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리그 깡통박사

탑스쿨 천재들과의 만남

by 보스턴임박사

Y대에서 지도교수님과 첫 만남을 가진 후


교수님은 어떤 여자 연구원에게 임 박사를 소개하며 랩투어를 부탁하셨다고 한다. 그녀는 최근에 RNA연구실에서 박사를 받았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실험실 이곳저곳을 자세히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처음 보는 RNA 분자생물학 연구실 투어여서 임 박사는 좀 묘한 기분이었지만 이런 좋은 곳에서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다니 너무나 꿈만 같았단다. 투어의 마지막은 임 박사의 새로운 책상과 케미컬 흄후드 (Chemical Fume Hood)로 안내하는 거였다고 한다. 자신의 실험 데스크를 보자 임 박사는 손바닥을 가만히 그 위에 올려 보았단다.


‘몇 년 만에 갖는 내 실험 데스크인가!’


임 박사는 순간 기분이 약간 울컥하더란다.

KAIS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 3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다시 실험실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전에는 실험실에 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었다고 했다. 매일 실험실에 가는 게 어떤 때에는 가기 싫을 때도 있었단다.

그러나, 3년간 실험실 밖 세상을 외유를 하고 보니 감회가 특히 남달랐다고 한다. 다시 실험실로 돌아오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로 자기에게 부여된 이 실험데스크가 임 박사에게는 마치 돌아온 탕자에게 주는 환영만찬처럼 느껴지더란다.


‘잘 돌아왔다. 임 박사. 실험실로 다시 돌아온 너를 두 팔 벌려 환영한다.’


마치 외할아버지가 양팔을 활짝 핀 채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단다.

그 순간도 한의사 외할아버지, 한약을 정성껏 달여주시던 그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단다.


그날 오후 임 박사의 이전 포스닥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키는 작았지만 당찬 체격의 그는 웃으며 자기를 소개했다고 한다. 일본 도쿄대학교 화학과에서 유기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지난 3년간 RNA 연구실에서 포스닥으로 있었다고 했다. 자기는 유기화학만 하다가 평소에 생물학에 관심이 있었는데 RNA 연구실에서 일하게 되어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이곳에 와서 시험관 내 진화실험 (In vitro evolution)을 줄곧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했던 일과 작년부터 시작한 RNA 스위치 연구에 대해 아주 상세히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2년간은 주로 RNA 실험을 배워서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동안 결과가 없었지만 지도교수님이 특별히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리고 1년 전 RNA 스위치가 이 연구실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실험 방향이 RNA 스위치로 바뀌었다고 했단다. 그는 아직까지도 결과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역시 교수님은 특별히 말씀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지도교수님이 포스닥을 하실 때 3년간 결과가 나오지 않는 어려운 실험을 혼자 하고 계셨는데 그때 포스닥 지도교수님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4년째가 되어서 시험관 내 진화실험 결과 DNA 효소라는 걸 세계 최초로 발견하게 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DNA 효소로 인해 유명세를 탄 교수님은 Y대학에 테뉴어트랙 교수로 오실 수 있었고 작년에 정년교수가 되셨다고 한다. 지도교수님은 그 경험으로 자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연구원들에게 채근하는 교수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임 박사로서는 정말 뜻밖의 말이 아닐 수 없었더란다.


‘3년간 결과가 없어도 아무런 푸시를 하지 않는 교수님이라니’


그러면서 자기는 곧 일본에 돌아갈 계획인데 3년간 Y대학에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일본대학 분자생물학과에서 논문박사를 하나 더 받을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매우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고 한다.

자기는 곧 책상을 비울 거니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임 박사에게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차가 있냐고 임 박사에게 묻더란다. 아직 없다고 하니 자기가 차를 팔아야 하는데 원하면 싸게 주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일본 포스닥과 임 박사는 실험실을 나와 그 포스닥의 차를 보러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 포스닥의 차는 흰색 지프차 같은 것이었는데 좀 투박하게 보여 우리 가족이 타기엔 아닌 것 같더란다. 그런데 그 차창안에 성조기가 있었다고 한다. 임 박사는 그 차보다 그 성조기에 눈이 더 가더란다. 그래서 이 성조기가 뭐냐고 물으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2년 전에 9/11이 났을 때 뉴스와 TV에서 모두 제2의 진주만이 일어났다고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2차 대전 때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한 바로 그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혹시 미국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일부러 성조기를 자기 차창안에 항상 보이게 넣고 다닌다는 거였다. 9/11 테러사건과 진주만을 한 번도 연결시키지 못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결국 그의 차는 사지 않기로 했단다. 임 박사가 자기 차를 사지 않는다고 하자 그의 태도가 조금 차갑게 느껴지며 돌아서더란다.

일본 포스닥과 헤어지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온 임 박사는 천천히 실험 데스크를 청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얼마 만에 내 실험데스크를 청소하는 것이냐?’


그는 무슨 새집을 얻은 새댁처럼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실험데스크를 깨끗이 정리했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두 명의 포스닥이 다가와 인사했다고 한다. 한 명은 미국인 포스닥이었고 또 한 명은 인도인 포스닥이었는데 자기들을 인사하면서 이 실험실에서 자신들 둘이 가장 오래 있었다고 소개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포스닥들도 인사를 나누었는데 모두들 임 박사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고 한다.

첫날은 그렇게 반가움과 설렘, 그리고 황홀함에 시간이 어떻게 간지 모르게 금방 하루가 흘러갔다고 한다.


나는 임 박사와 지도교수의 첫 만남이 어땠을지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뭔가 잘못된 것이면 어떨지 너무나 초조했다. 딸과 나는 아직 한국 친정에 머물면서 독일에서 올 짐을 정리하고 나서 미국으로 출국할 계획이었다.

임 박사와 내가 다시 전화 통화를 한 건 우리 시간으로 오전, 미국시간으로는 저녁시간이었다.


“지도교수님과 첫 만남은 어땠어?”


나는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취조하듯 물었다.


“응, 아주 좋으신 분이야. 인상도 좋으시고 내게 과학자인걸 잊지 말라고 그 한 말씀만 하시고 박사 한 분을 소개해서 랩투어를 하게 하셨어. 내 앞에 원래 동경대 출신 일본인 포스닥이 있는데 그 사람도 만났어. 그 사람말이 자기가 3년간 별다른 결과가 없는데도 아무런 이야기가 없으셨데… 예전에 지도교수님이 포스닥 하실 때 처음 3년간 결과가 안 나와서 아주 애를 먹으셨는데 그때 포스닥 교수님의 푸시가 굉장했었나 봐 그래서 포스닥들에게 푸시를 안 하신다고 하더라고…”


이 말을 듣고 나서 난 정말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좋은 지도교수님을 만난 것이다.

남편은 아주 기쁜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듯 들렸지만 왠지 힘이 있게 느껴졌다. 마치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는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들 어떠하냐?


이제 2년을 미국에서 안심하고 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난 정말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 그와 전화를 끊은 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임 박사가 미국에서 지도교수님과 첫 만남을 가진 다음날, 독일에서 우리 짐이 도착했다.

대부분 이민가방으로 가져온 터라 이삿짐이 아주 많지는 않았다. 그 짐들을 친정 집에 잘 정리하느라 애를 좀 먹었다. 깔끔하신 엄마와 아빠의 잔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친정 부모님은 아쉬워하시면서도 내심 기대를 하시는 눈치셨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으로 사위가 포스닥을 간다니 이제야 좀 박사학위를 시킨 보람이 느껴지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20여 일을 한국에서 보내고 딸아이와 나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 공항까지 양가 부모님이 모두 나오셨다.


2년만 있다가 꼭 돌아오겠다고 연신 인사드리며 딸아이에게도 인사하라고 계속 종용하였다. 부모님의 마음은 모두 똑같다고 느꼈다.

얼마나 아쉬우시겠는가?

그래도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미국행 그리고 Y대학 행은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모두 아쉬움을 보이시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배웅해 주셨다.


에이즈, SARS, 조류독감


에이즈 신약이 속속 승인이 되면서 에이즈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의 질병이 아니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1981년에 최초로 발견되고 2004년 경이되어서야 에이즈는 비로소 컨트롤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실로 2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 만성 팬데믹이었던 것이다.

2002-2003년 SARS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또다시 경종을 불러일으켰다. SARS가 일어나자 많은 회사들이 치료제와 백신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년 만에 SARS 바이러스 사태가 조기종료되자 치료제와 백신개발은 곧봐도 중단되었다. 시장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제약, 바이오 기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2005년에는 조류독감이 발생했다.

조류독감은 인간에게 감염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지만 인체감염이 되었을 경우엔 사망으로 이어졌다. 그해말까지 세계적으로 139건의 H5 N1 인간 감염 중 71명이 사망했고,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심각했는데 55명 감염에 45명이 사망했다. 80%가 넘는 매우 높은 사망률이었다. 비록 소수만이 감염되었지만 본래 닭, 오리, 칠면조 같은 조류에만 감염되던 조류독감이 인간에게까지 넘어왔을 때 그 위험성은 상상불가능할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이 정도에서 그친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H5 N1 조류독감 사태도 SARS와 더불어 신종 바이러스와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NIAID 소장인 파우치 박사는 에이즈 치료제 개발을 독려함과 동시에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가에 저가로 에이즈 신약을 공급할 방법을 모색하며 대규모 국제기금을 만드는 한편, SARS와 H5 N1 조류독감이 발생하자 이에 대해서도 수많은 자문과 제안을 하게 되었다.

SARS가 일어났을 때 여러 가지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어 임상시험을 시작했지만 SARS가 조기에 종료되자 곧바로 임상이 중단되었고, H5 N1 조류독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문제는 향후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에 대비한 다국적 규모의 글로벌 연계체제와 준비태세가 중요하며 공적자금 투입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낳았다. 그리고 백신을 미리 개발해서 질병을 예방할 수 있어야지 질병이 발생하면 이미 늦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진국 감염병 전문가들은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신종 바이러스 출현 시나리오에 대비해 대응할 새로운 시스템 마련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첫 번째 랩미팅


RNA 연구실에서 첫 번째 랩미팅이 열린 건 임 박사가 실험실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때 임 박사는 처음으로 RNA 연구실의 모든 멤버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20명이 넘는 꽤 규모가 큰 연구실이었다.

대부분 백인들이었고 백인이 아닌 사람은 임 박사 이외에 몇 명의 인도인 포스닥이 전부인 극히 소수였다고 한다. 랩미팅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주 활발한 이야기가 물결처럼 오고 갔다고 한다. 랩에 처음 조인한 임 박사는 대체 누구와 얘기해야 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곧이어 교수님이 들어오셨다고 한다.

KAIST에 있을 때는 교수님이 왕이었고 교수님이 자리에 계실 때와 안 계실 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고 한다.

그런데 Y대학 RNA 연구실은 그렇지 않더란다.

교수님이 들어오셨는데도 아무도 개의치 않고 계속 옆사람과 마음껏 떠들었고 교수님도 그걸 웃으며 즐기시는 눈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교수님도 떠드는데 스스럼없이 동참하셨다고 한다.

참으로 처음 보는 희한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교수님이 좌중을 서서히 정리시키셨다고 한다.

그때 임 박사는 교수님께 시선을 향하면서도 교수님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바라보았다고 한다.

모두의 눈동자들이 임 박사가 보기엔 마치 친한 형을 대하듯 다정한 눈길들이 서로 오간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교수님은 먼저 임 박사가 처음으로 조인했다고 소개하셨다고 한다. 임 박사에게 얘기할 기회를 주셨지만, 그는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고 한다. 말을 그냥 어버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지도교수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바로 연구 주제로 넘어가셨다고 한다.


그날 한 명의 포스닥이 1시간여 동안 자기의 연구내용을 정리해서 발표했다고 한다.

KAIST에서는 학생이 발표하면 교수님만이 질문하는 게 관례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모두들 순서 없이 아무나 나서서 마구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심지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학부생들도 마음껏 질문을 던지더란다.

지도교수님은 그들의 질문과 발표자의 답변을 그대로 귀담아들으셨다고 한다. 가끔 그 흐름에 맞추어 몇 마디 더하셨지만, 뭔가 마치 학생들끼리 토론을 하도록 유도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임 박사가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들어간 분자생물학과 RNA 연구실에서 발표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마치 속사포를 쏘듯이 빠르게 내지르는 원어민들의 영어에 그만 임 박사는 완전히 기가 죽고 만 것이다.

자기도 한국이나 독일에 있을 때는 영어 꽤나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곳 아이비리그 분자생물학과에 있는 그는 아무것도 아니더란다.

그저 아이비리그에 버려진 찌그러진 깡통이 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아이비리그 깡통박사였던 것이다.


'지난 3년간 연구에서 손을 놓았으니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시간이 넘어 거의 2시간이 다 되는 랩미팅 동안 처음 30분은 아는 단어 모르는 생물 용어 합쳐서 어찌어찌 따라갔는데 30분이 넘어서자 그때부터는 아예 하나도 따라갈 수 없었고 머리가 멍해지며 생각이 하얘지며 그냥 말하는 사람들의 동작들만 보일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소리가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임 박사는 그날 많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어디 도망갈 곳도 없었고 2년을 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그는 너무나 막막하더란다.

그의 앞에 험난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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