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NA 포스닥
바이오벤처기업 신약개발팀장
하루는 사무실에서 열심히 투자심사 서류를 작성하는데 바이오 벤처를 창업한 KAIST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신약개발팀장을 채용해야 하는데 혹시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그 자리 제가 들어가고 싶습니다. 신약개발 다시 하고 싶어요.”
임 박사는 그렇게 해서 이 바이오 벤처기업의 신약개발 팀장 자리에 지원을 했다.
연구소 면접은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임 박사는 드디어 신약개발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좋더란다.
대표이사와 마지막 최종면접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본사에서 만난 대표이사는 뜻밖의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자네 혹시 독일에 가서 일해볼 생각은 없나?
한 3년 정도?”
임 박사의 벤처캐피탈리스트 경력과 대기업 경력을 눈여겨본 대표이사의 뜬금없는 희한한 제안이었다.
독일 뮌헨 근처 대학교 안에 현지법인 자회사를 설립했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어느 유기화학 교수와 공동연구를 하고 있었고 석사연구원 한 명이 그 연구실에 박사과정 학생으로 파견되어, 신약합성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에 나가는 문제를 혼자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 임 박사는 나중에 답을 하기로 답변을 미루고 면접을 마쳤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이 얘기를 듣고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대치동 여자중학교에서 7년 차 정규직 교사였던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선생님으로 가르치는 건 너무 즐거웠다.
중학생들이 재잘재잘 거리는 모습
웃는 모습, 떠드는 모습, 인사하는 모습
스승의 날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주는 아이들이 주는 말할 수 조차 없는 기쁨.
그 어느 것도 난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러나 교사는 가르치는 것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수많은 지원업무가 있었는데 몇 명의 젊은 교사들이 나누어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점점 나에게 더욱 어려운 지원 업무가 몰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원업무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지만 방법은 딱 하나였다.
외국에 나가야 했다.
결국 임 박사와 우리는 독일로 가게 되었다.
독일에 가서 임 박사는 그 독일 대학 교수를 만났다.
그는 아주 키가 훤칠한 호인이었는데 하버드 대학교에서 포스닥을 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수였다. 뉴클레오사이드는 아니었지만 임 박사는 그 연구실의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었다.
식물에서 추출한 천연물의 성분으로 항암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물질이었고 합성이 매우 까다로운 프로젝트였다. 독일 교수는 이 물질의 새로운 합성법을 개발함과 동시에 더 나은 약물성 (Druggability)을 부여하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구나 그 메커니즘은 당시 암을 표적으로 하는 메커니즘 중에서 암발현 유전자 (Oncogene)를 표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선택적으로 암세포를 사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것이었는데 아직까지 그 암발현 유전자를 표적으로 하면서 효과적인 약효와 안전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약물은 없는 상태였다.
이 약물을 보고 임 박사는 약초를 손수 캐러 다니시고 한약을 정성껏 달이시며 어려운 환자들에게 한없이 관대하셨던 명의, 외할아버지가 생각났다고 한다.
비록 외할아버지처럼 한의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천연물의 신비함은 임 박사의 몸속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까...
임 박사는 독일에 가자마자 독일교수와 이 물질에 대한 국제물질특허 (PCT)를 곧바로 준비했다.
문제는 그 독일법인의 현지 법인장이었다.
그 법인장은 대표이사의 친누나였다.
독일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는 그녀는 바이오에 대해 전혀 몰랐을 뿐만 아니라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 법인장를 임 박사는 최대한 존중하며 자세하고도 아주 쉽게 설명하면서 성실히 매주 보고를 했는데 그 법인장은 한국에 있는 대표이사에게 정반대로 얘기를 전했다.
임 박사가 잘못하고 있다고.
그 오해가 점차 커지고 있었지만 임 박사는 당시 알 길이 없었다.
나와 딸아이도 함께 독일로 들어갔다.
학교 지원업무로 부터 탈출한 나는 드디어 숨을 쉴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임 박사의 업무였다.
본래 임 박사는 연구실에 돌아가 신약개발 연구원이 되기 위해 이 회사에 왔고 독일까지 온 것이었다.
그러나, 대표이사는 임 박사에게 사업개발만을 하도록 계속 채근했다.
독일로 가기 전에는 마치 독일교수 연구실에 들어가서 석사연구원과 함께 연구를 발전시켰으면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독일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말을 바꾸었다.
신약과 관계없는 어떤 정밀화학제품을 개발한 게 있는데 그 제품을 독일 대기업에 팔 수 있도록 판로를 개척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임 박사는 독일 대기업들을 만나며 사업을 확장할 방안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임 박사는 독일 전역에 있는 독일 대기업들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영국, 스위스에도 찾아갔다. 독일 최대 화학기업에 직접 찾아가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설득했다. 그는 또 다른 독일 대기업 담당자와 수차례 미팅을 가졌다. 임 박사와 독일 대기업 담당자는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 나중엔 거의 친구같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 회사와는 대화가 잘되었다고 한다. 정말 임 박사의 정밀화학제품을 자기 회사에 넣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본사에 있는 연구소장과 독일 법인장에게 수시로 성실히 보고했다고 한다. 임 박사가 얼마나 쉽고 자세히 설명했는지 법인장은 누구든지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짐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어느 날 한 독일인 포스닥을 데려와 임 박사의 일을 대신 맡게 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독일인 포스닥은 우물쭈물하며 임 박사로부터 서류를 건네받았으나 그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법인장은 독일인 포스닥이 독일인이니까 독일 비즈니스를 임 박사보다 더 잘 통할 거라 지레짐작했다고 한다.
임 박사는 투덜거리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포스닥이 독일어는 나보다 잘하겠지만 비즈니스는 말이 아니라 관계야."
임 박사가 몇 년 후에 들으니, 결국 법인장과 독일인 포스닥은 그 사업을 망치고 말았다고 한다.
사스-코로나 바이러스
2002년 11월 중국 광둥성에서 원인 불명의 폐렴 사례가 보고되었다.
나중에 이것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인 SARS-CoV-1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이 바이러스를 사스-코로나 바이러스라 불렀다.
2003년 초, WHO는 이 새로운 호흡기 질병에 대한 전 세계적 경보를 발령했다.
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약 8,096명 이상 감염, 774명 이상 사망을 기록했으며, 전 세계 29개국 이상에 영향을 미쳤다. 박쥐에서 출발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으로 인간에게 감염되어 다수의 사상자를 낸 것이다.
당시 한국은 중국, 홍콩 등 인접국에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사스 사태를 막아내며 '사스 예방 모범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 사스 사태를 겪으며 한국은 감염병 대응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는 2004년 **질병관리본부(KCDC)**가 공식 출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은경 박사는 당시 실무진으로서 이 **'무결점 방역'**을 이끌어낸 숨은 주역 중 한 명이었고 질병관리본부의 태동기부터 실무를 맡아온 전문가였다. 2002년-2003년 사스-코로나 당시 정은경 박사의 직책은 국립보건연구원 역학조사관 (방역실무)였다. 즉, 무결점방역을 가능하게 한 방역실무자였다.
국가 포스닥 지원사업
사업개발을 하면서도 임 박사는 어떻게 하면 독일 대학에서 신약개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궁리하게 되었다.
결국 임 박사는 한국 학술진흥재단에서 뽑는 포스닥 지원사업에 지원을 했다. 국가에서 매년 박사학위를 받은 지 5년 이내의 박사들을 선발하여 생활비와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사업이었다.
이 일이 대표이사의 친누나인 법인장에게 임 박사를 몰아세울 수 있는 빌미로 작용했다.
당시는 여전히 IMF 여파로 허덕이고 있었다. 1997년에 시작한 IMF가 2002-2003년까지 채용시장의 한파를 몰고 온 것이다.
특히 대덕연구단지 등 기업체 연구원들이 해고된 이후 연구원 채용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이공계 박사학위를 받아도 취업을 하기가 어려웠고 그들은 모두 학술진흥재단의 포스닥 지원사업에 매달렸다. 면접관이었던 명문대 교수가 임 박사에게 이렇게 돌려서 말했다.
“지금 취업이 매우 힘든데 자네는 그래도 직장이 있으니 이 펀드는 아직 취업을 못한 사람에게 양보하는 게 좋지 않겠나?”
결국 그는 떨어지게 되었다.
학술진흥재단 면접을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간 임 박사는 오랜만에 본사에 가서 연구소장을 만났다고 한다. 반갑게 임 박사를 맞이해 준 연구소장은 친누님처럼 임 박사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연구소장이 임 박사에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메일을 하나 보여 주더란다.
그 이메일은 독일법인장이 연구소장과 대표이사에게 보낸 이메일이었다.
임 박사는 그 이메일을 읽으며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고 한다.
이메일에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수많은 거짓말과 모함 투성이였으며 임 박사를 중상모략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너무나 뒤늦게 안 것이다.
2000년대 초에 미국 나스닥에서 닷컴 버블 붕괴가 일어나 나스닥 지수가 바닥을 찍었다.
코스닥도 인터넷 기업 버블붕괴의 여파를 받았고 코스닥 등록요건이 강화되기 시작됐다.
버블은 인터넷에서 터졌지만 바이오 기업은 직격타를 맞았다.
월드컵 특수로 2002년은 그나마 괜찮았다.
2003년이 되자 바이오 기업에 대한 투자금이 완전히 말라 버렸다.
임 박사가 속한 바이오 벤처기업도 점차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하기 시작했다.
대표이사는 임 박사가 독일에 온 지 1년이 채되기도 전에 독일로 직접 날아와 임 박사와 면담을 가졌다.
퇴사를 요구했다.
대표이사는 약속한 3년도 결국 지키지 않았다.
임 박사는 자신이 한 말조차 지키지 못하는 대표이사에게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
처음엔 자신을 믿어주는 것 같았지만 친누나가 하는 모함과 중상모략에 임 박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8월 말까지 월급이 나오고 온 가족의 귀국비용과 이사비용은 주겠다고 했다.
이미 7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때 나는 임 박사에게 그냥 미국으로 가자고 졸랐다.
어차피 3년 휴직을 하고 온 상태여서 2년이 남아 있으니 이 기간을 미국에서 포스닥을 하면서 딸아이도 영어를 가르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임 박사는 교회 여전도사님께 기도 부탁을 드렸다.
그 여전도사님은 군인이었던 남편이 죽자 아들과 혈혈단신으로 독일 선교사로 오신 분이셨는데 자기 가정을 열어 교회를 시작하신 분이셨다. 임 박사와 나는 그분으로부터 크리스천의 삶에 대해 많은 훈련을 받고 있었고 그분은 임 박사와 나의 멘토였다. 그분이야 말로 진정한 선교사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뉴클레오사이드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7월-8월은 여름휴가 기간이었다.
도대체 누가 지금 사람을 뽑는단 말인가?
임 박사는 미국 탑스쿨 연구실에 닥치는 대로 수백 군데 이력서를 보냈다.
돈은 받지 않아도 좋다고 이메일에 명시했다.
우리 돈을 쓸 생각이었다.
내가 휴직 중이었지만 월급은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연구만 하게 해 주십시오.
돈은 받지 않아도 됩니다.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미국 대학에 포스닥을 지원할 때, 임 박사는 가장 먼저 ‘뉴클레오사이드’라는 키워드를 다시 떠올렸다.
처음엔 뉴클레오사이드를 연구하는 화학과를 지원했다.
그런데, 답이 없었다.
불과 몇 년 전에 9/11 테러가 있었고 이라크 전쟁이 나서 미국 정부가 연구비를 온통 삭감하는 중이었다.
돈이 필요 없다고 이메일에 명시했는데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임 박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기도를 했는데, 그날 갑자기 이런 소리가 마음에서 울렸다고 한다.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너무나 묵직하고 분명한 그러나 아주 따스한 소리였다고 한다.
그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임 박사의 머리에 떠오른 게 있더란다.
"RNA"
임 박사가 뉴클레오사이드 논문을 쓰려면 선도연구를 인용해야 하는데, 가장 먼저 시작하는 인용이 항상 RNA였다. 그는 ‘도대체 RNA가 뭐고 어떤 연구를 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항상 있었다. 뉴클레오사이드를 연구하는 임 박사는 RNA와 뉴클레오사이드의 관계가 너무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날부터, RNA 연구실에 이력서를 다시 보내기 시작했다. 지원하는 학과도 화학과가 아닌 분자생물학과로 변경했다.
회사 사택에서 이사를 해야 하는 날은 대표이사가 퇴사를 요구한 날로부터 20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직 출국날짜가 20여 일이 남아 있었지만, 대표이사의 친누나, 그 법인장은 집요하게 임 박사와 우리 가족을 괴롭혔다.
우리는 그냥 하자는 대로 당하고만 있었다.
컴퓨터를 끄기 전 임 박사가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은 사라졌다고 난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 뜻대로 하고 싶으면 하라고 말해줬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열었을 때,
Y대학에서 오퍼레터가 와 있었다.
바이오 기업보다 많은 월급이었다.
의료보험도 함께.
마치 꿈을 꾸는 듯 정말로 ‘Y대학교 분자생물학과 RNA 연구실’에서 진짜 오퍼를 받게 되었다.
그 오퍼레터를 읽고 난 임 박사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는 컴퓨터 앞에서 아파트가 떠나가라 막 환호성을 치르며 춤까지 추었다.
임 박사도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내 두 손을 붙잡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딸도 우리를 따라 까르르 웃으며 폴짝폴짝 뛰면서 두 손을 하늘 높이 들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
마치 하나님께 찬양하듯이
이라크 전쟁 중이라 미국 대학들이 연구비가 없어서 연구원들이 잘려 나가던 그 시기에, 모든 대학교수들이 여름휴가와 함께 연구발표를 하기 위한 비즈니스 트립이 한창이던 8월 중순
임 박사는 당당히 세계에서 가장 좋다는 그 대학에서
가장 좋은 조건으로
포스닥 연구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Y대학 RNA 포스닥 (Postdoc)
전공인 화학과가 아닌 분자생물학과
뉴클레오사이드가 아닌 RNA 연구실로
그것도 탑스쿨 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임 박사를 중상모략하던 법인장은 이 얘기를 듣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리 알아본 거죠?
그렇지 않고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하겠어요?
언제부터 알아봤어요?
학술진흥재단인가에 지원했을 때부턴가?
아무렴 그럼 그렇겠지."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가 쪼로로 대표이사에게 알렸으리라.
똑같은 인간들.
법인장을 평소부터 잘 알던 여전도사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아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이 얘기를 듣고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경 쓰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걸 그분이 어떻게 알겠어요?
그분도 알고 보면 불쌍한 분이에요.
독일 사회에서 30여 년간 독일 남편과 살면서 얼마나 힘든 일이 많으셨겠어요.
미워하지 마세요 임 박사님~"
나중에 안 것인데 한 가지 정말 신기한 게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임 박사는 사실 이 RNA 연구실에 지원하지 않았다.
Y대학에 지원은 했다.
화학생물학연구를 하는 다른 교수에게 지원을 했다.
Y대학에는 이 교수님 한분에게만 지원을 했다.
그 교수는 임 박사를 뽑지 않겠다고 답장을 보내 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Y대학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화학생물학 교수님은 임 박사의 이메일을 그냥 무시하지 않았고
RNA를 연구하는 임 박사 지도교수에게 포워드를 해 준 것이다.
그래서 임 박사가 Y대학 분자생물학과 RNA 연구실에 들어간 것이다.
"이게 정말 말이 돼?"
처음에 임 박사와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메일을 뒤져봐도 도무지 어디에서도 Y대학 RNA 연구실에 보낸 이메일은 없었다.
나도 찾아봤지만 확실히 없었다.
하드 드라이버에도 없었고
혹시나 해서 스팸메일이나
휴지통까지 뒤졌는데 없었다.
임 박사와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착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독일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날,
루프트 한자 이코노미석을 예매한 우리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우리의 이름이 불렸다.
우리는 무슨 일인가 하여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안내석으로 다가갔다.
우리 세 사람을 보자 승무원이 말했다.
"세분을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해 드리려고 해요. 추가로 돈을 내실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믿을 수 없었지만 스튜어디스가 안내하는 대로 우리 좌석을 따라갔다.
스튜어디스는 우리를 비행기 2층으로 안내했다.
아주 아늑한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세 사람이 나란히 발을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큰 자리 세 개를 배정해 주었다.
퍼스트 클래스
우리는 생전 처음,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임 박사와 나는 비자를 받기 위해 미국 대사관에 갔다.
대사관 앞에는 여행비자를 받기 위한 줄이 아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가 가자 미국 대사관 직원이 우리를 데리고 그 긴 줄을 그대로 통과해서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임 박사가 서류를 보여주자 이민국 직원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임 박사 (Dr. Lim), 좋은 대학에 가시는군요. 좋은 연구 많이 하세요. 축하합니다."
Y대학 RNA 연구실 오퍼레터는 모든 걸 가능케 하는 자동문처럼 느껴졌다.
임 박사는 8월 마지막 날 먼저 미국 JFK 공항을 향해 떠났다.
임 박사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새 자도교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인사드릴 때, 교수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자네가 과학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Don't forget! you are a scientist!)”
이게 끝이었다고 한다.
이 신비한 모든 경험을 통해 임 박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정말 신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
Y대학과 가까운 한인교회였다.
이제 드디어 비로소 사무실에서 연구실로
턴어라운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