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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통 Dec 07. 2021

뮤직 신데렐라와 '밥전'

찬밥과 달걀로 만드는 고소함

밥전에 들어가는 재료는 매우 간단하다. 한 김 식은 흰쌀밥 한 공기와 달걀 알 그리고 맛소금. 후추는 취향껏 사용한다. 재료를 모두 섞은 다음 열이 오른 팬에 기름을 두르고, 밥 수저로 크게 한 두 숟갈씩 떠서 동그랗고 노릇하게 부쳐주면 완성되는 초초초 간단 요리 밥전.


내가 밥전을 처음 맛 본 때는 중학생 시절이었고, 그 맛을 알게 해 준 이는 친구 미자(그녀의 별명)다.

우리는 27년이라는 긴 시간을 공유한 만큼 같이 음식도 참으로 다양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자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바로 밥전이다.

때는 바야흐로 2003년. K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뮤직 신데렐라'라는 전 국민 오디션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고인이 된 가수 죠앤이 부른 가이드송을 커버해 부르고 그 녹음본을 방송국에 보내 지원하는 형식의 오디션이었다.

당시 삼총사처럼 어울려 다녔던 나와 미자, 그리고 또 다른 친구 C.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우리는 다 함께 그 오디션에 지원하기로 결심하고는 나 진지하게 목청이 터져라 노래 연습을 해댔다. 평소보다 학교에 일찍 등교해 텅 빈 교실에서 연습을 하기도 하고, 쉬는 시간 틈틈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러댔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우리 셋 중 그 누구도 가수를 꿈꾼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춤추고 놀기를 좋아하던 나, 클릭비와 글쓰기를 좋아하던 C, 열정적으로 신화를 좋아했던 미자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뮤직 신데렐라'에 열을 올린 이유는 좋아하는 가수를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거라는 망상과 서울과는 거리가 먼 시골 소녀들도 카세트테이프만 있다면 얼마든지 오디션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접근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며칠간 우리는 학업보다 더 열정적으로 노래를 연습했고, 드디어 대망의 녹음날이 됐다. 일정 조율도 나름 체계적이었다.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테이프가 도착하는 날짜를 고려해 날을 정했다.

녹음은 커다란 신식 오디오와 마이크가 있었던 미자네 집에서 하기로 했다.

녹음 당일, 우리 셋은 하교 후 미자네 집으로 향했다. 널찍한 흙마당을 끼고 있던 미자네 집은 우리가 사택이고 놀릴 정도로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학교 옆 쪽문으로 나가서 달리면 2분 안에도 도착할 거리였다.

미자네 집에 도착한 우리는 은빛 쇠 마이크를 손에 쥐고 사뭇 진지하게 녹음에 임했다. 새 카세트테이프를 오디오에 꽂고 가이드 mr에 맞춰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만큼은 미자네 집이 스튜디오고 녹음실이었다.

그렇게 녹음을 끝낸 테이프는 갈색 서류 봉투에 담겼다. 이제 주소를 적고 보내기만 하면 지원 완료.

하도 열심히 노래를 불러댄 탓인지 배가 고파왔다. C와 내가 배가 고프다고 투정을 부리자 미자가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하얀 대접에 찬 밥을 덜어와 달걀을 섞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이거 개밥이야?"

질문에 그깔깔거리고 웃던 미자가 생각난다.

맨밥에 달걀이라니. 당시로서는 처음 보는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다. 대체 이걸로 뭘 하려고 그런담?

당시만 해도 날달걀을 싫어했던 나는 차라리 안 보련다 하고 뒤돌아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오기 시작했다. 코를 킁킁거리며 다시 미자에게 다가갔다.

중학생 답지 않은 어른스러움과 시크함을 풀풀 풍기던 C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미자의 요리가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접시 위에 동그랑땡 비슷한 무언가가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떠들며 만드느라 그랬는지 익숙지 않은 손놀림 때문인지 한 김 식은 밥전이 상 위로 올라왔다.

나는 조심스레 젓가락을 가져갔다.

의심을 가지며 한 입 살짝 깨물어 먹은 밥전은 오해해서 미안할 정도로 고소하고 맛있는 게 아닌가?

한 김 식힌 것이 신의 한 수였는지 밥알이 흐트러지지 않고 살짝 단단해진 식감 또한 좋았다.

나이도 어린 소녀가 어찌나 간을 기가 막히게 맞췄는지, 살짝 짭조름한 것이 계속해서 들어가는 맛이었다.

먹성 좋은 소녀들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별로 들어가는 것도 없는데 이렇게 맛있다니!

그날 집으로 돌아와 미자가 밥전을 만들던 모습을 떠올리며 따라 만들어봤. 맛을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먹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자리를 비운 탓에 흐릿한 기억과 맛에 의존하며 밥 위에 달걀을 풀고 소금을 한 꼬집 넣은 다음 뭉치지 않게 잘 풀어 부쳐냈다. 내가 만든 것도 고소하고 맛은 좋았지만, 미자가 만들어준 밥전처럼 중독적인 짭조름한 맛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 가자마자 미자를 찾아가 흥분된 목소리로 그 맛이 나지 않는다고, 뭐가 들어갔느냐고 물었다.

미자는 이젠 내 설레발에 놀라지도 않는다는 듯이 차분히 재료를 설명했다.

"밥, 달걀, 맛소금..."

한 끗 차이는 바로 맛소금이었다. 그냥 소금을 넣어서는 적당한 감칠맛과 묘한 중독성! 그 맛이 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은 가는소금 대신 맛소금을 넣어 다시 밥전에 도전했다.

음... 뭔가 비슷해지긴 했는데, 여전히 그 맛이 아니었다.

미자는 "이상하다? 진짜 그것밖에 안 들어가"라고 했다.

나도 이상하다 지지배야.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냥 내가 만드는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다. 내 밥전도 충분히 맛은 있었다.

크래미와 야채를 넣어 만든 크래미 밥전 Photo by.서보통

간단한 재료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데다가 누룽지처럼 겉을 바삭하게 익혀 먹으면 그것 또한 별미인지라, 이따금씩 밥전이 각나서 부쳐 먹고는 한다. 세월만큼이나 내 밥전도 진화를 거듭해 파프리카, 햄, 버섯, 양파와 당근을 넣어 부쳐먹기도 하고  대신 참치나 크래미를 넣어 부쳐 먹기도 한다. 평소에 요리할 때 맛소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밥전만큼은 꼭 맛소금을 사수한다.

그렇게 긴 시간 여러 차례 밥전을 부쳐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똑같이 맛을 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도 그 맛을 다시 구현해 내기란 힘들 거란 걸 깨달았다. 목청껏 함께 노래를 부르고 고픈 배를 부여잡으며 먹었던 미자의 밥전은 내가 무슨 짓을 해서도 같은 맛을 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참고로 그때 우리는 '뮤직 신데렐라'가 되지 못했다. 우리 스스로도 예상했던 당연한 결지만 말이다.

비록 그때 뮤직 신데렐라는 되지 못했지만 내게는 사랑하는 친구와 특별한 '밥전'이 남았다. 래, 이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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