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진영이는 이 날부터 새로운 세상을 매일같이 맞닥뜨려야 했다.
부도가 나고 얼마 후
집에 돌아온 진영이는
온 가구와 집기에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수많은 빨간딱지들을 보았다.
채권자들이 붙인 거라는데.
채권자 중에 대부분은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고등학교 동창들이었고
그들의 딱지가 제일 많았다.
이 날 이후 진영이 가족은 친척 모두와 결별하게 되었고
남은 건 오직 5 식구뿐이었다.
진영이 또래 아이들은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이제 막 준비를 시작할 시기에.
진영이는 대학에 대한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으나 문제해결의 시작은 일단 돈은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어머니를 구해야 했다.
어머니는 이미 반실성 상태였다.
진영이는 진지하게 어머니에게 이혼을 권했다.
어머니는 진영이의 말은 모두 들었고 온전히 이해했다.
진영이는 책상 위에서 모든 교과서를 내렸다.
보기 싫기도 했지만 이제 볼 필요가 없는 책들이었다.
대학은 이제 진영이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보다 고등학교는 일단 졸업하는 게 급선무였다.
‘어떻게든 1년만 버텨서 ‘고졸’ 졸업장을 받고 취직을 하자’
이제 고졸이 되는 게 진영이의 가장 현실적인 목표가 되었다.
그보다 동생들이 더 걱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둘째 진우가 고1로 올라오고 막내 여동생인 영은이는 중2가 되는데 두 동생들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진영이는 생각했다.
그게 파산한 가족의 장남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문제는 ‘그놈의’ 아버지였다.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속을 썩이더니 자신만의 목표, 성공을 하겠다고 가족도 내팽개치고
그동안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한 건가? 그대의 성적표는 대체 왜 이리 초라한가? 아니 왜 이리 처참한가?
7년 전에 경리 미스김과 시작했던 사업의 목표가 고작 내연관계였단 말인가? 결국 어머니와의 이혼이 성공의 끝이었나?
부도를 맞은 지 두 달째 접어든 어느 날, 진영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영아, 여기 아버지 옷가지하고 음식 좀 쌌는데 네가 이걸 아버지에게 좀 가져다 드려야겠다. 지금 아버지가 경찰에 쫓기는 신세라서 엄마가 가면 혹시 따라올지 모르니 네가 좀 대신 가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만약 아버지 있는 곳으로 곧바로 가면 혹시 경찰이 따라올지 모르니까 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다시 내려서 원방향 쪽 버스로 다시 갈아타고 그리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 이걸 드리고 오렴. 할 수 있겠니?”
진영이는 물끄러미 어머니가 가리키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몇 가지 반찬들 위로 봉지에 싼 아버지의 속옷, 양말, 옷 등이 들어 있고 이걸 밖에서 보이지 않게 큰 명품백 안에 가지런히 넣어 놓은 것이었다. 밖에서 보면 명품을 사서 가는 것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맨 위에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는 머플러 스카프가 잘 보이도록 덮여 있었다.
진영이는 어머니가 꾸려 놓으신 가방과 어머니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날 어머니의 얼굴은 왠지 슬퍼 보였지만,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찬찬히 얘기하려 노력하시는 모습이 보기에 힘들어 보였다.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라 해도 어머니였다.
진영이는 그런 어머니가 어떻게 저런 원수 같은 남자에게 이토록 관대하실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머니, 전 할 수 없어요. 아니, 안 할래요. 솔직히 못하겠어요. 그 사람 보기 싫어요.”
그러나,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주신 쇼핑백을 들고 집을 나선 진영이는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하며 혹시 누가 따라오지 않는지 살폈다.
그리고 어머니 말씀대로 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 정도를 가서 내렸다. 다행히 낮시간이어서 그런지 버스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버스를 타고 내리는 동안 진영이 외에 동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아버지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영이는 버스를 이렇게 갈아타고 가야 하는 현실이 싫었고 이런 상황을 만든 아버지가 죽도록 미웠다. 만나면 욕이라도 퍼붓고 마음껏 두드려 패기라도 하면 속이 시원하리라 생각하며 씩씩거리고 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어떤 추레한 노인이 있었다.
이제까지 진영이가 기억하던 40대의 힘이 넘치고 풍채 좋은 그 아버지는 거기에 없었다.
거기엔 어떤 60대 노인이 힘없이 돌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처음에 진영이는 눈을 의심했고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 아버지가 맞았다.
“진영이 왔구나. 수고했다. 고맙다.”
아버지는 진영이를 흘끗 보고 나서 다시 얼굴을 땅으로 향한 채 힘없이 말했다.
“어머니가 이거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왔어요.”
“고맙다 진영아, 여기에 놓고 가. 너 보기 면목없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네 대학입학은 반드시 시킬 테니 공부를 포기하지 마라. 재수는 안된다.”
진영이는 그날, 그 노인을 그곳에 그대로 둔 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날 만난 노인을 진영은 평생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