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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여사 Jan 25. 2019

전단지 받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역삼역 3번 출구 출근길 단상

1.

평소처럼 지하철 역을 나서자마자 전단지 나눠주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출근하는 내내 늘 보이던 분이었는데 어제 하루아침 안보이셔서 '딴 동네 가셨나, 무슨 일 생기셨나' 괜히 궁금해하며 출근을 했었더란다. '다시 나타나셔서 반가워요'라는 듯 힘찬 발걸음으로 주머니에서 손도 빼고 전단지 받을 만반의 태세로 아주머니께 다가섰다. 하마터면 웃으며 눈인사까지 할 뻔했는데 다행히 미세먼지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인사할 준비했다가 관둔 내 얼굴 근육들은 아마 티가 나진 않았을 거다.


2.

처음 이 동네 출근할 때만 해도 3월이라 그랬는지 전단지 나눠주시는 분들도 많고 역 앞에서 김밥을 파는 분도 있었다. 전단지야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거라, 열심히 받았지만 김밥은 이미 아침을 먹고 오는 나에게는 늘 고민의 대상이었다. 왠지 사람 상대하는 일이라곤 한 번도 안 해본 것만 같은 어색한 표정의 아저씨가 김밥을 잔뜩 쌓아놓고 어찌할 바 모르고 계시는 걸 볼 때마다 '저거 아침에 다 팔아야 할 텐데, 김밥은 금방 상하는데, 하나 사 가지고 가서 점심에라도 먹을까'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 날이 더워졌고 여름이 오면서 김밥 아저씨는 사라지셨는데,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왔는데도 김밥 아저씨는 다시 나타나지 않으셨다. 어디 다른 데로 옮기셨을까, 가끔 궁금하다.


3.

예전에는 그러니까 결혼 전이나 아이를 낳기 전에는 전단지를 나눠주시는 분들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다니던 직장이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동네라서 전단지 나눠주는 분을 찾기도 어려웠고, 어쩌다 가끔 전단지를 마주하면 '근처에 쓰레기통도 없는데 저걸 받아서 어째'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세상 온갖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오지랖과 감정 공유 능력이 생겨났고, '저분들도 누군가의 부모이고 어떤 아이를 키우고 있겠지' 라는 알 수 없는 동질감이 생겨나서 두 손 가득 물건을 든 것이 아니라면 꼭 챙겨서 받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4.

게다가 이 100세 시대에 나이들었다고 뒷짐 지고 세상을 멀찍이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사회생활을 하고 (그것이 돈벌이 수단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모든 회사는 돈벌이 수단이 아니던가) 자신만의 생활을 꾸려가시는 모습도 나는 정말이지 멋지다고 생각한다. 오늘 출근길 동네에 걸려있던 '어르신 일자리 창출' 현수막처럼 오래오래 살게 되었으니 오래오래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5.

물론 세상을 보는 눈은 다양해서, 언젠가 전단지를 모두 받아 드는 나에게 그거 왜 받아주냐 받아주지 말라는 식의 언급을 한 동료가 있었다. "할당받으신 거 빨리 돌리고 집에 가시면 좋잖아요"라고 말했더니, 분량당 주는 게 아니라 시급제니까 굳이 빨리 돌릴 필요 없는 거라며 시크하게 대꾸해서 '아 그런가, 내가 괜한 짓 한 건가' 작아지는 순간도 있었다.  시급이건 건당 지급이건, 전단지 그거 하나 받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열심히 살겠다고 힘든 거 알면서도 나오신 분들에게 괜히 산정방식 논의하며 따지기 보단 그냥 한 장 두장 받아 들고 주머니에 꼭꼭 챙겨 왔다가 회사 사무실 휴지통에 넣으면, 회사 청소하시는 분이 싫어하시려나요. --; 뭐든 따지기 좋아하고 '대체 왜'를 입에 달고 사는 아줌마지만, 가끔은 이렇게 생각 없이 받아 들면 17분 30초 운동 프로그램이란 게 세상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점심 특선 공깃밥 무제한도 알게 된답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부터 운동하기로 했는데, 과연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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