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선생님

인수가 공부를 하게 된 계기

by 보스턴임박사

중학생 인수의 성적은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매일 신문 배달하고 우유 배달하며 집에 들어가면, 온통 돈을 어떻게 벌지만 궁리하는 인수에게 학교 공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의무교육이니까. 의무감으로.

그게 전부이지.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학교를 때려치우고, 어딘가 그를 받아주는 곳만 있다면, 그곳에 뛰쳐나가 빨리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었다.


소년 노동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역사선생님으로부터 들은 그 얘기는 인수에게 매우 흥미로웠다.

산업혁명 시기인 17, 18세기에는 유럽에서 소년 노둥이 횡행했었다고 한다. 10대는 물론이고 10대 이하의 아이들도 공장에 나가 12시간에서 15시간의 노동을 쉬는 날 없이 했다는 것이었다.


인수에게 있어서 17, 18세기 유럽은 꿈의 나라였다.

'내가 그때 유럽에 태어나 소년 노동자로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가 사는 서울에 소년 노동자를 받아주는 그런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수의 중1 담임선생님은 젊고 아름다운 여선생님이셨는데 국어선생님이었다.

인수는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게 학교에 가는 유일한 낙이 되었다. 어쩌면 중학교 3년 내내 그 국어선생님만 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한 중학생활이 될 것 같았다.

인수의 눈은 항상 담임선생님을 향했고,

선생님의 모든 게 좋았다.


선생님의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목소리였다.

보통 예쁘장한 사람들은 목소리도 청아하기 나름인데 선생님은 좀 다르셨다. 목소리가 좀 탁하고 허스키해서, 외모와 잘 매치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종료시간 즈음이 될 때면, 선생님의 목소리는 갈라져 더욱 허스키하게 들렸다. 그럴 때면 선생님이 목소리를 항상 킁킁 대시며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좋게 하려고 애쓰셨는데, 인수에게는 그 킁킁대시는 모습마저 너무나 좋아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인수에게는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안 좋다고 느끼면, 킁킁대는 습관이 생겼다.


한 번은 인수가 교무실에 갈 일이 있었다.

마침 담임선생님께서 남자 선생님과 얘기를 하고 계셨는데, 인수는 담임선생님이 너무 반가워서 다가가 아주 정중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그러면 선생님이 평소처럼 웃어주시겠지. 그렇게 상상을 하고 머리를 들었는데.


선생님의 얼굴은 왠지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화를 내셨다.

그리곤 귀찮다는 듯이 인수를 막 대하셨다.

그날 이후, 인수는 담임선생님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여자선생님이 싫었다.

그리고 빨리 1학년이 마치기만 기다렸다.


2학년이 되고 또 여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다는 걸 알고 인수는 좌절하고 말았다.

인수는 사실 남자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좋겠다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좀 달랐던 점은...

1학년때에는 처녀선생님이었는데, 2학년때는 유부녀선생님이셨고,

1학년때에는 국어선생님이었는데, 2학년때는 과학선생님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

1학년 선생님은 날씬하고 아름다우셨던 반면, 2학년 선생님은 그냥 볼품없었다.

그냥 길에서 마주쳤으면 지나쳤으리라.


매학년 초가 되면 편지 쓰는 날이 있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날이었는데, 주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쓰는 거다. 그런데 인수는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는 너무나 바쁘셨기 때문에, 부담드리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인수의 편지를 읽을 시간이 없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수는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1학년때에도 당연히 어여쁘신 국어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모든 미사여구를 사전을 찾아가며 총동원해서... 그런데 뭐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다.

당연히.

2학년 초, 똑같은 시간이 돌아왔을 때, 인수는 1학년 때 썼던 것과 똑같은 내용,

그대로 2학년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무심코 쓰던 한 줄과 함께.


그리고 인수는 그 편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쉬는 시간에 왁자지껄 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인수의 목을 끌어안았다. 인수는 깜짝 놀라 어떤 놈인지 보려고 뒤를 확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 뒤에는 담임선생님이 웃고 계셨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리둥절한 인수를 향해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인수야 선생님 편지 잘 받았어. 선생님에게 편지 써줘서 너무 고마워. 인수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고 한 것. 선생님 꼭 기억할게. 그리고 기대하고 있을게"

이러시곤 웃는 모습으로 뒤돌아 나가셨다.

그게 다였다.

문제는 그날 이후부터였다.


인수는 본래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돈 벌거니까.

항상 쓰던 대로 엄마에게 쓸 수 없어서,

만만한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썼고, 선생님이니까 공부 열심히 한다고 썼을 뿐인데,

이걸 선생님이 진심 다큐로 받으신 것이다.


"기. 대. 하. 고. 있. 을. 게, "

인수는 그날 이후 공부란 걸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었다. 인수는 그날 집에 오자마자 상고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는 누나를 기다렸다가 누나에게 공부하는 법을 물었다. 누나는 가정형편 때문에 상고를 나왔을 뿐, 원래 공부를 좋아하고 잘했었다. 누나는 특히 시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기만 했어도, 누나는 명문대에 충분히 가서 훌륭한 시인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누나는 인수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도 처음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인수가 진심으로 공부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나서는 정말로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책을 외워!"

'간단하네~~'

인수는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책을 외우기 위해 애썼다.

인수는 중1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니 기초가 있을 리 만무했다.

중간고사가 1달여 남짓 남아 있었다.


인수는 책을 그냥 외웠다.

다행히 비어있는 머릿속을 채우는 암기는 인수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간고사 날이 다가오자, 인수는 너무 애가 타고 초조해져서 공부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이런 인수의 모습을 보시곤 깜짝 놀라시며 의아해하셨다.


'인수가 달라졌다.'

첫 중간고사 시험을 마치고 인수는 처음으로 쉴 시간이 얻어졌다.

그리고 또 까맣게 잊고 친구들과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서 담임선생님의 종례가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상기된 모습으로 들어오셨고 마구 뛰놀던 아이들도 허겁지겁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직 자리가 정돈되기 전인데도 갑자기 담임선생님께서 흥분된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얘들아, 이번에 중간고사 성적이 나왔는데 우리 반에서 가장 시험을 잘 본 건 바로 오인수야."

"오인수가 성적이 제일 올랐어. 1학년 마지막 성적이 44등이었는데 이번 2학년 첫 시험에서 9등이 되었어. 9등이야. 35등이 올랐어. 다들 인수에게 축하의 의미로 손뼉 쳐 주자"

그러자 다들 '와아!!'하고 박수를 치며 왁자지껄 웃고 떠들고, 어떤 녀석은 브이를 그려 보였다.

인수는 처음에 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하고 제자리에 앉았다.


그날 담임선생님은 자리배치를 갑자기 바꾸셨다.

보통은 키순서대로

키가 작은 학생이 앞으로,

키가 큰 학생이 맨 뒷자리에 앉는데,

담임선생님은 다르셨다.

성적순으로 재배치하셨다. 1등과 60등이 짝이 되었고 2등과 59등이 짝이 되도록 앉히셨다


9등 인수도 새로운 짝과 앉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51등 택집이었다.

택집이는 키가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은, 누가 봐도 멋진 친구였다.

그는 인수가 보기에 다른 친구들과 좀 달랐다. 키 큰 택집이는 항상 교실 맨 뒷줄에 앉아서 친구들과 실없는 농담을 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통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택집이 에게는 항상 돈이 두둑이 있었다. 그 사실이 인수의 눈에 들어왔다.

키 크고 멋진 택집이 주위엔 항상 그를 따르는 아이들이 있었다. 폭력을 쓰진 않았지만, 택집이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미는 녀석들도 없었다. 깡패처럼 몰려다니는 중학교 선배들도 택집이 한 테는 무슨 이유인지 건드리지 않았다. 인수는 택집이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담임선생님이 이렇게 자리 배치를 하신 이유는 서로에게 공부로 도움을 주기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공부 잘하는 우등생처럼 되어버린 인수는 택집이에게 슬며시 비밀을 말해주었다.

"택집아, 책을 그냥 외워!"

그날 이후로 인수와 택집이는 책을 서로 외우고 문제를 맞히는 연습을 하며 놀았다.

인수와 친하게 된 택집이가 자기 속얘기를 했다.


택집이는 밤마다 유흥업소에서 일한다고 했다.

키가 큰 택집이는 나이를 속이고 옷을 갈아입고 가발을 쓰고 웨이터로 일한다고 했다. 알고 보니 택집이도 집이 가난한 모양이었다.

인수도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택집이에게 어디에서 일하는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하는지, 얼마 정도 받는지 등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렇게 해서 인수도 유흥업소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키가 크지 않은 인수는 홀에서 손님을 받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음향담당으로 일할 수 있었다. 음향담당을 하다가 감전사고로 인수는 죽을뻔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인수는 살아났고,

대신 그 업소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설 인수는 아니었다.

인수는 다른 곳에서 일할 곳이 없는지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종로 음악다방에서 음향담당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돈벌이는 유흥업소에 비해 시원치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필요한 돈으로 책도 사고, 일부 쓰고도 남아서, 어머니 호주머니에 얼마씩 넣어드릴 정도는 되어서, 꽤 만족하고 다녔다. 이러는 사이, 인수는 공부를 점점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인수의 등을 강하게 스매싱하는 것이었다.

그 손이 매우 맵고 쓰렸다.


'담임선생님이셨다.'

담임선생님은 왠지 모를 슬픈 눈, 분노에 찬 얼굴로 상기된 채, 인수에게 말씀하셨다.

"인수야, 선생님은 인수에게 실망이야."

"네 성적이 20등으로 떨어졌어."

"9등이었던 게 20등으로 11등이나 떨어졌어."

"왜 노력하지 않니?"

그리곤 분이 식지 않으셨는지 인수가 죄송하다고 연신 꾸벅이며 빌었지만 보지도 않으시고 그 자리를 떠나셨다.


'왜 노력하지 않니?'

담임선생님께 혼나면서도 인수는 뭐를 잘못했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20등도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44등 하던 내가 아닌가? 여전히 24등 위인데?'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다르셨다.


인수의 가능성을 훨씬 높게 보시고 계신 것이다!

인수는 그 후로 공부와 음악다방일을 모두 열심히 하는 주경야독이 아닌 주독야독, 주경야경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성적은 다시 서서히 올라갔고 돈벌이도 서서히 올라갔다.

그러나 10등 안으로 성적은 결코 다시 오르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수입도 얼마 이상은 결코 오르지 않았다.

인수의 목소리가 좋다는 걸 알게 된 사장님은, 가끔씩 음악다방 디제이가 빌 때면, 인수를 그 자리에 앉히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인수는 고2로 올라갈 무렵, 정식 디제이가 될 수 있었다. 이제 돈을 벌면서 육성회비도 내고 책도 사고 고등학교까지는 어떻게든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이제 정말 취직할 수 있다.'

인수는 디제이 일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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