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만 한 크림을 듬뿍 머금은 온갖 맛의 도넛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한 나를 위한 달콤한 보상의 시간이었다. - 본문 중에서
해가 바뀌기까지 겨우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문득, '올해도 무탈하게 한 해를 보냈구나' 생각하다 보니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2~3년간의 시간을 되짚어보더라도 올해처럼 다사 다산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는데, 최근들어 누리고 있는 일상의 평안함에 취해 그 사실을 잊고 만 것이다.
봄에 진행했던 건강검진에서 부인과 관련 문제가 생긴 걸 알게 됐고, 예상보다 좋지 못한 상태에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에 환자등록을 하게 됐다. 연달아 여름에는 지난 13년간을 키워왔던 자식 같은 호두를 떠나보나야 만 했다.
6월 초 수술을(이라고 하기엔 시술에 가까운 작은 수술이었지만) 마치고 스무날쯤 뒤, 호두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수술 후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호두를 떠나보냈으니 그 일을 전 후로 몇 주 동안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싸워야 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빠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서 매끼 건강식을 챙겨 먹으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그간에도 꾸준히 운동은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회복 기간 동안 누워있다시피 했더니 체력이 바닥을 치게 된 것이었다. 건강한 탄수화물, 양질의 단백질과 지방. 그리고 야채를 고루 챙겨 식사를 차렸다.
섭취하는 영양제도 두어 가지 추가됐다. 주로 면역력 향상을 위한 영양제였다.
무엇보다 그 두어 달 동안 나는 다이어트 중에도 절대 끊지 못했던 빵과 과자를 멀리 하려고 노력했다. 그건 정말이지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빵집에 들어서면 행복감을 느끼고, 카페에 가서도 디저트는 필수라고 생각하는 '자칭 타칭빵순이'였는데 1차 추적 검사를 마칠 때 까지는 그래도 빵 보다 건강을 챙겨둬야만 했다.
차를 마시기 위해 들린 카페에서나 길거리 빵집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버터향기에 몇 차례의 고비가 왔지만 정신력으로 이겨냈다.
아버지께서 평생금연에 실패하시더니 급성 심근경색으로 스텐트 시술까지 하게 되시자 흔한 금단 증상조차 없이 단번에 금연에 성공하신 일이 생각났다. 그래 맞다. 아프면 빵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람.
참다 참다 빵이 너무 먹고 싶은 날은 통밀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거나 오트밀을 활용해 쿠키를 구워 먹었다. 그러나 고소하고 담백한 통밀빵으로는 달콤한 디저트에 대한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날 밤, 나는 옆자리에 누워 있던 남편에게 대단한 발표라도 하는냥 얘기했다.
"내일 결과 좋게 나오면 노*드로 도넛 먹으러 가자"
값비싼 가방이나 다른 물질적인 보상을 예상했던 남편은 다소 소박한 내 계획에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다음 날 일찍 진료 예약이 돼있었던 터라 새벽에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 대기자 명단에 내 이름이 떠있는 걸 보니 심박수가 빨라지고 초조함이 몰려왔다. 남편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병원에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는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내 차례가 되었다.
검사 후 몇 주 만에 뵙는 교수님은 상냥한 얼굴과 차분한 말투로 환자(나)로 하여금 신뢰감을 갖게 하는 분이셨다. 한동안 검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우리 부부는 교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나서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집 근처 병원에서 추적 검사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 말을 듣기까지 그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우리는 빠르게 수납을 마치고 병원을 빠져나와 미리 알아 둔 도넛 가게로 향했다. 서울 곳곳에 지점이 있지만, 병원에서 멀지 않은 잠실점으로 목표를 정했다. 다행히 진료가 일찍 끝난 덕분에 오픈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계단을 따라 매장이 위치한 2층으로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핑크 핑크 노랑 노랑. 이슬로 작가님과 협업해 만들었다는 슈가 베어 캐릭터와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가게 내부를 장식하고 있었다. 줄 서서 먹기로 유명한 도넛 가게는 평일 오픈 시간 덕분인지 한가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짧게 가게를 둘러보고는 곧장 진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먹만 한 크림을 듬뿍 머금은 온갖 맛의 도넛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한 나를 위한 달콤한 보상의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선 박스째 가득 담아 사가고 싶었지만, 남편이 옆에서 만류했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각자 원하는 맛으로 하나씩만 골라서 먹고 가기로 했다. 이 많은 도넛 중에 하나만 고르라니!
그래도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도넛을 즐기러 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유튜브에도 올렸던 달콤한 보상 데이 Photo by. 서보통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커피와 도넛이 테이블에 놓였다.
남편은 라즈베리 맛을, 나는 클래식 바닐라 맛을 골랐다.
-인기 메뉴는 우유 생크림 맛이라지만, 나는 클래식 바닐라맛과 카야 버터맛을 더 선호한다.-
이곳의 도넛을 처음 먹던 날은 '크림 도넛이 거기서 거기지 이렇게 대기줄까지 서가며 먹어야 하나' 싶었는데, 몇 차례 다른 곳의 도넛을 먹어본 이후에 인기 많은 곳은 다 이유가 있구나 싶어 졌더랬다.
쫀득한 빵 사이로 달콤한 필링이 한가득. 반죽과 숙성의 차이인지 다른 곳보다 더 찰지게 쫀득한 빵은 어떤 필링과도 잘 어우러졌다. 도넛은 격한 달콤함으로 시작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올라왔다.
바닐라향을 듬뿍 머금은 크림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하얀 슈가 파우더가 가득 묻은 내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동그란 도넛이 주는 동그란 위안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편이 나를 보며 "그동안 고생했어"라고 말해주었다. 짧지만 묵직한 그의 말 한마디에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호두를 떠나보내고 힘들었을 시간과 병원에 오가며 고생했던 내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조금 울컥하는 마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영혼까지 달콤하게 물드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