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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통 Jan 24. 2021

코카콜라 맛있다 맛있으면 또 먹어

달콤했던 내 인생 첫 일탈 기록

"그걸 다 기억한단 말이야?"

어떤 일들은 까맣게 잊고 살면서, 유독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나에게 가족들이 자주 되묻는 말이다. 단지 내 머릿속에서 존재하던 기억의 조각들을 입 밖으로 꺼내었을 때, 부모님은 매우 놀라 하시며 '우리 애'의 뛰어난 기억력에 감탄을 하고는 하셨.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여름날 커다란 고무대야를 욕조 삼아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던 일, 대문 맞은편 쪽방에서 하숙하던 여고생 언니와 함께 놀았던 기억, 부모님과 자주 가던 갈비 집 여닫이 문을 열며 "이모 상추 더 주세요"를 외치던 소심한 꼬맹이의 모습-그건 바로 나-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많이 담아 놓고 싶어서였을까?

뇌 용량에도 한계가 있다면, 그 시절의 기억을 너무 많이 안고 살아서 지금 이렇게 깜빡하나 싶을 정도 적 기억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내 머릿속. 그렇다. 이번에 다룰 이야기는 내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다. 

미취학 아동 시절의 나는 (언니 말에 의하면) 바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하고 조용한 아이였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나 역시 온실 속 화초처럼 집에서 인형 놀이를 즐기고, 아버지 공장에 오시던 손님들이 귀엽다며 쥐어주신 용돈을 언니의 꼬임에 넘어가 전부 빼앗겨도 그게 불합리한 줄 조차 모르던 꼬맹이였으니 언니 말에도 일리는 있다고 본다.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는 25년 넘는 세월 동안 크고 작은 농기계 공장을 운영하셨었는데 내가 초등학생 시절 전라도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 경기도의  지역에서 공장을 꾸려가셨다.

당시 아버지 공장이 번창했던 덕분에 나는 부족함 없이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었다. 그리고 이것은 5살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 내 나이 무려 다섯 살의 이다.

부모님께서 가져오신 삶은 땅콩을 맛있게 까먹었던 기억.

그리고 그 땅콩을 먹고 탈이 났는지 그날 밤 나는 구토를 하고 코피를 쏟았다. 부모님은 나를 들춰 업고 아버지 친구가 하시던 동네의 의원으로 데려가셨는데, 늦가을에서 초겨울 그 사이의 어느 계절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나를 업고는 두터운 겉옷을 내 머리 위로 덮어 주셨다. 나는 아픈 와중에도 넘쳐나는 호기심에 옷깃을 살짝 걷어 올려 바깥 풍경을 구경했고 따듯한 엄마의 등에서 바라본 반짝이던 노란 불빛과 문구점인지 어딘지 모를 곳의 창 안으로 커다란 하얀 곰인형들이 늘어서 있던 기억이 난다.


병원에 도착한 나는 링거를 맞으며 맞은편에 앉아 족발에 소주를 걸치고 있는 아버지와 친구분(나를 치료해 주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저녁이라 병원 진료는 이미 마감한 시간이었는데 나를 봐주시고는 아버지와 한 잔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90년대 초반이니 뭔들 불가능했겠냐만...

나는 고개를 쭉 뻗어 어른들이 드시고 계신 족발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아버지와 선생님은 내가 족발이 먹고 싶었다고 생각하셨는지 "지금은 안돼, 다 나으면 사줄게" 이런 뉘앙스의 말씀을 하셨고 나는 "아니야 아니야"만 되풀이했다.

내가 토라졌다고 생각하신 어른들은  다 나으면 더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다고 하셨고 나는 또 아니야 아니야만 반복했. 사실 내가 먹고 싶었던 건 족발이 아니었다. 나는 그 옆에 놓인 콜라가 마시고 싶었다. 뭐가 그리도 부끄러웠는지 콜라가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못해 아니야만 되풀이한 것이다.

출처  PIXABAY

다음 날인지 다다음 날인지 내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엄마에게 콜라가 먹고 싶다고 생떼를 부리고 울기까지 했다. 평소 고집은커녕 자기주장 하나 없던 애가 고작 콜라가 먹고 싶다고 울기까지 하다니.

엄마는 결국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작은 콜라 캔 하나와 종이컵을 안방 침대 위 작은 쪽창 아래 창틀에 놓아주셨다.

엄마는 아버지 공장에서 일하시던 기사님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 잠 외출을 하셔야 했는데, 내 종이컵 3분의 1 정도를 가리키며 이만큼만 따라서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공장으로 건너가셨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하던 고분고분했던(바보 같았던) 나는 엄마가 잠시 집을 비우셔도 가만히 앉아 학습지 스티커를 붙이고 놀던가 tv를 보고 있는 아이였고, 그날도 정말 종이컵의 3분의 1 만큼만 콜라를 마시고 캔 위에 다시 종이컵을 덮어 뒀다.

나무틀로 된 작은 유리 쪽창 문으로 길 건너 아버지의 공장 측면이 보였다. 트럭이 한대 지나갈 정도의 좁은 흙 길.

그 길 끝에 위치한 얕은 고랑을 가로지르는 판자 하나를 건너면 아버지의 공장으로 연결되는 지름길이었다.  

엄마의 말씀대로 삼분의 일의 콜라를 마시고 나니 목이 더 마르고 남은 콜라가 자꾸만 나를 유혹했다.

조금 맛을 보고 나니 어찌나 더 마시고 싶던지 '엄마 몰래 조금만 더 마실까? 아니야 엄마가 이만큼만 마시라고 하셨어.' 내 안의 선과 악이 한참을 싸웠을 거다. 나는 콜라 캔 옆에 놓인 빨간 집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마가 자리를 비우신 사이 어린 나와 언니가 부모님을 찾을 경우를 대비해 늘 재다이얼을 누르면 공장으로 전화가 가게끔 해두셨다.

띠리 리띠리 리리

"엄마~ 나 콜라  마셔도 돼?"

지금 생각해보면 내 전화를 받고 엄마얼마나 어이없으셨을까? 다섯 살짜리 꼬맹이 딸이 콜라가 먹고 싶다고 전화를 거는 상황이라니. 처음엔 당연히 안된다고 하시던 엄마는 "그럼 아까 엄마가 마시라고 한 만큼만 더 마셔"라고 하셨다. 나는 신이 나서 전화를 끊자마자 콜라를 다시 따랐다. 이번에도 엄마가 시킨 대로 딱 삼분의 일 만큼만.

어린 나에게 목을 톡톡 쏘는 탄산 감에 달콤하고 진한 콜라의 향이 마나 맛있었을까.

한 번의 허락을 받은 나는 금 더 대범해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소심했던 어린이는 콜라를 들어 종이컵에 아주 조금 따라서 찔끔찔끔 아껴 마셨다.

먹고 나니 또 먹고 싶고 또 먹고 싶고.

혹시나 엄마가 오실까 싶어 안방 침대에 깨끼발을 들고 서서 공장 쪽을 살펴가며 콜라를 마시고 또 마셨다.

이만큼만 마시면 엄마 모르겠지?

이만큼만 더 마실까?

얼마지났을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던 콜라는 어느새 텅 빈 캔이 되어있었다. 기까지가 콜라에 대한 나의 인생 첫 기억이다.

그 뒤로 어떻게 됐아쉽게도 이후의 기억은 전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처음으로 뭔가가 먹고 싶다고 엄마에게 울며 불며 떼를 썼던 그 날, 원하는 걸 얻고 나서 느낀 톡톡 쏘는 달콤함. 엄마의 말씀을 어기고 인생 최초의 일탈을 저질렀던 깜찍한 그날의 만행은 서른넷 이 나이까지도 너무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나는 콜라를 겨 마시지는 않는다. 패스트푸드나 치킨에 함께 딸려 오는걸 조금 마시는 정도. 그런데 그날 병실에 누워 있던 내 눈에 새빨간 콜라캔이 왜 그리도 탐스러워 보였을까?

길 건너에 보이지도 않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고사리 손으로 야금야금 따라 마셨던 그날의 콜라 말로 내 인생 콜라였다.


지난 금요일, 식탁에 둘러앉아 치킨을 먹으며 딸려온 콜라를 바라보다 그때의 추억이 떠오른 나는 남편과 끝방 총각(남동생)에게 이 일화를 들려줬다. 한참 깔깔거리며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끝방 총각이 남편을 향해 넌지시 한마디 건넸다.

 "매형, 우리 누나가 모자라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어이가 없었던 나는 젓가락으로도 사람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한마디를 던져주고 먹던 치킨을 마저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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