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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 Jan 22. 2022

요리

월간 애호 - 21.12월



요리는 나의 지극한 불호였는데...


원래 요리에 정말 흥미가 없던 나였다. 내게 요리의 과정은 즐거움이라기보다 고난의 시간이었다.


무의미한 칼질을 반복하는 것,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적당히 익으면 타이밍을 잘 맞춰서 처치하는 것 등의 과정은 너무나 지난하고 복잡하게 느껴졌다.


고생 고생해서 음식물 쓰레기 만들기?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미리 준비하는 건 매우 버겁고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체계적인 순서, 정량, 시간 등 따라야 할 법칙들이 많아서 뭐든지 대충 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대로 대충 하다 보면... 요리는 망했다. 


기껏 재료를 손질하고 한참이나 불 앞에서 낑낑거렸는데, 완성된 요리를 먹고 나서의 실망감은 마치 고생 고생해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드는 기분이었다.


내 요리에 맛이 없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았다. 외식 대신 집밥을 선택한 건 건강한 음식을 먹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설탕, 소금, MSG를 아꼈다. 내가 한 요리에선 항상 밍밍한 맛이 났다.

배가 고플 때 급하게 음식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들여서 진하게 우러나오는 깊은 맛이 없었다. 요리에 요령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서 육수를 내고, 맛을 풍부하게 내는 법도 몰랐다.


무엇보다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맹렬하게 효율성과 성과주의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요리, 빨래 같은 살림을 무의미한 일, 무가치한 일로 여겼고, 그것에 들이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했다. 긴 노력을 들여서 고작 만들어낸 것이 한 끼의 음식뿐인 비효율의 극치인 세상.


요리를 하지 않더라도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장보기부터 시작해서 요리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효율성과 성과주의에 부합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다고 인생을 효율적으로 열심히 살지도 않으면서, 내가 정한 멋대로의 기준에서 요리나 살림은 무가치한 것으로 차치해버렸다.


내 일상을 가꾸는 하나의 방법, 요리


문득, 요리와 살림이 나의 일상을 가꾸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좋은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하고, 나를 위해 나의 공간을 쾌적하게 가꾸는 것이 비단 무의미하지 않은 일로 다가온 것이다.


하루의 모든 시간을 효율성과 성과주의의 논리로만 살 수는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 글쓰기만을 하루 종일 해야겠다 마음을 먹으면 어느새 느슨해졌다. 집 치우기, 설거지하기, 요리하기 같은 일들로 삶의 한 부분을 채우면,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다만, 모든 삶을 덮어버리지 않는 선에서라는 단서가 붙지만 말이다.


요리에 대한 이상할 집착도 살짝 내려놓았다. 고생해서 집밥을 만드는 보람이 있으려면, 소금과 설탕이 적게 들어간 건강식을 만들자는 생각이었지만, 문득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금과 설탕을 좀 넣어봤자, 외식을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재료와 나, 나와 재료의 물.아.일.체.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요리하는 시간이 즐겁게 느껴졌다. 복잡했던 마음이 반복적인 단순 동작을 하다 보면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과거 스트레스를 받을 때 윈도우에 기본으로 깔린 '스파이더 카드놀이'를 하며 머릿속에 잡생각을 떨쳤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카드가 물아일체가 되어 어느새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그 기분. 왼손에는 감자, 오른손에는 감자칼을 쥐고 감자의 껍질을 하나, 하나 벗기다 보면 어느새 감자와 나가 물아일체가 되어 머릿속을 메우던 잡생각이 사라졌다.


조금씩 발전하는 요리 스킬


 인터넷 레시피대로 재료들을 생략하지 않고 모조리 넣고, 소금과 설탕도 인색하지 않게 첨가하고,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차근 차근히 따라 하다 보면, 꽤 괜찮은 요리가 완성됐다. 요리도 하면 할수록 늘어서, 과정이 손에 익기 시작했다. 육수가 너무 빨리 끓기 시작하면 중간에 잠시 불을 줄이고 재료를 마저 손질하기도 하고, 중간중간 맛을 봐서 소금이나 설탕, 간장 같은 것으로 간을 맞추고,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는 국물이 충분히 우러나오도록 오래 끓이기도 하고.


물론 아직도 요리 초보자 수준이고, 때로는 집밥이 너무 번거로워서 집밥 파업을 선언한 뒤 배달 어플을 켜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주기 위한 맛있는 요리를 하는 과정과 나의 요리실력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것은 이 달의 분명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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