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의 쓸모 / 김영란
사람이 사람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얻는 것을 인맥(人脈)이라 말한다. 그럼 책이 책을 소개하니, 이를 통해 얻는 것은 책맥(冊脈)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책’을 소개하는 “책”을 통해 좋은 <책>을 만나곤 한다. 다정한 벗을 만나듯 다감한 책과 마주함은 그지없는 기꺼움이다.
사람을 소개 받을 때에 누가 소개했는가가 중요하듯이 책을 고를 때도 누가 지었는지, 누가 추천하는지를 고려하게 된다. 김영란이 미덥기에 책을 찾는 내 손길은 덩굴손처럼 이 책을 향해 벋었다.
김영란은 서울대 법대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로서 29년을 보냈다. 2004년에 최초로 여성 대법관이 되었으며, 사회적 약자와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여 ‘소수자의 대법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입법에 힘썼다.
김영란이 쓴 <책 읽기의 쓸모>는 자신의 책 읽기를 보여주며 아울러 몇몇의 책을 소개한다. 이 책은 도서출판 『창작과비평』에서 창간 50주년을 기념하여 연 ‘공부의 시대’라는 강연회의 강좌 내용을 바탕으로 더 알차게 보충한 책이다. 그저 무난하게 살기에도 버거운 시대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공부가 필요한 때이다.
공부란 무엇일까?
사전을 살펴보니 네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겉과 안을 동시에 바라보는 일, 더불어 나의 바깥을 이해하는 일, 타인과 함께 사회를 고민하는 일, 읽고 쓰고 말함으로써 참여하는 일이다.
어, 근데 이게 공부의 뜻이 맞나 하는 의구심을 들 정도로 생경스럽다. 지금의 학생이나 학부모가 생각하는 공부와는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기에 공부의 뜻을 곱새기며 책을 펼쳤다.
사람들은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보통 책을 읽는데, 김영란은 지식과 상관없는 책읽기를 해왔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책 읽기의 쓸모>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고갱이는 ‘써먹지 않는 독서의 쓸모’이다.
김영란은 문학서적을 많이 읽었다. 문학서적은 법률가에겐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그야말로 써먹지 않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공이나 직업과는 상관없는 공부라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글쓴이가 처음 읽은 책은 동화책이다. 어릴 적에 친구의 집에 있는 동화책 전집을 무척 부러워했다. 이야기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것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는다.
어릴 적, 김영란은 늘 집에서 혼자 책만 보던 편이었다. 유일하게 부모에게 혼난 것이 친구집에 놀러가서 안 오는 거였는데, 자기집에 더 이상 볼 책이 없어서 친구 집에서 책 보느라 늦었던 것이다. 그 시절, 책이란 책은 ‘어른 책’과 ‘어린이 책’ 안 가리고 모조리 읽었다.
김영란은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이 지은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주인공인 토니오처럼 세상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세상의 주인공은 왕자나 공주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자신은 그런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으니 세상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공부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을 가졌다.
글쓴이는 의아하고 희한하게도 판사라는 직업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판사생활을 계속 해왔다.
‘이건 한스의 세계이고, 나는 여기 맞지 않아’, ‘나는 토니오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한스의 세계를 계속 관찰하고 있어야 해’라는 식으로 판사를 그만 두지 않은 거다.
한스는 토니오가 좋아하면서도 한계로 느끼는 친구인데, 이를테면 잘난 엄친아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를 ‘아이러니’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아이러니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실제 사실과의 어그러진 동떨어짐이다. 토마스 만은 토니오를 시민적 세계와 예술가의 세계 어느 쪽에도 끼지 않고 둘 다 거리를 두는 태도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양방향에 걸친 아이러니’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이분법에 관해 소개한 또 다른 책은 ‘미셸 뚜르니에’의 <흡혈귀의 비상>과 ‘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다. 고슴도치형은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으로 보고, 여우형은 다양한 목표를 추구한다.
김영란은 책읽기와 직업을 늘 분리해서 생각했다. 법원에서는 남의 사건을 연구하는 법률가이고, 집에서는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책만 읽었다.
저자는 <시적 정의>(마사 누스바움)를 통해 그동안 읽어온 책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시적 정의는 재판관에게 ‘문학적’이길 요구한다. 문학적인 사고는 과학적인 사고와 등을 대고 있다. 과학적인 사고는 경제학적 사유이다.
누스바움은 재판관이 갖추어야 할 공적 합리성을 공평한 관찰자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문학적 상상력은 재판관이 자신 앞에 놓인 사건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고상하게 거리를 두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을 겸비한 구체성과 정서적 응대를 바탕으로 현실을 철저하게 검토할 수 있게 한다.
“문학적 재판관”은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와 비슷한 관찰자의 능력을 지난 재판관이다. 김영란은 <시적 정의>를 통해 그동안 소설을 많이 읽어온 것이 전혀 쓸모없는 일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지금은 책읽기도 순수하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다. 학력평가에 도움이 된다기에 책의 줄거리만 대충 훑어보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 책읽기를 하곤 한다. 수박의 참맛은 속이지 겉이 아니다. 음악은 귀로 들어야 감상할 수 있고, 그림은 눈으로 봐야 느낄 수 있다. 음악의 제목, 작곡가, 장르만 달달 외운다고 그 음악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림의 화가, 사용한 도구, 틀, 장르를 달달 외운다고 그 그림을 감상했다고 할 수 있을까? 수박은 자고로 속을 먹어봐야 그 맛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알짜 책읽기란 오롯이 읽는 것이다. 배경, 장르, 이런 것은 그저 양념이다. 이것이 밥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저자의 책읽기는 약삭빠른 헛똑똑이의 눈에는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허비하는 비능률적으로 보일 것이다. 왜 바른 길 두고 에둘러 갈까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사실 글쓴이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독서의 지름길이 아닌 구불구불한 길을 걸었고, 그 발길을 통해 다양한 풍경들을 봤다. 큰길로 갔으면 보지 못했을 풍경들, 그리고 빨리 갔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사물들을 찬찬히 살피면서 독서의 길을 걸었다.
“저는 상상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이 없으면 ‘이미 있는 것’에 대해 공부하고 익히는 일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그것만 하기도 바쁜 세상이지만, 그러기만 해서는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무언가 더 나은 것에 대한 상상, 다음에 나아갈 행보에 대한 상상, 그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죠.” (84쪽)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모든 책은 하나하나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같은 책을 읽더라도 각자가 듣는 이야기는 다를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한한 세상 속을 여행하는 일이면서 또한 보르헤스의 말처럼 나 자신을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에 대해 기록한 단 하나의 책을 찾는 것 말이지요. 달리 말하자면 세상을 통해서 나 자신을 찾는 공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107~108쪽)
“책을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저를 닦는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수양의 방편으로 책 읽기를 택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말하자면 저의 쓸모없는 공부의 쓸모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무애의 경지란 다다르지 못하는 어떤 경지겠지요.” (110쪽)
독서는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많은 음식을 먹고 그것이 양분이 되어 몸이 자라는 것이다. 먹는 음식의 대부분은 배설물로 빠져나온다. 아깝다. 영양제처럼 알짜만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주인이 먹는 식사처럼 만들면 참 좋을 텐데! 근데, 정말 좋을까?
만약 그대에게 소화가 잘 되는 우주인의 식사만 준다면, 그대는 좋겠는가? 음식은 영양분을 공급하는 기능적인 부분도 있지만 맛보는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독서에 있어 사냥꾼이 겨냥하듯 핵심만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햇살 좋은 아침에 바깥 풍경을 바라보듯 글자들을 일일이 톺아보는 것은 어떤 유익이 있을까? 그것은 재미이자 또한 상상력이다. 내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산에서 메아리를 건네듯 책과 읽는이가 생각을 주고받는다. 이 재미는 쓸데없어 보이는 놀이와도 같다. 놀이는 즐거운 재미이자 누구나 바라는 행복이지 않은가?
책을 갈무리하며 글쓴이는 스스로 묻고 답한다.
“왜 저는 쓸모없는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걸까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이 책의 끄트머리를 인용하며 내게 묻고 답한다.
“그것이 말하자면 저의 쓸모없는 공부의 쓸모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무애의 경지란 다다르지 못하는 어떤 경지이겠지요. 그렇다면 쓸모란 말이 쓸모없는 곳일 텐데요, 저는 그럴수록 더욱 계속해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혹 보르헤스처럼 알렙을 보게 되거나 신의 글을 직관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순간 그 직관은 나와는 더 이상 무관한 것이 될 것이므로, 역시 또 계속 책을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