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하룻밤 / 이안수
도서관에 갔다. 책 목록을 쭉 훑어보다가 고른 책은 소방관. 의자에 앉아 기다리니 잠시 후 한 소방관이 내 앞에 앉았다. 이 소방관과 반나절 이야기를 나눴다. 소방관이라는 책 한 권을 읽은 것이다. 이상은 ‘사람도서관’의 풍경이다.
사람도서관은 책 대신 사람을 빌리는 곳이다. 사람책을 빌리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종이에 쓰인 글이 아닌 대화를 통해 말로 듣는 것이다. 소방관이 되고 싶은 사람은 사람도서관에서 소방관을 대출하여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책을 통해 지식과 경험과 조언을 얻는 것이다.
파주 헤이리의 모티프원(motif#1)은 일종의 사람도서관이다. 모티프원에서는 매일 맛난 대화가 이어진다. 주인과 손님은 모두 한 권의 책이 되어 서로 읽으며 읽힌다. 그곳은 각양각생의 사람들이 갖은 삶을 나누고 버무리는 사람도서관이다. 주인은 스스로 사람책이 되어 제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잎눈을 꼬드기는 봄날의 햇살처럼 방문객의 마음을 벌리기도 한다.
헤이리에서의 책읽기는 글자만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자연의 풍경을 눈여겨 살피는 것도 포함한다. 진실을 볼 깜냥만 있다면 마주하는 사람이나 자연은 모두 한 권의 책이다.
共君 一夜話, 勝讀十年書
그대와 더불어 나누는 하룻밤의 대화가, 십 년 책 읽은 것보다 낫습니다.
중국의 격언서인 <증광현문(增廣賢文)>에 나오는 이 말은 모티프원의 정신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소개하는 이 책의 제목인 <여행자의 하룻밤>은 이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헤이리 예술마을의 이안수 촌장은 바람따라 떠도는 유목민이다. 그는 자유로운 삶을 찾아 여러 나라를 떠돌며 여행을 했다. 40년을 넘게 살아온 이 땅 말고 지구 어딘가에 한국과는 다른 유토피아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얻은 결론은 이 세상 어디에도 늘 평화롭고 행복한 유토피아는 없다는 확신이었다. 또한 자신이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세계 곳곳의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 풍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세계의 예술가와 여행자들이 모이는 아지트를 짓기로 결심했다. 귀국하여 헤이리에 모티프원을 짓고, 그곳을 세계 사람들의 가슴 속을 항해하는 항구로 삼기로 정했다.
국내로 돌아온 촌장은 신문과 텔레비전을 끊었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볼만한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기에 이것들을 끊는 것은 금연처럼 비장했다. 텔레비전을 등진 후에야 앞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고, 신문을 손에서 놓은 후에야 서가의 책을 손에 잡게 되었다. 자신은 물론 모티프원에도 신문과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았다.
모티프원의 서재엔 잣나무 서가가 사방에 자리하여 1만 권의 책을 품고 있다. 이안수 촌장은 서재를 자신만의 집필실로 삼고자 했는데, 방문하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서재를 보고 싶어 하고 서재에서 머무는 것을 좋아하기에 생각을 바꾸어서 모두의 서재로 만들었다.
모두의 서재는 책이 뒤죽박죽 자리하여 책을 찾는데 헷갈리기는 하지만 원하는 책을 찾는 행동은 숨바꼭질하는 재미를 느끼게도 한다. 서재를 개방하면 책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도깨비가 요술을 부린 양 늘어났다. 손님들이 돌탑을 쌓듯 가지고 온 책들을 서가에 하나둘 두고 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때때로 보내주기도 했다.
서재는 매일 밤 사람책 도서관이 되어 대화를 통해 사람책이 늘어난다. 어떤 나그네는 고민을 털어놓으려고 오기도 하고, 또 어떤 나그네는 기쁨을 나누기 위해 오기도 한다. 어떤 연인은 매듭을 지으려고 오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부는 매듭을 풀려고 오기도 한다. 촌장은 중간에 자리하며 어떤 일은 부추기고 또 어떤 일은 말리기도 한다.
모티프원에 방문한 몇몇의 사람책 이야기를 소개한다.
노년학 전문가인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의 프란츠 콜랜드 박사는 서울에서 열린 노년학 의학대회 발표자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행사가 끝나고 하루의 자유시간이 생겨서 헤이리를 찾았다.
모티프 정원을 두리번거리다가 이안수 촌장을 만났다. 촌장은 건강하게 늙는 법에 관해 박사에게 물었고, 콜랜드 박사는 여섯 가지 요소를 전해주었다.
첫 번째는 운동인데, 하루에 4마일(6.4km)을 걷는 것이다.
두 번째는 레드와인을 마시는 것인데, 하루에 한 잔이 좋다.
세 번째는 물을 마시는 건데, 하루에 2리터가 적당량이다.
네 번째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사회관계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꾸준히 사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책읽기도 일종의 사회관계라고 볼 수 있으며, 책읽기보다 더 좋은 것은 글쓰기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행동은 뇌를 매우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확실히 글쓰기는 머리를 많이 쓰게 된다. 책읽기보다 훨씬 더 많이. 나도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 책읽기는 물론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해보련다.
여섯 번째는 유머이다. 즐겁게 사는 것이 장수에 크게 도움이 된다.
콜랜드 박사는 모티프원을 떠나기 전에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자신이 있는 곳, 그 순간에 집중하고, 또 유머를 잃지 마세요. 그게 바로 아프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나이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촌장은 제 책을 닫으려는 박사를 불러 다시 물었다.
“항상 현재에 만족하라는 것인데 저처럼 나이든 사람이 아닌, 젊은이에게도 해당되나요?”
박사는 책을 닫으며 말했다.
“아, 이 말은 노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젊은이들은 미래를 지향하고 모험할 필요가 있지요. 삶의 기준은 나이에 따라 달라야 해요.”
맞다. 삶의 기준은 나이에 따라 달라야 한다.
벽에 걸린 그림을 어릴 적에는 올려다보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내려다본다. 아침에 보는 해와 저녁에 보는 해는 다르듯 그 해를 바라보는 사람의 행동도 사뭇 다르다. 아침해를 보는 이는 일을 벌이고, 저녁해를 보는 이는 일을 갈무리한다.
“딸이 중학교 때였어요. 공부를 제법 잘하는 총명한 아이였지요. 그러나 늘 전교 3등만 하는 거예요. 학원에 보내 좀 더 공부를 보충하면 1등도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월급이 늘었고 마침내 생활비에서 학원비를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당장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학기가 지나도 딸은 늘 3등이었습니다. 1등과 자리를 한 번 바꾼 적은 있었지만 곧바로 1등이 그 자리를 탈환했습니다. 1등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지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딸을 학원에 보내는 대신 늘 1등을 하던 친구와 함께 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그 친구의 부모님은 두 분이 함께 일을 하시는 상황이라 딸을 챙길 여유가 없는 듯 했습니다. 딸에게 친구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게 해서 같이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함께 숙제하고 함께 시험공부를 하도록 했지요. 제가 해 준 저녁을 함께 먹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집에 돌아갔어요. 도시락을 쌀 일이 있으면 항상 딸 것과 똑같은 도시락을 하나 더 싸서 그 아이를 먹였지요. 두 딸을 키운 셈입니다. 딸은 1등을 하는 친구의 공부 습관을 따라갔고 시험 때는 그 아이의 공부 방법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마침내 딸이 2등을 하더군요.”
3등을 2등으로 만든 어머니의 이야기다. 지금은 마흔이 된 딸의 중학교 시절 이야기인데 참 슬기로운 어머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안수 촌장이 아프리카를 여행할 때 영국의 두 청년을 만났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아프리카와 남미를 여행한 후 대학에 입학할 계획이라고 했다. 여행경비는 고등학교 스포츠센터에서 청소하고 호텔 잡부로 일하면서 모았다고 한다.
이 촌장은 두 청년에게 여행하기로 한 것은 정말 좋은 결정이라고 말했다. 젊었을 때의 여행은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 있지만, 어른들의 여행은 단지 마음만을 바뀔 뿐이다.
호주에서 모녀가 모티프원을 방문했다. 호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쯤 ‘자기 결정 기간’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졸업 후 다른 나라를 여행하거나 일을 하면서, 과연 대학에 진학할지, 대학에 간다면 무엇을 전공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거다. 이런 비율이 칠팔십 퍼센트나 된다고 한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은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70퍼센트 이상 대학 진학률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OECD 국가들과 비교하여 1위이다. 그런데 대졸자의 평균 취업률은 58퍼센트에 불과하여 OECD 국가들 가운데 꼴찌다.
대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대학 진학을 후회하느냐’고 물었는데 75퍼센트가 ‘후회한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원하는 직업을 찾지 못해서였다. 취업이 안 된다고 대학교육 자체를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세대인 것이다.
청년들이 언제부터인가 모두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십대부터 진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미루거나 포기하면서 오로지 대학만, 직장만 바라본다. 이는 자기 삶의 자리를 스스로 남에게 맡기는 꼴이다. 대학에 꼭 가야만 할까? 대학은 우리 앞에 놓인 외길이 아니라 갈래길 중의 한 길이다.
이제 자기의 행복을 위한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제 삶의 주인공은 남이 아닌 나이며, 누릴 때는 내일이 아닌 오늘이다.
로컬 북스테이 네트워크.
지역에 있는 북스테이는 섬처럼 외진 곳에 있지만 외딴섬은 아니다. 각 북스테이는 마음과 책으로 이어져 있다. 헤이리의 모티프원을 비롯하여 괴산의 숲속작은책방, 통영의 봄날의집, 화천의 문화공간 예술텃밭, 고창의 책마을해리, 파주 평화를품은집 등이 북스테이 네트워크에 함께 하고 있다. 책과 책 속의 인물을 통해 창조적 휴식의 기쁨을 나누면 더욱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작고 느슨한 연대다.
지지난주에 고향인 고창에 갔다. 고창에 ‘책마을해리’가 있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가보려고 벼르던 곳이었다. 어머니가 사시는 동네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책마을해리는 폐교가 된 나성초등학교에 새롭게 자리한 북스테이다.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인 책마을해리는 책이 있는 도서관이고, 밤샘 책읽기와 책이야기를 나누는 책학교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출판캠프이다. 책마을해리에는 13만권의 책이 있는데, 벽면을 가득 채운 ‘책숲시간의숲’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오래된 성에 들어가 명화를 감상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책방 ‘낫놓고기역’에 들어가니 거치대에 <여행자의 하룻밤> 책이 있어 반가웠다. 책을 들어 펼쳐보니 앞장에 이안수 촌장의 서명이 있다. 지난달에 이안수 촌장이 이곳에 와서 책이야기를 하는 행사를 하였다는 거다. 파주의 사람 이야기를, 통영에서 책으로 펴내고, 고창에서 그 책이야기를 나눈다. 책과 책, 책과 사람, 사람과 사람은 그물망처럼 서로 이어진 커다란 그물이다.
내 이야기도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버킷리스트’라고 하는데, 내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는 내 책을 내는 거다. 우리 모두는 한권의 책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책의 내용인 것이다.
나도 한권의 책이다. 다만 종이책으로 출간되지 않았을 뿐, 그 이야기를 한권의 책으로 채우기에 충분하다.
누구나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