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기도

어머니의 기도

by 보스턴임박사

그날부터 진영이는 대학을 마음에서 지웠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디에서 일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취업이 진영이의 목표가 되었다.


그런데, 몇 주 후 압구정 교회에서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진영이 학년을 위한 대입시험 100일 기도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진영이 어머니는 이번에도 매우 상기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영아, 이거 봐라. 3년 전에 너희 학년을 위해 100일 기도회를 처음으로 하더니 또 이번에는 너희 학년을 위해 처음으로 100일 기도회를 한다고 하는구나. 아무래도 너와 너희 학년은 하나님이 크게 만드실 모양이다.”

지난번 100일 기도회와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할지 기도제목을 써내야 하고 그 기도제목을 모든 어머니들에게 알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영이 어머니는 기도제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으셨다. 진영이는 솔직히 이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도하실 필요 없어요 어머니.”.

이렇게 어머니께 말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설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진영이의 기도제목을 듣지 않고는 진영이를 내버려 두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진영이는 대답했다.


“학력고사 만점.


지금 집에 돈도 하나 없는데 제가 어떻게 대학을 가요. 유일한 방법은 장학금 밖에 없어요. 그러니 정 하고 싶으시면 만점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어머니는 이 말을 흡족하게 여기시고 매우 만족해하셨다.

교회에서 100일 기도회가 시작하는 첫날, 어머니는 진영이의 기도제목을 기도 동역자들에게 알렸다.

‘학력고사 만점’

그날 모든 어머니들은 기도제목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어머니 기도의 동역자들은 정말 그대로 기도했고 어머니들은 진영이가 어떤 성적으로 대학에 가게 될지 정말 만점이 나올지 은근히 기대하게 되었다.


진영이는 취업 일자리를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금 시간이 나면 아버지의 책장에 있는 책들을 조금씩 읽었다. 그러나, 교과서는 절대 들추지 않았다. 교과서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그 순간에만 슬쩍 볼뿐 자세히 읽어 보지 않았다.


아버지와 사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지 알아본 적이 있었다.


사관학교는 전액 장학금이기 때문이었다. 진영이는 어릴 때 사고로 왼쪽 검지 손가락 한마디를 잃은 적이 있다. 외할아버지가 한의사이셨는데 외갓집에서 몰래 한약을 자르는 기계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잘린 것이었다.

이 한마디 손가락 때문에 사관학교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진영이는 크게 낙담했다. 이제 방법은 기적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이미 진영이 마음은 취업으로 결정하였다.


100일 기도회가 끝났다.


결국 대입 시험일이 왔고 진영이도 어머니의 간청으로 시험만은 보았다. 대입 시험을 치른 날 어머니 기도의 동역자들과 그 자녀들이 교회에 모여서 그동안의 노력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진영이도 어머니를 따라 그 자리에 갔다. 진영이가 나타나자 어머니들이 진영이를 알아보고 모두 시험을 잘 보았는지 물으며 기뻐하셨다. 그런 기도의 동역자들을 보고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셨다.

그러나, 진영이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신기와 정우도 만났다.

우리는 그래도 1년을 잘 버텼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드리는 진영이 뒤에서 누군가 진영이 이름을 불렀다.


정인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정인이 어머니도 계셨다. 진영이 어머니와 신기 어머니 그리고 정우 어머니 모두 정인이 어머니를 마치 아주 절친인 것처럼 대하며 요란한 수다를 시작하셨다. 아휴 따님이 아주 미인이네. 피아노도 잘 치고. 계속 음대실기 때까지 기도해요 우리… 뭐 이런 식이었다. 진영이는 정인이에게 여긴 어쩐 일이냐고 조금 퉁명스럽게 물었다. 1년 전 크리스마스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날 조금이라도 더 인수와 있어주지 않은 정인이가, 진영이는 내심 서운하기도 했었다.

정인이는 1년 전보다 얼굴도 수척해지고 몸도 허약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만면에 환한 웃음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모를 정도로 행복한 모습이었다. 정은이 말로는 지난 1년간 피아노 레슨 선생님으로부터 피아노 연습 시간을 두배로 늘려야 한다고 해서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오로지 피아노만 쳤다고 했다. 아마 이제 손가락이 다 문드러져서 지문이 다 없어졌을 거라는 둥, 손가락 끝에 온통 딱딱해서 공사판 십장 손가락이라는 둥, 손가락 관절염과 어깨 통증, 허리에 무리가 가서 할머니가 다 됐다는 둥. 이런 말도 안 되는 넉살을 부리는 것이었다.


정은이 어머니는 어떻게 진영이 어머니를 아시냐고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러자, 정은이는 포복절도를 하는지 대성통곡을 하는지 모르게 갑자기 소리를 크게 내며 ‘ 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며 자지러지게 웃는 것이었다. 고등부를 나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요청에 진영이는 어머니에게 그럼 대신 엄마가 교회를 열심히 나가서 나를 위해 기도를 좀 해보라고 했다고 했다. 그러면 피아노 1년간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그게 통했다고 한다. 그날부터 정인이 어머니는 신기 어머니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그때부터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기도 모임 등을 다 따라다니셨다고 했다. 그러던 중 100일 기도가 시작되었고 정인이 어머니도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기 어머니와 대입 100일 기도에 나오셨고 그러는 중에 정우 어머니와 진영이 어머니도 알게 되신 것이었다. 당연히 정인이 어머니도 진영이의 대입만점 기도제목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진영이는 그 말을 듣자 너무나 창피했다.


1주일 후 성적이 나왔다.


진영이의 성적은 공부를 하지 않은 것치곤 나쁘지 않았지만 비슷한 실력의 다른 친구들에 비해 2, 30점 정도가 낮았다. 진영이의 어려움을 이미 잘 아시는 담임선생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셨고 진영이를 격려해 주셨다. 진영이에게 명문대인 Y대 분교에 있는 어느 학과를 보여주시고 이곳에 가면 4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지원할 것을 종용하셨다. 그러나, 진영이는 그 대학과 학과는 가고 싶지 않았다.

본래 꿈이 의대였다. 그러나 돈을 빨리 벌어야 하는 게 급선무였다. 의대는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때까지 돈을 벌지 못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약속한 대로 첫 학기 입학금을 마련했다고 하면서 무슨 과를 지원하고 싶은지 물었다.


진영이는 한의대를 가겠다고 했다.


6년만 공부하면 곧바로 개업할 수 있는 한의대가 가장 시간도 절약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한의대는 전국에 고작 5개뿐이었고 서울에는 K대뿐이었는데 K 대는 진영이 점수로 합격여부를 100%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안전하게 합격할 수 있는 전라도에 있는 W 한의대의 원서를 구하러 진영이는 종로에 있는 큰 서점 두 군데에 가게 되었다. 원서를 구하려면 하루 만에 모두 구해야 했는데 W 한의대의 원서는 몇 번을 방문해도 전혀 구할 수 없었다. 4천 장이나 되는 원서가 나오기 무섭게 나갔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대신 단과대인 D 한의대 원서만 집어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진영이는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며 종로 거리에 서있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

‘K대 한의대를 지원하자. 만약 합격하면 다니고 안되면 그냥 포기하고 취업하기로 하자. 어머니 기도의 힘을 믿어보자’

이런 생각이 들자 진영은 K대로 가는 버스를 바로 잡아탔다. 처음 가보는 K 대는 북쪽 외진 곳에 있었고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거의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K대 원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

진영이가 W 한의대 원서가 아닌 K대 원서를 가지고 나타나자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이미 다 지나갔고 당장 다음날 담임선생님과 원서를 작성해 이틀 후 지원을 서둘러야 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진영이 아버지는 한참 후 이렇게 말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일단 K대 한의대를 1 지망으로 하고 2 지망은 대신 안전하게 화학과를 지원하자.”


진영이는 화학을 제일 싫어했다.


화학선생님들은 원리는 하나도 설명하지 않고 무슨 이상한 암기법만 알려주었기 때문에 진영이는 왜 대체 화학이 과학과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차피 2 지망은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크게 괘념치 않았다.

다음날 K대 원서를 본 담임선생님은 말도 되지 않는다며 왜 4년간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Y대 분교를 가지 않느냐고 완강히 거절했다. 이 날만큼은 진영이 아버지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담임선생님은 손에 들고 있던 Y대 원서를 집어던지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한참 있다가 담임선생님이 돌아왔을 때, 진영이와 아버지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진영이는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렇게 해서 진영이는 K대 한의대 1 지망, 화학과 2 지망으로 원서를 넣게 되었다.


합격자 발표 전날밤, 진영이는 매우 고열이 나고 헛소리를 할 정도로 아팠다.


지난 1년 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겪지 않아도 될 무수히 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었고 엄청나게 좌절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었는지 기적적으로 여기까지는 왔다. 그러나, 이제 기적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이미 ’ 난 대학은 포기했어’라고 수차례, 수십 차례 대뇌 었지만 막상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오자 그만 지난 시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감과 동시에 자신에게 내려졌던 지옥 같은 상황들을 처절하게 아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진영이를 위해 기도한 어머니에 대한 송구한 마음에 또 한 번 절규했다. 그날 진영이는 밤새 그렇게 잠 못 이룬 채 밤새도록 아파했다.


다음날,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아버지와 K대로 향했다.


K대 안에는 이미 수많은 지원자들과 그 가족들이 와 있었고 자신들의 합격을 확인한 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과 불합격을 확인한 사람들의 실의에 빠진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영이는 한의대 발표장으로 향하고 아버지는 화학과 발표장으로 향했다.

‘떨어졌다.’

진영이는 ‘선우진영’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그때였다. 저쪽에서 아버지의 흥분한 소리가 들려왔다.

“진영아, 여기 화학과에 합격했다. 합격했어! 축하한다! 축하해! 정말 고생했다! 고생했어!”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렇게 해서 진영이는 K대 화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목요일 연재
이전 20화보이지 않는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