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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통 Dec 15. 2021

김치찌개의 힘

S전자 면접날이었다. 다섯 명의 면접자와 세명의 면접관이 마주 보고 앉아있었고, 내 자리는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였다.

작게는 두어 개 보통 세 개 정도의 질문을 던졌던 앞 뒷 차례와 달리 내게는 무려 다섯 개의 질문이 주어졌다.

모의 면접과 예상 질문에서 연습했던 몇 개의 질문을 수월하게 대답하고 잘 넘어가나 싶었던 찰나, 예상치 못했던 마지막 질문이 내게 던져졌다.

"만약 보통씨가 합격해서 실무배정됐을 때, 같이 일하는 선배가 이유 없이 미워하고 텃세 부리면 어떻게 대처할 것 같아요?"

"저는 선배님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또한, 제 특기가 요리인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겠습니다. 선배님과 함께 식사를 하며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 같습니다."

당황하지 않은 척 입으로는 술술 대답하고 있었지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과의 식사는 상상만 해도 체할 것 같았다. 그런데 입사 후,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나고 말았다.

면접과 적성 검사를 통과한 나는 취업에 성공을 했고, 몇 달 뒤 입사를 위해 회사 연수원에 입소했다. 그 후, 동기들과 한 달여간 연수를 마치고 나는 분석실이라는 곳에 배정받았다.

그곳에서 통상 9시부터 6시까지 오피스 근무를 하는 다른 파트와는 달리 4조 3교대 근무를 하는 SEM(반도체 단면 촬영용 전자 현미경) 파트를 맡게 됐다. 업무 자체가 네 명의 직원이 번갈아가며 8시간씩 근무하는 형태인지라 나는 내 업무를 익힘과 동시에 앞, 뒤로 인수인계하는 선배들의 눈치까지 살펴야 했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건, 오피스 여사원 중 최고참이었던 왕언니가 입사 십여 년 만에 회사에서 만난 첫 고등학교 후배가 나였다는 사실이었다.

왕언니는 입사 첫날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매우 반가워하며 "귀한 내 후배한테 잘들 대해줘. 괜히 애 주눅 들게 하지 말고."라 큰 소리로 외쳤다. 누가 힘들게 하면 언니에게 얘기하란 말 덧붙이셨다. 실제로 털털하고 쿨했던 왕언니는 그 후로도 내가 분석실을 떠날 때까지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셨, 덕분에 나는 천방지축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예쁨 받으며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다.  문제는 나를 귀여워해 주는 오피스 선배들이 아닌 담당 업무를 함께 보는 선배와의 관계였다. 나와 같은 파트를 맡은 세명의 선배들은 모두 하나같이 독보적인 캐릭터를 소유한 언니들이었다. 함께 일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곁을 내어주는 언니들을 겪으며 교대로 마주치는 업무 특성상 친해질 기회가 드문 데다 낯을 아주 많이 가리는 성격 들이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처음에는 매일이 지치고 외로운 날들이었다.

그나마 다른 언니들은 기분파는 아니었기에, 업무적인 실수만 없다면 큰 문제없이 인수인계를 하고 퇴근할 수 있었는데,  한 사람 S언니는 도무지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우람한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그녀. 두꺼운 분석실 쇠문을 열어젖히는 순간부터 그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탁탁 탁탁. 복도 끝에서부터 슬리퍼를 끌고 오던 소리와 나를 부르던 우렁찬 목소리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녀는 정말이지 매우, 매우, 매우 기분파였다.

내가 일처리를 어떻게 하던 상관없이, 본인 기분이 좋은 날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부터 밝았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날은 내가 업무를 잘하건 못하건, 그런 건 중요않았다.

그런 날은 등장과 동시에 테이블에 가방을 틱 하고 던지며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폼 할 거 있어?" "야 이거 왜 이렇게 했어? 누가 사진을 이렇게 찍으?" 하며 있는 트집 없는 트집을 잡기 일수였다. 나는 웬만해선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 시간 외 근무를 해서라도 내 몫의 일을 다 해두고 퇴근했다.

차라리 한결같은 성격이면 나도 맞추기 편할 텐데 수시로 변하는 성격 탓에 마주치는 날마다 불안감이 동반됐다. 그나마 긍정적이었던 건 그녀가 나뿐만 아니라 업무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타 부서 직원들에게도 본인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나로 인해 만들어진 기분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맞추다 맞추다 나중에는 출근하는 발자국 소리에도 긴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제 아무리 밝고 수다스러웠던 나신입사원의 입장이기에 선배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두 계절 가까이 S언니의 기분을 맞춰주다 보니 슬슬 오기가 발동했다.

한 날은 이 언니가 또 본인의 저조한 기분을 내게 마구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언니만 성격 있는 거 아니고 저도 한 성격 하거든요? 이제 더는 못 참아요!'

회사를 때려치우는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그녀의 진상을 참을 수 없었다.

"언니, 업무적인 걸로 뭐라고 하시는 거면 저도 잘 새겨듣고 배울 텐데, 지금 이건 업무랑 아무 상관없이 언니 감정대로 행동하시는 거잖아요."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갈 때까지 갔다. 에라 모르겠다. 이래 미움받나 저래 미움받나 마찬가지라면 나도 그녀 때문에 더는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랐다. 뿔을 세워 들이받고 나니 S언니의 구겨진 얼굴과 싸해진 분위기까지 내가 감당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일을 마친 나는 그 길로 퇴근했다. 그리고 얼마 후 S언니가 내게 함께 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다음 내 휴무에 맞춰 김치찌개를 끓여주겠다고.

맛있는 걸 좋아하고 자존심 센 그녀가 건네는 일종의 사과라는 사실을 눈치껏 파악할 수 있었던 나는 이제 후배다운 면모를 보일 때라고 생각했다. "언니, 찌개는 제가 끓여드릴게요."

그렇게, 면접날 내 입에서 나왔던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다가온 휴무에 나는 기숙사 근처 편의점에 들려 통조림 햄과 참치 한 캔, 즉석밥과 몇 가지 간식거리를 구입해 S언니의 기숙사로 향했다. 마트까지는 거리가 꽤 멀어서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찌개를 끓여야 했다. 언니의 저녁 출근 전 함께 밥을 먹기 위해 들어선 주방에는 그녀와 그녀의 친구도 한분 자리 잡고 있었다.

식재료가 부족한 기숙사에서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내는 미션을 성공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언니가 건네준 김치를 먹기 좋은 크기로 쫑쫑 썰었다.

냄비를 꺼내 잘라둔 김치를 담고 참치 기름을 조금 부어 달달달 볶았다. 그 위로 물을 붓고 슬라이스 한 통조림 햄과 기름기 뺀 참치를 넣었다. 고춧가루도 없었기에 김치 국물과 양념을 조금 더 추가해 빨갛게 색을 냈다.

맛을 보니 김치 국물 때문에 간을 더 할 필요는 없었다. 찌개는 센 불에 팔팔 끓이다 약불에서 조금 더 익혔다.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청양고추 쫑쫑 다져 넣어 푹 익힌 매콤한 고기 김치찌개도 맛있지만, 통조림 햄과 참치의 감칠맛을 더해 끓인 김치찌개도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

김,달걀과 꿀 조합인 김치찌개. 전복 솥밥에는 꽁치 김치찌개를 곁들였다 Photo by.서보통

김치찌개는 오래 푹 익힐수록 맛이 있다. 그래서 끓여 둔 다음 날 먹는 김치찌개가 제일 맛이 좋다. 하나, 그날은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기에 김치가 푹 익을 정도로만 끓여냈다.

내가 끓인 찌개에 언니가 가져온 김, 여기에 계란 프라이를 더해 소박한 상차림이 완성됐다.

S언니는 매일 먹는 구내식당 밥이 아닌 직접 만들어 먹는 밥은 오랜만이라고 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스턴트로 점철된 김치찌개는 걱정과는 달리 매우 맛있게 끓여졌다. 내가 끓인 찌개가 S언니와 친구분 입맛에도 잘 맞았는지, 언니는 몇 차례나 솜씨를 칭찬했다. 사실 요리랄 것도 없는 찌개였지만,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다음 출근부터 언니는 내게 전보다 훨씬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전의 틱틱거림을 보이는 날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나도 더 이상 S언니의 발자국 소리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을 계기로 우리 사이도 한층 가까워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함께 야식타임을 제안하기도 하고 농담도 곧 잘 건네 왔다. 내 작은 반항과 김치찌개의 힘은 실로 위대했다. 함께 나누는 식사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분석실 마지막 출근을 하루 앞뒀던 날, 그녀는 내게 눈물을 내비쳤다.

S언니가 아이같이 우는 모습을 보니 나도 조금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일찍 친해졌다면, 함께 더 일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함께 식사하기 전 상부에 보고를 끝낸 일이었다. 몇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내가 그곳을 그만두게 된 이유에 S언니의 탁구공 같은 성격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치찌개는 오래 끓여야 맛있고, 그녀 역시 오래 알고 보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찌개마다 맛있게 익는 시간이 다르듯, 사람마다 상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시간도 다르다. 어쩌면 그녀의 시간이 조금 더뎠던 것뿐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그날의 김치찌개 덕분에 조금이나마 덜 힘든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맛 본 김치찌개의 힘은 생각보다 더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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