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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인 Jan 30. 2024

완벽했던 서울 시청 앞 데이트

창작과 저항

최근 서울시청 앞 광장은 스케이트장으로 변했다. 단돈 천 원만 내면 누구나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 천 원에는 스케이트화 대여아이스링크 이용료가 포함된 금액으로, 서울시민, 내외국인 상관없이 동일한 이다.

1. 아이스 스케이트

열한 살 딸의 생일날이 때마침(이라 쓰고 하필 이라 읽는다) 일요일이라 평소보다 조금은 더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해야 했다. 생일 전날, 친구들과의 생일파티를 집에서 완벽에 가깝게 준비했으나 그것은 생일 하루 전날의 일, 과거일 뿐이었다. 생일날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녹슨 리서치 실력에 기름칠을 해서 찾으니 서울시청 앞 스케이트장 포착다.


천 원밖에 안 되는 금액에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는 장점과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좋아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 미리 예약을 해두고 생일날 당일 아침이 되었다. 원래는 집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타고 갈 예정이었지만, 생일 아침이라 미역국을 곁들인 아침을 먹고 나니 시간이 촉박했다. 평소 짠돌이 남편이지만 웬일로 택시를 타고 가자고 제안했다. 입장 시간에 늦어 스케이트를 못 타는 것보다는 택시비를 내는 게 다는 계산에서 나온 제안일 것이다. 택시를 탄 덕분에 10시 오픈 시간보다 10여분 일찍 스케이트장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들 발 사이즈에 맞게 스케이트화를 대여하고, 아이들 간이의자에 앉히고, 무릎을 꿇고 정성껏 두발에 스케이트화를 신겼다. 화장실까지 다녀오게 한 후, 아이들 둘만 스케이트 장에 넣었다. 


2. 카페

이로써 잠시 방이다. 1시간의 스케이트시간 동안 남편과 나는 쉴 수 있었다. 오늘 아침식사 때 평소와 달리 커피를 마시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스케이트 타는 동안 근처 카페를 가기 위해서였다.


아쉽게도 시청 앞 스타벅스는 휴무였지만, 시청 뒤편의 대형 스타벅스 매장은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널찍한 내부와 달리 손님은 1~2명 수준으로 평소 스타벅스답지 않게 여유가 많았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스타벅스 무료 음료쿠폰을 써서 아메리카노와 돌체 라테를 주문했다. '휴우 이제 40분은 여유다.' 어제 썼던 브런치 글을 다시 퇴고하고, 조금 수다를 떠는 찰나 시계를 보니 벌써 스케이트 끝날 시간이 다 되어 간다.


5분의 1 가량 남은 커피를 원샷 때리고 2분 거리의 서울 스케이트장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이들을 다시 만나니, 스케이트장에 들어갈 때의 미온적이었던 태도에 비해, 타고난 후의 표정이 더 밝다. 엄마의 계획대로 생각보다 재미있게 스케이트를 탄 어린이들을 픽업해서,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에 마련되어 있는 카페로 들어간다.


"스케이트 어땠어?"

"너무 재미있어요. 또 타고 싶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들은 언젠가 방학 특강으로 스케이트 강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스케이트를 타본 적이 몇 번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무려 강습도 받은 초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강습을 받은 상태라고 하기에도 실력이 조금은 부족했다. 1시간만 스케이트 타는 것은 너무 짧을 것 같아, 다음 타임인 11시 50분 스케이트도 현장에서 예매해 뒀는데, 이 역시 잘했다. 스케이트장 티켓은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할 수도, 현장에서도 발매할 수도 있었는데, 일요일 오전 시간에는 현장 발매 티켓 자리도 여석이 많았다.


스케이트장에 아이들만 보내는 것이 살짝 걱정도 됐었는데, 스케이트 강습도 받은 녀석들이라 걱정이 없어졌다. 30분의 휴식시간이 지난 후, 아이들을 다시 스케이트장에 보낸다. 또다시 휴식이다. 황금 같은 시간을 그냥 흘러 보낼 수는 없는 노릇. 모처럼 시내에 와있고 자유로운 몸이라 갈만한 곳을 부지런히 생각해 낸다.

3. 덕수궁 미술관

"애들 보내고 할 거야?"

"배가 출출해서 분식집 가서 라면이나 먹을라고..."

"라면을 먹는다고? 나는 덕수궁 미술관 가고 싶은데... 흠... 덕수궁 미술관에서 무슨 전시하지?"


덕수궁미술관에서는 보고 싶었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 고백>이었다.


"덕수궁 미술관 갈 건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 전시도 열리고 있어"

"그럼 특별히 같이 가줄게"

"아니야, 각자 따로 하고 싶은 거 하러 가도 돼"


기대와는 달리 라면을 먹으러 가지 않고, 미술관에 동행한 남편과 함께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바로 앞 덕수궁으로 향했다. 운 좋게도 서울의 두 자녀를 가진 부모이기 때문에 입장료는 무료이다. 겨울의 덕수궁은 황량하면서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빌딩 숲 사이에 이런 조선시대 건축물이 있다는 점 근대 아름다운 건물 개성더해특별한 곳이다. 수 백 년이 지난 지금, 기술이 발전한 시대의 빌딩은 예전의 건축물의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 아름다움에 발끝도 쫓아오지 못한다. 왜 개성 있고 아름다운 기존의 건축물들을 없애고, 미의 관점에서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개성 없는 사각형의 빌딩과 오피스텔로 서울의 모든 빈 공간을 채워나가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총 3000억을 들여서 만든 서울시청 신청사도 기존 시청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먹구름 떼같이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서울시청 신청사는 광복 이후 최악의 건축물에 선정되기도 한 오명을 가지고 있다.


덕수궁 미술관의 입구는 그 어느 나라의 궁전 입구보다도 눈부시다. 추운 날씨에 공기까지 맑으니 파란 하늘과 하얀 건물의 조화를 이뤄 이 순간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황량했던 덕수궁 미술관 입구와는 다르게 미술관 내부는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줄을 서서 관람하는 분위기에, 무료 도슨트까지 진행되고 있어 발 디딜 틈 없이 바쁘다.

장욱진 화백에 대해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들에 대한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그의 작품은 미술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 책을 읽고 나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단 화백이다. 전시장에 그림마다 작은 설명이 자세히 붙어 있어, 그림을 관람하러 온 건지 설명을 읽으러 온 건지 혼란스러울 정도였지만 장욱진 화백의 그림 그 자체, 창작자로서의 그의 열정과 단순함에 감탄을 하게 되었다.

심플한 삶, 오직 '그림 그리기'가 '집과 가족'이 전부였던 그의 삶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소년기에서 노년기로 수록 그의 그림은 단순해지고, 미니멀해고, 최종적으로, 한국 현대 추상화 화풍을 완성했다. '까치와 집, 나무, 검둥개, 집안에는 남편, 아내, 자식'으로 단출하다. 평소 그가 인터뷰한 글귀가 바쁜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우리가 크리에이터가 돼야 하는 이유는 나답게 자유롭게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다. AI와 경쟁해야 하는 미래에는 창작가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창작으로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림으로 저항고, 승리를 거뒀다.


1~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실은 1,2,3,4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어 많은 그림과 장욱진화백의 삶의 기록에 대한 자료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 스케이트 시간이 끝나고 있어, 아쉽지만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먼저 한 시대를 철저히 저항하며 살아갔던 크리에이터의 삶의 발자취를 보고 경험하는 것 만으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부지런히 서울 스케이트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마침 스케이트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재미있었어?"

"네, 또 타고 싶어요."

"스케이트는 많이 탔으니까 뒤에 서울도서관에서 30분만 책 읽다 갈까?"


4. 서울 도서관

2시간 스케이트를 타며, 충분히 몸 쓰기를 한 아이들에게 바로 뒤편에 있는 서울 도서관에 가보기를 제안한다.

딱 30분만 몰입독서를 하고 가자는 제안에, 아이들도 흔쾌히 승낙한다. 주머니에 있었던 비상 간식 초콜릿을 몇 알 입안에  넣고, 서울도서관으로 향한다. 좁고 도대체 운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던 입구와는 다르게 도서관 내부는 풍부한 장서와 독서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하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오픈형 계단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한다.


하루종일 도서관에 있자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서 신체활동을 충분히 하고 난 이후에 읽는 책이라 그런지 더 달콤하고 책에 몰입도 잘된다. 30분 내에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내기 위해서, 불필요한 내용은 덜어내고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읽는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고, 읽던 책을 마치기 위해서 5분 더 독서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일어난다. 마음의 양식을 채웠으니, 배를 채 차례이다. 생일 데이트의 다음 코너인 '애프터눈 티 세트'를 먹으러 가기 위해서 발길을 옮겨야 할 타이밍이다.




서울시청 앞 데이트는 이렇게 끝이 난다. 아이스 스케이트-카페-미술관-도서관까지 한 동선 안에서 약 도보 5분 거리 내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재미요소가 갖춰진 콘텐츠가 있는 완벽한 데이트 코스이다. 이번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서울의 중심, 서울 시청 앞을 직접 두 발로 걸으며 창작의 영감을 받아보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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