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베른 <80일간의 세계일주>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이 있다.
90년대를 청소년으로 보낸 사람이라면 당시에 플레이를 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제목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를 누비면서 해적도 잡고 무역도 하고 모험도 하는 가슴 뛰는 이야기. 나는 2010년대 초, 아내와 함께 온라인판 [대항해시대]에 미친 듯이 빠졌던 경험이 있다. 평소에는 게임에 대한 관심도 없었는데, [대항해시대]를 시작하고 나서는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이점을 한껏 살려 한동안 밥 먹고 잠자고 게임만 할 정도로 푹 빠져서 지냈었다. 내가 미쳤지.
[대항해시대]에 매료되었던 이유가 뭘까? 지금 생각해 보면 ‘현실성’이었던 것 같다.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해서 무역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좋은 배를 사고 해적들과 싸우며 도시에서 도시로, 대륙에서 대륙으로 떠나는 여정은 마치 실제로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기쁘고 설레었다. 매번 지중해에서만 왔다 갔다 하다가 레벨이 올라 처음으로 아프리카 희망봉을 넘어 인도를 향해 갈 때의 설렘, 동남아를 지나 저 멀리 조선을 발견했을 때의 감격. 아, 갑자기 하고 싶네. 아무튼, [대항해시대]를 하면서 나의 머릿속에는 그전에는 관심도 없던 세계지도가 자연스럽게 새겨졌고, 오대양 육대주의 각 나라들을 척척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언젠가는 나도 내 캐릭터처럼 세비야 광장을 달리고 지중해에서 낚시를 하고, 동남아에서 육두구와 메이스를 한 보따리 사서 유럽에 팔아보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미국횡단열차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집으로 돌아오리라…
정신을 차리고, 책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이 책 [대항해시대] 아니, [80일간의 세계일주]는(이 기분에 취하기 위해 대항해시대 O.S.T를 틀어놨더니 정신이 안 차려 진다)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소설이다. 1872년에 ‘르 탕’이라는 신문에 연재되었다가 이듬해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연재될 당시에 이 이야기를 보기 위해 신문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쥘 베른은 어릴 때 사촌을 연모하여 사촌에게 산호목걸이를 선물해 주기 위해 인도로 떠나는 배에 숨어 탑승했다가 아버지에게 걸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낭만적이고 모험심도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냥 사랑에 눈이 먼 철딱서니 없는 소년이었던 걸까? 어쨌든, 주변의 권유로 법을 공부하다가 다양한 문학작품을 경험하고 소설가의 길로 빠져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전통적인 고전문학의 감성과 이성적인 현실세계의 이야기가 적절히 녹아들어 더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생생한 묘사와 자세한 설명에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상상이 들 때가 여러 번 있었다. 특히 환경과 시설, 배, 기계 등의 현실적인 대상에 대한 묘사가 탁월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포그는 아주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보이지만, 하는 일을 보면 정말 무모하고 대책이 없는 사람이다(남 같지 않다). 사교모임인 클럽에서 카드게임을 하다가 80일간의 세계일주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에 대한 논쟁이 일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전재산의 절반을 내기로 걸고 바로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떠난다. 처음에는 갓 고용한 프랑스인 하인과 둘만 떠난 여행이었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새로운 동료들도 만나고 사랑도 얻고 결국은 내기도 승리하면서 모든 것을 가진 승리자가 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탈것들과 다양한 나라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주 흥미진진하고, 나도 그 루트대로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게 만든다. 유럽에서 수에즈 운하를 지나 인도에 도착해서 기차로 인도를 통과하다가, 만들다 만 철길의 끝에서 코끼리로 갈아타고, 작은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해서 커다란 증기선에 올라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에 도착해서 횡단 열차를 타고 미국을 가로지르다가 돛 단 썰매로 갈아타고 미국의 동부로 가서 배를 ‘납치해서’ 영국으로… 특히 마지막 배가 석탄이 떨어지자 주인공 포그가 한 행동이 개인적으로는 정말 기가 막히고 유쾌했다(궁금하신 분은 직접 보시면 좋겠다). 물론 주인공 일행은 일정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드는 여러 가지 방해물들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 다른 교통수단으로 환승을 하게 되었는데, 문화와 상황에 따른 적절한 이벤트와 에피소드 들을 통해 이야기를 더욱 탄탄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야기의 결말도 전체적인 분위기만큼 유쾌하게 끝난다. 주인공 포그에게 닥친 마지막 위기로 인해 몇 시간 차이로 내기에 진 것으로 알았으나, 여행을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간 덕분에 하루를 벌어서 사실은 하루 먼저 도착했다는 것. 그래서 내기에도 이기고 인도에서 구한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도 한다는 아름다운 스토리. 정말 기분 좋고 유쾌하게 읽은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의 여운을 이렇게 독후감으로 남기며, 오랜만에 켜놓은 [대항해시대] O.S.T와 함께 아이들의 세계지도를 들여다보아야겠다. ‘언젠가 이루어질’ 꿈을 꾸면서 오늘 밤은 행복하게 잠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