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창단의 꽃, 피아노 반주자

by 보스턴임박사

신기는 외아들이었다.


신기 아버지는 외국계 회사의 중직으로 노력하며 사신 분이셨고 신기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대표이사로 승진하셨다. 남부럽지 않게 자란 신기는 외아들로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남들도 자기와 같으려니 생각하며 자랐다.

신기의 부모님은 압구정 교회에서 중직이셨다.

새 신자나 새로 이사 온 가정이 있으면 신기의 부모님이 항상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돌보았고 신기는 그런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신기도 고등부에서 새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교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기에게는 항상 새로 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맡겨지곤 했다. 어려운 친구가 있으면 나름대로 돕고자 하는 마음이 신기의 마음에 있었다.

진영이 중1 때 처음 중등부에 들어왔을 때 처음 만난 친구도 그래서 신기가 되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진영이와 신기는 절친이 되어 항상 붙어 다녔다.

고1 여름, 일주일간 농촌교회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진영이와 신기가 함께 다녀왔고 정인이와 소은이도 같이 갔었다.


진영이, 신기, 정인이, 소은이, 4명이 1주일 내내 같이 교사로 활동해서 1주일 내내 함께 지냈다.


덕분에 네 명은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정인이가 피아노 반주를 하고 진영이, 신기, 소은이가 어린이들 앞에서 율동을 가르치기도 하고 정인이까지 네 명이서 아이들과 선생님들 앞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다.

봉사활동을 다녀온 이후에도 네 명은 친하게 허물없이 지냈다. 다만 고2 때 고등부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영이와 신기는 새로 온 남학생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정인이와 소은이는 새로 온 여학생들이 잘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애쓰고 있었다.

정인이와 봉사활동을 하면서 진영이는 정인이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정인이가 교회활동에만 매달릴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인이는 주일에 오랫동안 교회에 머물 수 없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고 진영이는 그 이유를 남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절친인 소은이만이 그 이유를 알았고 함께 있던 신기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역시 함구했다.

예전에 인수가 진영이에게 정인이에 대해 물었을 때, 진영이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고 반주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것도 정인이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의 의미였다. 신기도 무언으로 진영이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중창단 나머지 멤버 누구에게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고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진영이가 고1 되던 해 가을에 문학의 밤이라는 고등부 외부 발표행사에서 연극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당시 중2였던 현서와 함께 연극을 했었다. 연습실에 피아노가 있어서 중간중간 쉬는 때면 현서가 피아노를 치곤 했다. 진영이와 현서는 역할이 겹치지 않아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현서가 피아노를 좋아하고 잘 친다는 걸 진영은 이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영은 중창단 멤버를 모으면서 이미 마음에 중3인 현서를 중창단의 반주자로 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신기에게도 현서를 중창단 반주자로 하는 것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신기도 정인이가 예배 시간 이외에 피아노 반주를 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현서라면 차분하고 성실해서 믿고 맡길 수 있겠다고 이미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본 상태였다.

다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인수만이 혼자 상상의 날개를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인수는 오늘이야말로 정인이를 반주자로 하자고 말할 날이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회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이번 주 일요일만큼 교회 오는 게 즐거운 날이 없었던 건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진영이를 고등부에서 만났을 때 진영이는 인사 이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평소처럼 망부석처럼 앞만 보고 예배에 집중했다. 인수는 예배 중간중간에 피아노를 치는 예쁜 정인이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마음으로 흐뭇해하고 있었다. 예배가 마치자 정인이는 이내 사라졌고 인수는 빨리 점심을 먹고 우리들의 중창단 연습실로 향했다.


인수가 한 5분쯤 평소보다 늦게 연습실에 들어섰을 때, 이미 나머지 7명은 모두 와 있었다.


인수가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하려고 급하게 들어오는데 친구들과 동생들에게 인사하려는 찰나, 피아노에 왠 앳된 여자아이가 앉아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진영이가 인수에게 말을 걸었다.

“인수야, 여기 현서라고 중학교 3학년이고 오늘 피아노 반주를 좀 도와주러 왔어.

현서,

여기 인수 오빠야. 아주 목소리가 멋있고 원석이와 함께 베이스를 맡고 있어.

인사해!”

인수가 어안이 벙벙한 채 서서 어찌 말을 못 하고 있는데 그때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현서가 일어서며 공손히 인수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수 오빠. 전 조현서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인수는 엉겁결에 목례만 했을 뿐 따로 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인수를 원석이가 빙긋이 웃으며 자기 옆으로 잡아끌었다.

이때, 정우가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인수도 왔고 다 모였으니 내가 먼저 얘기를 할게. 사실 미리 얘기를 하면 좋았는데 나도 확신이 없어서 혹시 몰라서 진영이한테 먼저 물어보느라 이제야 말을 하게 됐어. 우리가 비가 내리네 연습을 하고 있잖아. 그런데 다음 노래를 뭘 할까 생각하다가 ‘주의 크신 은혜’라는 노래를 해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진영이가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고. 우리 마음이 통한거지.”

그러면서 정우는 진영이를 향해 눈을 찡긋하였다. 진영이도 계속하라는 듯 목례를 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좀 어려워서. 나도 숭실 OB 테이프를 여러 번 들어보고 악보도 봤는데 많이 어렵더라고. 그래서 일단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테이프를 가져왔는데 이걸 먼저 들어보고 그다음에 파트별 연습을 현서와 함께 하는 게?”

원석이가 답하듯 말을 이었다.

“그래, 나도 좀 어려운 노래 하고 싶었어. 정우가 준비를 이렇게 많이 했으니 정우 말대로 해보자.”

원석의 중저음 베이스 목소리가 울리며 연습실을 꽉 채워주었기 때문에 따로 의견에 대한 답을 듣지 않아도 되어 보였다.

정우는 바로 숭실 OB 테이프를 틀었고 우리 모두는 그 앞으로 귀를 바싹 대었다.


주의 크신 은혜로써 구원을 받았네

주여 다시 우리들을 버리지 마소서.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마지막 부분까지 다 듣고 나자 모두들 숨을 멈춘 듯 듣고 있다가 이내 큰 숨을 쉬는 것이었다. 정태가 말했다.

“이야, 이거 한 달 가지고 안 되겠는데?”

그러자 모두들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 어려운 ‘주의 크신 은혜’를 마스터하기 위해 연습에 돌입했다.


처음엔 파트별로 현서가 앉아있는 피아노 앞에서 연습을 하고 다음 파트가 연습할 때 앞에 연습한 파트는 작은 소리로 각 부분에 맞는 화음을 넣었다. 그리고 또 다음 파트가 할 때에는 그 앞 두 파트가 자기 부분의 파트를 해서 화음을 얹었고 마지막 파트가 연습할 때에는 나머지 세파트가 자기 부분을 넣어서 거의 완전한 화음을 이루었다.

연습 중이었는데도 이미 너무나 아름다운 화음이 이루어져서 모두들 얼굴이 아주 밝아졌다.


주의 크신 은혜는 정우가 연습을 리드했다.


정우가 여러번 숭실 OB의 각 부분을 들려주느라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주제라인을 함께 불러본 후에 각자 어떻게 변형시키면 좋겠는지 의견을 들었고 모두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아낌없이 노력했다.

가끔 한 번만에는 안 되는 부분들이 있어서 그 부분을 다시 현서에게 가서 피아노로 확정을 받아야 했는데 아무리 여러 번 부탁을 해도 현서는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다시 피아노를 치곤 해 주었다.

처음에 인수는 정인이 대신 현서가 피아노를 치는 게 좀 어색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서에게 아무리 부탁을 여러 번 해도 현서가 항상 웃으며 즐겁게 건반을 눌러주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인수가 현서의 광팬처럼 되어 바로 옆에 달싹 붙어서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습이 아쉽게 끝날 무렵 진영이 전체가 함께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불러 보자고 해서 전체를 한번 다 같이 불러보았다.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거의 다 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는 이 노래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비가 내리네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변주가 강했고 어려운 노래였지만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마음이 어느새 하나가 되는 그런 느낌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기가 잠깐 말을 했다.

“저기 우리가 지난주에 자유, 광웅이가 들어와서 8명이 됐고 오늘 현서가 이렇게 시간 내줘서 반주를 해 줬는데, 현서만 괜찮다면 계속 우리 반주자로 와주면 어떨까?”

이 말에 진영이는 순간 인수 쪽을 바라보았다.

현서는 약간 머뭇거리며 그냥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인수가 용기를 내어 아주 멋진 목소리로 디제이처럼 천천히 말을 이어 주었다.


“내가 오늘

현서라는 아가씨와

처음으로

연습을 해봤는데,

솔직히

너무 좋았어.

사실 중3이면

연합고사도 있고

바쁘잖아.

현서가 정말 정말 힘들겠지만

만약에 만약에

우리를 위해 반주를 해 줄 수만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을 흐리며 현서를 바라봤다.

그제야 현서는 웃으며 일어나 답을 주었다.

“네, 물론 제가 바쁘죠. 바빠요. 음…

하지만 이렇게 멋진 오빠들이랑 피아노를 치면서 오빠들 노래를 들어 보니까 왠지 이건 남 주기 싫은 거 있죠. 저 다음 주에 또 와도 돼요?”

그러자 모두들 고함과 환호성을 지르며, 격하게 현서가 반주자가 된 것을 기쁘게 환영했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빵과 우유를 사서 기쁨의 환영파티를 열었다.


그날 우리는 비록 약소했지만 생애 최고의 파티를 열었다.

목요일 연재
이전 06화주의 크신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