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나비효과
임 박사와 나는 항상 나란히 같은 자리에 앉아 7시간 내내 강의를 듣게 되었다.
임 박사는 여전히 졸업할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매주 해야 할 과제물이 있었는데 회사일이 바쁘다며 과제물을 하나도 하지 않은 채 출석만 간신히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강의 시작 1시간 전에 같이 만나서 과제물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내가 한 과제물을 보며 서둘러 자기의 과제물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리고 훈련원에 참석해서 강의가 시작한 3시부터 끝나는 10시까지 내내 함께 앉게 되었다.
그렇게 같이 앉는 게 좀 불편했던지 어느 날 임 박사가 강의가 끝나고 나를 집으로 바래다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같이 앉는걸 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돌아와 임 박사와의 관계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 주 그와 만나는 시간, 임 박사에게 나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우리가 사귀는 관계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편지를 본 임 박사는 파안대소를 했다.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다며, 자기는 그냥 강의 시간만이라도 떨어져 앉았으면 하는 것뿐이었다면서…
난 그날 아주 골이 나서 강의 시간 내내 뾰로통 해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란히 앉아서 강의를 들었다.
임 박사는 내내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기분은 나빴지만 그 자그마한 사건 이후로 난 내가 임 박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임 박사도 그 사건 이후, 내가 자기를 그렇게 크게 생각했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로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우리는 어느새 훈련원의 커플로 인정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한 학기를 더 다니고 나서 마침내 훈련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그다음 학기에 나도 훈련원을 졸업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창생이 되었다.
임 박사는 자신이 훈련원을 졸업한 이후에도 내가 훈련원에 다니는 6개월 동안 매주 나를 훈련원까지 데려다주고 3시부터 10시까지 기다려 준 후, 훈련원이 마치면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나서야 자기 집으로 갔다.
훈련원의 마지막 코스는 3주간 부천에서 숙식을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부모님이 모두 무교인 나로서는 이 과정이 쉽지 않았다.
이때에도 임 박사는 나를 부천까지 바래다주고 부천에서 매일 밤늦게까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부천에서 우리 집이 있는 대치동까지 바래다주고 나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당시 대치동에 있는 여중 교사였다.
반포 교회 오빠들은 대치동 교사라는 내 직업이 여자하기에 딱 좋은 직업이라며 추켜 세워주곤 했다.
그런데, 임 박사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나를 직업이나 집안 배경, 학벌 같은 것으로 재단하거나 은근히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임 박사는 나를 그냥 나 자신으로서의 나로 인정해 주었다.
이렇게 인정받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는데, 나의 자존감을 한껏 높여 주었다.
나도 그의 직업이나 집안 배경, 학벌 같은 것으로 그를 재단하지 않았고,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어느새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간소하게 하려고 생각을 했지만 양가 부모님의 생각이 달랐고 임 박사는 장남이고 나도 장녀라 양가 부모님도 자식 결혼은 처음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매우 힘들었다.
어느 날 우리는 완전히 헤어질 뻔했다.
결국 결혼하게 되었을 때, 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난 고3 때부터 결혼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었어.”
가난한 집의 장남이 가진 어깨의 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의 눈가에 촉촉한 이슬 같은 것이 보였고, 나는 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결혼 후 1년이 채 안되어 임 박사에게 다시 박사학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우리 부모님은 임 박사가 박사학위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든든한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특히 우리 아빠는 박사학위를 받으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가장 후한 격려를 해 주셨다.
반면에 시부모님은 두 분 모두 반대하셨다.
이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는데 왜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박사학위를 하느냐고…
나도 일견 시부모님의 의견에 처음엔 동의했다.
그러나, 임 박사가 그동안 얼마나 참고 버티며 힘들게 혼자 짐을 지고 살아왔는지 들었던 나로서는 다시 찾아온 박사학위의 기회를 그냥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졸업한 지 5년 만에 KAIST 지도교수님으로부터 온 첫 번째 제안이었다.
이건 정말 뜻밖이었다.
결혼한 해 12월 어느 날 저녁, 지도교수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다.
“임군, 이번에 박사과정에 TO가 났어. 해 보지 않겠나? 3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박사학위는 임 박사에게 무슨 학위증서나 전문가 증서 혹은 학벌 증서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그냥 뉴클레오사이드에 대해 더 배우고 싶어 했다.
뉴클레오사이드 신약개발을 하는 노오사 박사팀에서 나와서 공정개발화학팀으로 옮긴 그는 회사 내에서 많은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대리 승진조차 할 수 없다던 그는 이제 과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모든 실적이 이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그의 부하 사원으로 S대 출신 대리와 여러 명의 사원이 이미 배정되어 있었다.
미국 출장을 비롯해서 이미 6개국에 직접 뛰며 수출망을 직접 만들었다.
그런데, 임 박사의 갈증은 직급도 인정도 실적도 아니었던 것이다.
바보 임 박사는 그렇게 박사학위를 시작해 3년 반 만에 뉴클레오사이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어려운 기간 동안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 있어서 난 너무 좋았다.
박사를 받은 후, 나는 그가 미국으로 포스닥 (Postdoc, 박사 후 연수과정)을 가기를 원했다.
사립여중인 내 근무지에서 최대 3년 휴직을 받으려면, 외국에 나가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3년간 미국에서 남편은 포스닥을 하고, 나는 아이를 키우며 좀 쉬고 싶었다.
임 박사는 박사과정을 하면서도 그냥 가만히 실험만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정말 계속 새로운 기회를 두드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계속해서 흔들렸는지도 몰랐다.
박사과정 첫해에 IMF 사태가 났다.
대덕 연구 단지의 수많은 연구원들이 추풍낙엽처럼 잘려 나갔다.
가난한 DNA를 자기 몸에 탑재한 채 살아온 임 박사는 이 사태가 자기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불안감과 공포에 몹시 시달렸다. 그래서 그는 변리사 시험공부를 박사과정 연구와 동시에 진행하기 시작했다. 연구실에서 뉴클레오사이드에 대한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함과 동시에, 저녁과 밤시간은 법전을 파는데 온통 온 신경을 다 쏟았다. 그렇게 첫 시험을 치렀으나 합격권에서 멀었다.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했다.
임 박사는 뉴클레오사이드를 다시 붙잡았고 법전을 던졌다.
2년 차에 올라갈 때, 임 박사는 유명대학 병원의 방사선 동위원소 표지물질 연구실에 산학생으로 지원했다. 이것은 PET/CT 시험을 하는데 필요한 방사선 동위원소를 합성해서 제공해야 하는 일이었다. 임 박사는 이렇게 해서 주경야독을 하려고 시도했다.
이번에는 KAIST 지도교수님이 막아섰다. 절대 그렇게는 안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계속 뉴클레오사이드를 붙잡고 방사선 동위원소 표지물질 기회를 던졌다.
3년 차에 올라갈 때, 임 박사는 K대 한의대 편입시험에 응시했다.
새롭게 한의대 편입시험이 생겼는데 IMF로 인해 이공계가 무너지자 명문대 이공대생과 졸업생들이 대거 몰려 들어서 12명을 뽑는 모집에 150명 이상이 응시했다.
임 박사는 외할아버지를 다시 생각했다. 이번 기회가 그에게 뭔가 다시 명의가 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졌다고 한다.
K대 출신에 KAIST 석사
임 박사는 자기의 합격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모교가 아닌가?
시험을 응시하고 같은 교회에 다니는 K대 한의대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 이미 12명 다 뽑았어요!”
알고 보니 임 박사는 그냥 들러리였던 것이다.
그 편입시험은 하나의 요식행위였다.
결국 임 박사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임 박사는 그러나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번엔 벤처창업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벤처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코스닥 시장을 만들었다.
사업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는 걸 이미 몸으로 체득한 임 박사는 결코 섣부른 창업을 시도할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 뉴클레오사이드 연구를 계속 진행하면서도 좀 더 나은 미래가 뭐가 없을지 그는 계속 고민한 것이다. 이러던 중 우연히 벤처캐피털 (창업투자회사)의 심사역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임 박사는 이 일이 자기와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IMF는 이렇게 뉴클레오사이드밖에 모르던 바보에게 돈을 따르도록 가르쳤다.
박사학위를 받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업투자회사에 다시 공채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S그룹에 있는 선배로부터 S사 연구소의 박사 특채로 뽑고 싶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미 IMF를 경험했고 무수한 연구원들이 잘려나가는 걸 본 이상 임 박사는 연구소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생각한 것이다.
임 박사는 다시 한번 바보 같은 결정을 했다.
1997년 - 2002년 사이에 에이즈는 더욱 확산되었다.
특히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감염률과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새로운 에이즈 치료제들이 계속 FDA로부터 승인을 받았지만 에이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에이즈는 계속 신약에 대응하여 변종을 만들어내며 강한 내성을 키워나갔다.
수많은 에이즈 바이러스 변종 앞에 에이즈 백신은 꿈도 꿀 수 조차 없었다.
2003년이 되자 기록적인 약 500만 명의 신규 감염자와 약 3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WHO와 UNAIDS 추정으로는 전체 감염자 수를 약 4000만 명 수준이라고 했다.
정확한 집계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에서는 PEPFAR (미국 대통령 긴급 AIDS 구조계획)라는 대규모 국제 에이즈 대응기금을 발표했다.
PEPFAR가 만들어지는데 파우치 박사는 엄청난 역할을 했다.
이라크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부시 행정부는 약 5억 달러 규모의 소규모 모자 감염 예방 프로그램을 검토 중이었다. 하지만 파우치 박사는 아프리카 현장을 직접 시찰한 후, 단순한 예방을 넘어 **치료(Treatment)**를 포함한 훨씬 더 과감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Think Big" (크게 생각하라): 파우치 박사는 동료들과 함께 5년간 **150억 달러(약 20조 원)**라는 파격적인 규모의 예산안을 설계했다. 부시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예산안 설계였다.
이는 당시 단일 질병에 대한 최대 규모의 국제 원조 계획이었다.
당시 서구 사회와 미국 정부 내부에서는 "아프리카의 열악한 인프라와 교육 수준으로는 복잡한 에이즈 약 복용법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론이 많았다. 그러나, 파우치 박사는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도 적절한 지원만 있다면 에이즈 치료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며 정치적 반대를 잠재웠다. 또한 파우치 박사는 특히 임신한 여성으로부터 아이에게 에이즈가 전염되는 것을 막는 기술적 방안을 구체화했다. 이를 통해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에이즈 없이 태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그는 공화당 행정부의 정책이었던 PEPFAR가 정권이 바뀐 후에도 지속될 수 있도록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를 설득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덕분에 PEPFAR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파를 초월한 미국의 대표적인 인도주의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임 박사의 예상과 달리 바이오 투자심사역 공채는 매우 치열했다. 대기업과 제약회사 경력이 있는 석사 이상, 혹은 박사들이 임 박사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임 박사는 어떤 창업투자회사에 들어갔다.
창업투자회사에 들어가 그는 미친 듯이 네트워킹을 하기 시작했다. 네트워킹을 하며 자기와 같은 생각으로 창투사에 들어온 바이오 심사역이 60명이 훨씬 넘는다는 걸 알게 되고 그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창투사 심사역의 일상은 술과 접대였다고 한다.
바이오 벤처 창업자들과의 사업소개, 저녁 식사를 마치면 그다음엔 비즈니스 클럽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2차를 갔고 접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 이 생활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몸에서 이상한 위스키 향과 향수냄새가 그의 온몸에 휘감기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혹시 자신이 술중독이 된 것이 아닌가 해서 몇 주간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비슷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는 마치 술을 아주 많이 마신 사람처럼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술을 함께 마시며 친하게 된 창업자들이 투자를 받은 후, 배신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심한 환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돈 앞에서 친구, 형제, 부모도 없는 걸 수차례 목도하게 되었다고 했다.
임 박사는 자신의 이름을 넣은 바이오 펀드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헛구역질과 심한 건강상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러다 불이라도 나면 술집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겠구나!’
바이오 펀드는 날아갔고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2년간 꼬박 창업투자회사에서 열심히 네트워킹을 하고 돈을 쫓아다녔지만 돈은 항상 저 멀리 달아났다고.
임 박사는 자신이 가장 닮기 싫어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골프채를 들었고 나중에 폭군이 되었었다.
그때, 아버지의 성공? 거기에 가족이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임 박사는 지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지금 나의 성공? 거기에 우리 가족이 있는가?'
자기가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 펀더멘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몇 년간 실험을 안 했는데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이때가 박사학위를 받은 지 2년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