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바이러스 터졌는데, 한의대 원서 넣음
임 박사의 외할아버지는 충청남도 논산에서 평생 한약방을 하신 분이셨는데, 약초를 손수 찾아다니실 정도로 열정이 있으셨고, 한약의 품질을 중히 여기셔서 한약을 정성껏 달여야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고 한다. 임 박사는 어렸을 때, 몸이 약골이어서 잔병치레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외할아버지께서 정성껏 한약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 어린 임 박사에게는 냄새가 퀴퀴하고 매우 써서 먹기 싫었지만 사탕과 함께 먹을 수 있어서, 사탕을 먹고 싶은 욕심에 코를 막고 한약을 먹었다고 한다. 한약 덕분인지 임 박사는 자라면서 오히려 몸이 점점 강골이 되어갔다고 한다. 이 모든 게 신비한 약초의 힘이라고 임 박사는 굳게 믿었다고.
외할아버지는 한약방으로 돈을 많이 버신 분이셨고 그 지역의 유지셨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어려운 사람을 아끼는 명의셨는데,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지어 주셨을 뿐 아니라, 돈이나 쌀을 보내 주시기도 하시는 훌륭한 분이셨다고 한다.
글쎄, 그 아버지의 성공
‘거기에 가족은 포함이 될까?’
임 박사는 항상 그런 의문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본래 사업을 하기 전, 회사원 아버지는 정말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그런 아버지였다고 한다. 임 박사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될 즈음, 아버지는 그동안 모은 돈과 대출금을 합해서 강남 8 학군의 선릉역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아파트는 단 세동밖에 없는 작은 단지 안에 있었지만, 바로 앞에 여자고등학교가 있고 주위에 강북의 명문고등학교들이 속속 강남으로 이전 중이었기 때문에, 임 박사와 동생들을 위해 이 아파트를 구입하신 것이었단다.
그러다가 임 박사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는 어떤 여자 경리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 사업은 커져서 직원도 꽤 있었고, 아버지를 수행하는 운전기사도 따로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임 박사를 가끔씩 자기 회사로 데려가서 회사에 대한 걸 보여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도 중학교 때까지는 나름 괜찮았단다. 아버지는 가족 여행을 다니기 좋아하셨고, 임 박사는 아버지의 사업이 잘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상황이 안 좋게 변하기 시작한 건, 임 박사가 중3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매우 가정적이었던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더니, 사업 때문이라며 술에 취해 집에 늦게 들어오시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 번쩍거리는 골프 클럽을 가지고 오셨는데, 임 박사는 그 골프채가 너무나 싫었다고 한다.
당시 부의 상징처럼 보이던 골프채였지만,
임 박사에게 있어서,
그 골프채는 아버지가 이제 완전히 변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상징과도 같았다고 한다.
임 박사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아버지는 출장이 잦아졌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혹시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항상 술에 만취된 상태였고, 집기를 던지거나 집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엔 던지더니 그다음엔 골프채로 휘둘렀고, 언제부턴가 어머니를 때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임 박사는 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기를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진심으로.
‘그런 아버지 필요 없어요. 아멘’
교회에서 기도해 봤자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오로지 고등학생인 임 박사 자신이 빨리 졸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다가 이상하게 이런 생각도 들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기는 한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임 박사를 평소처럼 회사에 데려가던 아버지가 어느 날부턴 임 박사를 업체로부터 수금하는데 동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수금을 하는 게 돈을 받는 게 아니라, 그 사장이라는 사람 작자의 집 앞에서 차에 앉아 소위 뻗치기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돈을 못 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런 뻗치기를 해도 그 사장이라는 사람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난 절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회사를 만들거나 하지는 말아야지.’
임 박사는 이때부터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훗날 에이즈(AIDS)라고 불리게 되는 병이었다.
당시엔 이름도 없어서 그냥 “이상한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사실 이 병은 이미 미국에서 먼저 터지고 있었다.
1981년, 미국 CDC는 “건강하던 남성 동성애자 5명이 정체불명의 폐렴에 걸렸다”라고 발표했다.
고열, 기침, 호흡곤란, 심한 흉통.
그중 2명은 이미 사망했다.
병명은 PCP 폐렴, 면역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에게만 생기는 병이었다.
한 달 뒤엔 환자가 26명으로 늘어났고, 희귀 피부암인 카포시 육종까지 동반됐다.
이 기사를 유심히 읽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병이 면역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는 신종 감염병이라고 직감했다.
문제는 답이 없었다는 거다.
치료제도 없고, 백신도 없었다.
파우치는 훗날 이 시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치질에 반창고 붙이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방송에 나와 솔직하게 말했다.
“이 병이 뭔지 정확히 모른다. 몸 안에서 어떻게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치료제가 나올 수 있을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지금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엔 굉장히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
항상 의연하던 어머니는 큰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중풍으로 쓰러진 외할아버지의 병간호에도 힘들었는데,
부도를 맞은 것이다.
아파트가 저당 잡혀 넘어갔다고 한다. 다섯 식구의 보금자리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모의 아파트 두 채도 저당 잡혔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외도가 드러났다고 한다.
자백했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상대가 바로 그 회사 경리였다고 한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더란다.
부도가 난 날에도,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임 박사 아버지는 집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형사처벌 대상자, 경제사범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참 대단한 아버지다 싶었단다.
그동안은 약과야.
더 큰 게 있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고난이...
임 박사 가족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미래는 없더란다.
진짜 고난은 지금부터야...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임 박사는 한의대를 진학하고자 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처럼 한의사가 되어서 약초로 환자를 고치는 명의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6년만 공부하면 곧바로 개업할 수 있는 한의대가 가장 시간도 절약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당시 한의대는 전국에 고작 5개뿐이었고, 서울에는 K대뿐이었는데 K 대는 임 박사 점수로 합격여부를 100% 확신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부도가 난 가정형편에 전액장학금이 필요했던 임 박사는 안전하게 합격할 수 있는 전라도에 있는 W 한의대에 지원하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W한의대 원서를 구하러 종로에 있는 큰 서점 두 군데를 다 돌아다녀도 W대학 원서를 구할 수 없었단다. 원서를 구할 수 있는 기간이 단 하루밖에 없었는데, W대학 원서는 큰 서점을 몇 번씩 방문해도 전혀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 4천 장이나 되는 원서가 있었다는데, 무슨 까닭인지 나오기 무섭게 나갔다는 것이었다.
임 박사는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며 종로 거리에 그냥 서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K대 한의대를 지원하자.
만약 합격하면 다니고 안되면 그냥 포기하고 취업하기로 하자.
어머니 기도의 힘을 믿어보자’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임 박사는 K대로 가는 버스를 찾기 시작했단다. 버스를 찾자마자 바로 잡아탔단다. 이미 오후가 늦은 시간이었는데, 처음 가보는 K 대는 북쪽 외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청량리에 가서 버스를 내린 후, 다시 K대 지하철역까지 지하철로 갈아타고 갔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천천히 가는 지하철은 처음 타보았다고 한다. K대학과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렸을 때는 이미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급하게 마을버스를 잡아타고 만원 버스 안에서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며, 버스가 큰 사거리를 지나서 우측으로 돌아서 한참을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길가로 걸어가더란다. 임 박사가 보기에 걷는 게 더 빨라 보였단다. 그러다가 마침내 버스종점에 내렸는데, 그 버스종점이 바로 K대학 정문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냅다 뛰었다고 한다. 서류를 받을 수 있는 마감시간인 5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가까스로 원서창구에 도착했고, 정말 천신만고 끝에 K대학 원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단다.
임 박사가 W 한의대 원서가 아닌 K대 원서를 가지고 나타나자,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이미 다 흘러갔고, 당장 다음날 담임선생님과 원서를 작성해 이틀 후 지원을 서둘러야 했다고 한다. 시간이 부족했다. 임 박사 아버지는 한참 후 이렇게 말했단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일단 K대 한의대를 1 지망으로 하고
2 지망은 대신 안전하게 화학과를 지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