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버린 연구

성적 만렙, 배정은 학벌컷

by 보스턴임박사

4학년 추석


실력이 좋았던 건지 동기들이 도와준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임 박사는 결국 마지막까지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천만다행이었다고. 4학년 추석 때 부모님께 이번에는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도서관으로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4학년 추석은 K대학 도서관 앞에서 조촐하게 치렀다고 한다. 아버지는 임 박사가 전액장학금을 받은 것과 KAIST에 들어가는 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고, 임 박사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안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건강 해치지는 마라.”

홍수재 형으로부터 배운 ‘자만하지 말라’는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임 박사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추석을 지나 시험날인 11월이 다가오자, 스트레스받지 않는 임 박사도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조함을 극복하기 위해, 임 박사는 더욱 공부에 박차를 가했으며, 천 페이지가 넘는 책 5권으로 이루어진 전 과목을 시험이 1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매주마다 한 번씩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에이즈(AIDS) 감염자 수는 줄어들 기미 없이 계속 늘어났다.

한국언론은 연일 ‘에이즈 확산’에 대한 공포를 키우는 보도를 쏟아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 방문이 늘어나자 “외국인 때문에 에이즈가 퍼지는 거 아니냐”는 불안감이 사회 전반에 퍼졌다.

이에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와 입국자를 대상으로 검역을 강화하고, 혈액검사와 헌혈 규제를 엄격히 하는 등 강경한 대응에 나섰다. 에이즈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국가 보건 안보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성매매 여성이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더 심해졌다는 점이다. 동시에 외국과 외국인에 대해 ‘비도덕적이고 위험하다’는 이미지가 고착되며 사회적 편견도 함께 커져갔다.

한편 미국에서는 1987년 지도부딘(AZT)이 최초의 에이즈 치료제로 승인됐지만, 부작용과 독성이 너무 강해 한계가 분명했다.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신약 개발에 대한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91년에는 NBA 스타 매직 존슨이 에이즈 감염 사실을 공개하면서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고, 이후 유명 인사들의 감염 소식이 이어지며 에이즈에 대한 공포는 더욱 확산됐다.

같은 시기, RNA 바이러스인 C형 간염도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언론의 관심은 크지 않았지만, 의료계에서는 간경화와 간암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 인터페론이 C형 간염 치료제로 승인되며 본격적인 대응이 시작됐다.


임 박사는 KAIST에 드디어 입학했다.


KAIST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정말 운이 좋다. 대전에 있는 과기대와 통합한다고 대전에 이전한다고 해서 들어간 거야. 경쟁률이 떨어져서…ㅎㅎㅎ”

임 박사는 할 말이 없더란다.

'과기대는 바보인가?'

과학 천재들이라는 과기대와 통합하는 시험은 정말 달랐다고 한다.

이전까지 시험 유형과 전혀 달랐다고 한다.

과기대 교수들이 시험 문제의 절반을 출제한 것이다. 아주 어려웠다고.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성적이 좋았단다.

10등 안에 들었다고 한다.

면접 때 제대로 물어본 것 하나는 이거뿐이었다고 한다.


“자네가 K대 1등인가?”

“아니요, 2등입니다.”

“1등은 어디에 갔나?”

“약대 편입하겠다고 합니다. 잘 모릅니다.”

임 박사는 일부러 2등이라고 했다고 한다.

왠지 모를 쾌감이 있었다고.


대학 서열


화학과 입학생은 36명이었다고 한다. 36명 중 당당히 10등 안에 든 임 박사는 처음엔 어느 연구실을 어디로 갈지 알아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단다.

연구실을 골라갈 처지가 아니라,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KAIST에서는 교수님들이 성적순으로 결정하지 않고, 대학서열로 결정하는 거였단다.

중위권 대학 K대학을 나온 임 박사는 좋은 성적을 얻고도, 과기대를 포함한 상위권 대학 졸업 동기들이 어느 연구실에 가는지 기다렸다가, 남는 연구실에 가야 했다고 한다.

마음 아팠지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유기화학 연구실에는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건 천만다행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선호도가 낮은 이유가 있었지 않겠는가?'

3명이 그 유기화학 연구실에 배정되었는데, 거기에서도 임 박사는 또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원하는 프로젝트를 배정받을 수 없었고, 성적이 자기보다 낮은 상위권 대학 출신의 프로젝트 결정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남들이 버린 연구


이렇게 해서 받은 게 ‘천연물 분리정제’라는 것이라고.

모두들 꺼려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머리를 쓸 일이 전혀 없는 막일였다고.

남들이 버린 연구였다고 한다.

매일 아침이면, 액체 크로마토그래피에 약초 원액을 넣은 후 가능한 한 순수하게 각각의 성분을 분리했다고 한다. 그 성분 각자를 각각 플라스크에 모은 후, 각각의 플라스크를 증류해서 각 물질을 마지막에 건조한 다음, 분석을 해서 구조를 예측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 일을 하게 된 임 박사는 매우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Y대에서 수석졸업했다는 여자선배가 이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선배도 이 프로젝트를 정말 하기 싫어했다고 한다. 선배와 같은 연구실에 온 동기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더 좋은 프로젝트를 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KAIST 졸업 후 이 여자선배는 결국 변리사 시험을 치고 변리사가 되었다. 그만큼 하기 싫어하는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하지만 임 박사는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일을 할 때, 한약방에서 약초를 친히 캐시고 환자를 치료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생각났다고 한다.

한의대를 지원했던 임 박사에게 약초에 있는 천연물을 분리하는 일은 왠지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일을 통해 환자를 고칠 수도 있다.'

임 박사는 항상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침에 항상 가장 먼저 실험실에 나와서 기도를 하고 청소를 하며 선배들과 친구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열심히 노력하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다행히 여자선배가 분리한 물질 중, 새로운 약물이 나와서 분석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물질의 구조가 좀 특이해 보였다고. 분자량과 물질의 NMR 구조를 수차례 분석한 결과, 이 물질은 두 개의 단당류가 뉴클레오사이드에 붙어있는 신물질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뉴클레오사이드는 유전 정보 전달 물질이었다.

즉, 생명전달물질이었던 것이다.


대전으로 오니 임 박사에게 정말 좋은 게 딱 하나 있었다.


대전에 이태성 형이 계셨다고 한다. 조기박사로 25살에 유기화학박사가 된 이태성 형은 화학연구소 신약연구실 선임연구원으로 계셨다고 한다. 역시, 2학년 형의 말이 사실이었다고. 유기화학을 하면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일을 한다는 게….

대전에 간지 얼마 후, 바로 이태성 형을 만나서, KAIST에서의 고충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때, 이태성 형이 정말 가르침을 주셨다고 한다. 이 가르침이 임 박사에게 평생의 모토가 되었다고.


“네가 KAIST에서 가장 못하다고 생각하고, 절대 나대지 말아라.”


이 말씀을 들으며, 임 박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이태성 형이 성공하신 이유를 배웠기 때문이었다고.

유기화학 연구실에 들어가 천연물 분리 프로젝트를 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임 박사의 성실함과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결과를 내는 걸 보신 지도교수님은

임 박사의 프로젝트를 천연물 분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로 바꾸어 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도 하지 않는 화학 프로젝트이긴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전 03화대학 졸업이라는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