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서의 가장 길었던 밤
축제가 끝난 첫날은 집에 돌아가 잠자기 바빴다.
다음날 바로 또 돈을 벌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인이와 소은이가 오기로 해서 좀 제대로 옷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축제 이틀째
진영이는 나름대로 멋을 내려고 노력했지만 집에 그리 좋은 옷은 없어서 아버지 옷 중 좀 젊잖아 보이는 양복과 정장으로 입고 나왔는데 약간 사이즈가 맞지 않아서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정인이와 소은이가 온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어제 이미 둘째 날은 물풍선 사업에 옆에서 도움은 주겠지만 물풍선을 못 맞을 것 같다고 얘기해 놓았다.
축제 둘째 날은 첫째 날과 달리 너무나 물풍선 사업이 잘 되었다.
원래 3개 던지면 받던 금액을 2개 던지면 받는 것으로 요금을 인상했다. 그래도 물풍선이 둘째 날은 거의 끊어지지 않고 계속 진행되어 우리 5명과 더불어 10여 명의 화학과 1학년 남자애들이 더 동원되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처음에 진영이는 물풍선을 맞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후에 이르러서도 손님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끝이 없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런 추세라면 수익은 좋을지 모르지만 15명의 이상의 우리 남자애들이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될 것 같았다. 이미 대부분 녹초가 되어 있는 걸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진영이는 옷을 다시 갈아입고 자기도 물풍선을 맞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른 친구들이 좀 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진영이가 한참 물풍선을 맞고 손님들이 웃고 떠드는 와중에
정인이가 나타났다.
정인이는 이제까지 본모습 중에서 가장 화사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진영이는 처음에 그녀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미 하도 물풍선을 맞다 보니 사실 앞이 잘 안 보이는 중이었다. 그 옆에 있는 소은이는 레이스 있는 흰색 드레스로 축제의 여신처럼 화려하게 정인이 곁에 서 있어서 두 여신 주위로 남자들이 모여들었고 이 때문에 구경꾼들이 더 늘어났다.
아직 손님 줄이 긴 상태여서 진영이는 좀 더 맞기로 하고 계속 맞는 중이었는데 건장한 3,4명의 남학생이 여학생들과 함께 나타났다. 가만 보니 체대생이었다.
이 3, 4명은 마치 올림픽을 하듯이 진영이의 얼굴에 물풍선을 스매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풍선 맞기는 갑자기 싸대기 때리기처럼 되어 진영이의 얼굴은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10번째 물풍선은 진영이 오른쪽 눈을 정통으로 맞혔는데 진영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리게 되었고 이때 마침 11번째 물풍선이 진영이의 왼쪽 귀를 그대로 맞혀서 진영이는 순간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 반대로 얼굴을 돌리려는 찰나 이번에는 마지막 12번째 물풍선이 진영이의 코를 맞추었는데
진영이는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친구들이 깜짝 놀라 진영이에게 다가가 보니 진영이의 코에 코피가 흐르는 물과 함께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걸 지켜보던 정인이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진영이가 쓰러져 있는 쪽으로 급히 뛰어갔다.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맥을 못 추고 있던 진영이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정인이가 들고 있던 핸드백을 열어 티슈를 찾아 내밀며 진영이의 코를 막으며 말했다.
“진영아, 지금 코피 나. 이걸로 피를 닦아야 할 것 같아.”
그제야 진영이는 앞에 있는 여자가 진영이인걸 알았는데, 그 순간 자신의 처량한 모습이 더 초라하게 느껴져서 아픈 것보다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더 민망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영이는 급히 일어나서 다음에 물풍선을 맞을 친구에게 미안하다며 다음을 부탁하고 본인은 근처 학교건물의 화장실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와서 이번에는 자신이 오늘 입으려고 가져온 정장이 든 옷가방과 구두를 들고 다시 화장실로 황급히 돌아갔다.
코피가 멈추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고…
코피가 멈추자 진영이는 휴지를 가지고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거울로 본 자신의 얼굴은 이미 퉁퉁 부어 입술도 더 커져 보이고 오른쪽 눈이 충혈되었고 왼쪽 귀에서는 귓불에 멍이 든 모양이었다. 일단 젖은 옷을 천천히 벗고 수건으로 온몸을 닦고 몸을 조금 말리며 앉아 있었다. 화장실에 다른 학생들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진영이가 다시 정장으로 갈아입고 물풍선 쪽으로 돌아와 보니 여전히 장사는 성업 중이었고…
왠지 정인이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은이와 정인이를 찾아볼까 했으나 자신의 사업을 위해 물풍선을 맞으며 돕고 있는 수많은 친구들을 내버려 두고 자기 혼자 간다는 게 진영이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진영이는 친구들 곁에서 응원을 보내며 고맙다는 손시늉을 함과 동시에 긴 줄의 손님들 뒤로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으려고 연신 꾸벅거리며
“예, 예, 죄송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게임을 종료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일 또 오세요.”
하며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그날의 사업은 첫날보다 1시간 일찍 종료되었다.
진영이는 도와준 모든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무한 반복하며 사과하기 바빴다.
다른 동업자 4명도 진영이처럼 자신들의 사업을 위해 온몸 바쳐 희생해 준 모든 친구들과 곁에서 함께 해 준 많은 친구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얼굴 맞추는 곳, 너절하게 나 불어진 찢어진 물풍선 등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날의 사업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진영이는 4명의 동업자들과 잠시 상의를 하고 나서 그곳에 함께한 모든 친구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사실 이게 우리 5명이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게 될 줄은 몰랐어 너무 미안하고 도와줘서 고마워. 원래는 내일까지 하려고 했는데 오늘 이미 워낙 손님들이 많이 왔고 이대로 하루 더하면 다들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오늘로 이 사업을 종료하려고 해. 너무너무 고마워. 다들 수고했고 목요일 수업에서 보자.”
이렇게 해서 물풍선 사업은 끝이 났다.
진영이는 이 물풍선 사업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일은 해 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것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등등
진영이의 물풍선 사업 결과, 예상보다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진영이를 포함해 모든 친구들이 감기에 들거나 부상으로 며칠간 쉬어야 했다. 결국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진영이는 다시는 몸을 이용하는 사업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진영이가 친구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집으로 가려고 돌아서는데 그 앞에 정인이가 행운의 여신처럼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사실 진영이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사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정인이는 여태 기다린 것이었다.
정인이는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영이를 잘 아는 정인이는 진영이가 자신들로 인해 다른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멀리서 모든 진행 상황을 지켜보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진영이가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청소를 마친 후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소은이가 갑자기 정인이에게 먼저 갈 일이 생겼다면서 혼자 떠나 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정인이만 진영이 앞에 이렇게 온 것이다.
정인이를 보자 진영이는 반갑기보다는 민망했다.
정인이가 집에 간 게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는 중이었다. 사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미안하다 정인아, 이런 모습 보여서. 오늘 이 먼 곳까지 일부러 와 줬는데 내가 너무 오버했나 봐.”
“아니야, 난 재미있었어. 잘하더라 프로페셔널하게. 아주 너무 멋졌어. 역시 나의 진영이야.”
‘나의 진영이’라는 정인이의 말이 진영이는 싫지 않았다.
그날 저녁 진영이와 정인이는 캠퍼스 곳곳을 이리저리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 모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서로 말을 아꼈다. 다만,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 순간만이 두 사람에게 매우 소중하게 느껴졌다. 진영이는 정인이에게 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정인이는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정인이는 진영이가 말을 할 때마다 코를 시큰 거리는 걸 보았고 입술이 꽤 부어오른 것을 알았다. 캠퍼스의 밤은 그렇게 어두워져 갔고 어느덧 둘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진영이가 정인이를 버스 정류장 앞에서 배웅할 때, 정인이는 부어있는 진영이 얼굴을 보며 가만히 안아 주었다. 그리고는 뒤돌아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버스 차창밖으로 손을 휘적거리는 진영이가 뒤로 서서히 작아져 갔다.
진영이는 그날 아주 늦게 아파트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 내려 현관문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지만, 모든 불은 꺼져 있었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혹시 아파트 열쇠가 경비실에 맡겨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진영이는 다시 1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경비실 앞에 서서 1007호 아파트 열쇠가 맡겨져 있는지 여쭈었다.
경비실 아저씨는 진영이를 위아래로 한참을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저쪽 지하로 한번 가봐요.”
경비 아저씨가 가리키는 곳은 진영이가 사는 동안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인데 좁은 계단을 아래로 내려가야 했고 계단은 컴컴한데 불이 없었다.
다행히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뭔가 안에서 희미한 불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천천히 지하실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진영이네 아파트의 모든 가구와 집기가 여기저기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그때 멀리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영이 왔구나. 여기 침대로 와라 불 끄고 자자.”
진영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거기엔 안방에 있던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아버지, 어머니, 영은이, 진우가 순서대로 나란히 누워있었다. 진영이가 다가오자 진우가 곁에 자리를 내어 주었고 진영이는 그 옆에 슬그머니 누웠다.
진영이가 눕자 갑자기 불이 꺼졌고, 그렇게 모두 잠을 자는지 안 자는지 모르는 그 긴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