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5년 만에 다시 만난 보스턴임 박사

by 보스턴임박사

임 박사를 처음 만났던 5년 전


대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를 가게 되어 배우고 싶은 열망이 많았던 나는 교회 대학부에 들어가자마자 1년도 안되어 졸업하게 된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이 새로운 종교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나를 교회로 전도한 언니가 말했던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너무나 궁금했다.

그러던 중, 대학부 졸업생 몇 명이 모여서 공부를 하는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 모임은 주로 선교사를 가고자 하거나 후원하고 싶은 사람들 10여 명이 모이는 아주 작은 모임이었는데 주로 다른 나라의 상황들, 선교사들의 방문과 체험 듣기, 성경공부와 기도회 등을 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여기에 나와 같은 학년이 많이 들어가서 나도 그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모임에도 임 박사가 있었다.

그때, 임 박사는 전에 KAIST에 방문했을 때 보았던 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여전히 뭔가에 쫓기듯이 살고 있었고 전혀 여유란 게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지도 몰랐다. 내가 본 그의 인상은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교회 오빠, 그 정도였다.

그도 나처럼 뭔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대학교 때에는 교회에 잘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KAIST에 들어간 이후부터 좀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비로소 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니, 나나 임 박사나 수준이 도찐개찐인 것처럼 느껴졌다.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내가 대학교 때 교직을 이수한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교사는 나의 비전이자 삶의 이유였다. 교직을 이수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서율에서는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경기도 여주라는 곳에 있는 어떤 여고에서 임시 교사자리가 났다는 공고를 보게 되어 그 자리에 지원하여 합격이 되었다.

여주 여고로 출근을 하게 된 나는 이곳에서 정규직이 되려면 좀 더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고, 하숙을 얻은 후 여주에 있는 어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자연히 임 박사와 함께 모이던 모임에는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년 여가 지나서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이번에는 강남 대치동에 있는 여고에서 계약직 단기 교사를 할 자리를 얻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울로 다시 올라오니 교회도 옮겨야 했다. 그런데, 본래 다니던 교회를 가는 것보다 좀 더 배울 수 있는 교회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주위에 아는 분의 소개를 받았는데 그 교회는 반포에 있는 교회였고 상가건물을 빌려서 세 들어 사는 교회였지만 무엇보다도 미혼청년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대단한 교회였다. 청년들을 위한 목사님이 따로 있었고 매주 새로운 걸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이 교회가 마음에 들었다.

반포에 있어서인지 이 교회에는 명문대학 출신들이 아주 많았다. 나처럼 배우고자 교회를 찾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교회에는 남녀비율이 너무나 차이가 크게 났다. 여자수가 남자수보다 훨씬 많았고 개중에 괜찮다고 하는 남자들은 수많은 여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좋은 학벌과 배경을 가졌다고 알려진 남자들에게 여자들은 선후배 할 것 없이 관심이 대단했고 그런 남자들은 교회에서 거의 셀럽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난 좀 생각이 달랐다.


나도 물론 그 남자들, 오빠들이나 동기들, 과 여러 번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집안과 학벌이 좋은 남자들은 대부분은 야망과 야심이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망이라고 포장해 말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그냥 개인적 야망으로 보였다.

괜찮은 오빠가 나에게 관심을 보인 적도 있었고 다른 여자 동기들과 언니들을 통해서 그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들은 적도 있었다.

그는 S대 법대출신이었고 사법고시 1차를 합격한 남자였다.

그는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야망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야망이 많은 사람을 난 교회를 다니기 전부터 익히 보아왔다.

그리고 그게 교회로 오게 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성공이나 야망이 아닌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가?'

나는 그에게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


전문인 선교훈련원


대신 반포 교회에서 배우면서 나는 점점 어려운 나라와 부족을 돕는 선교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는 선교사를 많이 후원할 뿐만 아니라 선교사를 보내는 그런 교회여서 훈련하는 단체들과도 연관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전문인선교훈련원이라는 곳이었다.

같은 교회에서 아는 언니가 이곳에서 훈련을 받는다고 얘기를 했다. 난 그 언니가 참 좋은 언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언니와 함께 같은 기수로 전문인선교훈련원에 들어갔다.

바로 그 전문인선교훈련원에 처음 간 날,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낯익은 사람이 하나 앉아있는데, 처음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깡마른 체구와 긴 상체가 좀 익숙해 보여서 그를 좀 더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가 잠깐 얼굴을 들었다 다시 숙이는 찰나, 난 그를 알아보았다.


임 박사였다!


나는 그를 알아보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러자, 그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내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

"오빠!!”

그는 나를 발견하고 마치 귀신을 본 듯 어안이 벙벙해하며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오랜만이야 오빠! 어떻게 지냈어? 오빠도 여기 들어왔어?”

“으-응. 나-안 신입생은 아니고 재수생이야. 1년 만에 졸업을 못해서 한 학기 더 다니게 됐어”

선교훈련원을 재수한다는 말에 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웃자, 그도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5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1987년 물질특허 도입


한국에 물질특허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87년이었다.

임 박사가 대학 2학년이던 1987년은 한국에서

(1) 직접민주주의가 시작되고

(2) 물질특허제도가 시작된

원년으로 여겨진다.


그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생산과 관련한 공정특허만 인정할 뿐, 신물질과 관련한 물질특허는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이 개발도상국으로서 급속히 경제성장을 이루려면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이 시급했는데, 물질특허제도가 이런 기술이전 과정에서 기술이전 비용을 유발할 수 있고 기술적으로 열세인 국내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은 고학력 양질의 값싼 노동력이 국제 경쟁력의 유일한 자산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들이 물질특허 도입을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1985년 한미 통상장관회의에서 물질특허 도입을 포함한 협상을 진행하여 1년여간의 밀고 당기는 지난한 협상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1986년 7월 물질특허제도를 도입하기로 일괄 타결하게 된다.

물질특허제도 도입 초기에 국내에서는 국내 기술 수준이 낮아 선진 기술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으로 볼 때 국내 제약 산업의 R&D 투자를 유도하고 기술 향상을 촉진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

1986년 12월 특허법 개정을 통해 물질특허 제도가 마련되었고, 1987년 7월 1일부터 의약품 등 화학물질에 물질특허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임 박사가 S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1992년은 물질특허가 도입된 지 고작 5년이 채 안된 시기였고, 여전히 혁신적인 신기술의 개발은 막연한 꿈이었다. 제약회사는 자본이 부족하여 해외에서 개발된 약품을 도입하여 국내에 팔기에 여념이 없었고 오로지 대기업 몇 군데 만이 그나마 글로벌기업이 개발 중이거나 승인된 약물의 개량 약물을 개발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1990년대 후반, 럭키 (지금의 LG화학)의 항생제 팩티브가 GSK에 기술수출이 되었고, 임 박사가 일하는 S사가 국내최초의 국산신약을 개발 중에 있었다. 이들 뉴스는 신문과 방송에서 대서특필되었는데, 임상시험 뉴스가 나갈 때면 환자들 가족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치는 통에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것을 개발한 주역들은 미국이나 KAIST에서 박사학위나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대기업에도 박사학위자는 매우 희귀했다.

이 과정에서 LG와 S사는 국내 신약개발의 모든 제도와 시스템을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제 막 신약개발의 기본적 토대를 만드는 역사적 과정 중에 임 박사가 S사에 입사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첫 데이트


9월에 훈련원에 입학하고 10월에 접어들었을 때 휴일이 되어서 한주를 휴강하게 되었다.

난 휴강하는 날 무얼 하면 좋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임 박사가 다가와 내게 물었다.

“이번 휴일에 무슨 약속 있니?”

“아니 약속은 없는데 뭘 할까 생각 중이야. 오빠는?”

“그래? 그럼 우리 같이 영화 보지 않을래?”

이렇게 해서 임 박사와 나는 10월 첫 휴일에 같이 영화를 보기 위해 밖에서 따로 만났다.

나는 나름대로 밝은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아갔다. 임 박사는 미리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언발란스해 보였지만 나름 꾸미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여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우리는 그날 함께 점심을 함께 하고 영화를 함께 보러 갔다.

그 영화 내용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흘끔흘끔 임 박사를 쳐다보았던 것 같다.

그는 왠지 모르게 변해 있었다.

여전히 영화에 눈길을 고정한 채 마치 영화가 뚫어질 듯 쳐다보았지만 임 박사의 분위기는 예전 5년 전과 무언지 모르는 차이로 다가왔다.

‘내가 알던 그 오빠가 맞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전에 여유 없고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매사에 바빴고 남을 챙기지도 못하던 임 박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 이 휴일에 한가하게 나와 영화를 보고 있는데 그의 표정이 영화에 흠뻑 빠져서 웃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염려하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웃을 때에는 웃음소리가 너무나 커서 주위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여서 좀 창피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이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난 그런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난 후, 임 박사는 같이 좀 걷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점심식사 후 내내 몇 시간을 밀폐된 공간에 계속 같은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도 내심 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게 참 신기했다.

무엇보다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화사했다. 마치 우리를 축복하듯이.

임 박사는 시종 나와 나란히 걸었고 차도 쪽으로 내려서서 아주 천천히 걸었다.

걸으며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보았다.

5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여주에서 어땠는지? 서울에 언제 돌아왔는지? 반포 교회는 어떻게 가게 됐는지? 그 교회에서는 어땠는지? 선생님으로서의 학교 생활은 어떤지? 등등

끊임없이 나에 대해 물어왔다.

난 그때마다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내게 이렇게 자세히 진지하게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한참 그렇게 대답만 하다가 나도 그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오빠, 좀 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임 박사가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KAIST를 석사만 졸업한 이야기, 과학원 교회 설교 말씀을 듣고 S사에 들어가려고 애쓰던 이야기, 회사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이야기, 유학 준비하던 이야기, 그리고 1년 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야기, 그리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유학을 포기한 것, 전문인 선교훈련원에 오게 된 것, 선교사가 되려다가 중도에 포기한 것, 그 교수님의 강의 이야기, 그리고 졸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간사님이 회사로 찾아온 이야기,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한 학기를 더 다니게 된 이야기 등

그러다가 이러는 거였다.

“그런데, 네가 그때 처음 들어온 거야! 네가 내 등짝을 얼마나 세개 때렸는지. 지금도 아프다.”

이러면서 눈을 씽긋하며 엄살을 부리는데 그 모습이 그리 싫지 않았다.

임 박사는 솔직했다. 그리고 덤덤했고 매우 차분해졌다.

난 그런 오빠, 아니 임 박사가 아주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 변했다! 아주 딴사람이 되었다!'

아무리 오래 걸어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실 때도 얘기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설사 대화가 오래 중단되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참 편안한 사람이다.’

그제야 임박사가 진중한 사람이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날, 임박사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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