 큰 것처럼 보람차고 시원섭섭하다. 2017년의 시작한 드라마가 최근까지 촬영됐으니 9살이었던 꼬마가 이제 청년이 다되었다. 그래도 쉘든이 지향했던 가치;가족, 지역, 공동체라는 좋은 콘텐츠가 내 안에 깊이 새겨져 보람차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시즌7 포스터, 아이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볼 수 있다
넷플릭스에서 한국의 인기 있는 콘텐츠를 어느 순간부터 보지 않게 되었다. 폭력과 자극적인 영상이 뒤범벅되어 있어 아무리 권선징악의 교훈을 준다고 해도 보면서, 보고 난 후 계속 불편했다.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자들에게 한국 사회가 저렇게만 비칠까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역이 조금이라도 반영된, '한국이 아직은 살만하다, 일상이 행복하다'는 메시지가 겹겹이 새겨져 있는 한국 드라마가 나오기를 손꼽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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