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마케터 안병민의 통찰스케치
“점잖은 자리라 저도 오늘은 아들 돌잔치 때 입었던 정장을 입고 오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요. 새벽 5시에 작업이 끝나서 집에 가서 잠깐 눈만 붙이고 오다 보니 이렇게 또 험한 복장으로 왔습니다.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블랙 진에 까만 색 가죽점퍼, 그리고 까만 모자를 뒤로 돌려쓰고 단상에 선 오늘 강연의 주인공은 김태호 PD다. 맞다, 대한민국 예능의 대명사 <무한도전>의 그 PD, 김태호 PD 말이다. 강연을 여는 그의 첫 인사에서부터 PD란 직업의 고달픔이 훅 전해져온다. 다들 부러워만 했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직업적 고통의 시간들은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덧 11주년이다. <무한도전> 말이다. 모든 게 그렇듯 그 시작도 당연히 미약했다. 그 11년의 세월을, 그리고 그 변화를, 김태호 PD는 현장의 증인이자 리더로서 담담하게 풀어주었다. 그러고 보면 예능 프로그램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사실 얼마 안 된다. 김태호 PD 또한 7년전 결혼할 때만 해도 장인, 장모님 되실 분이 내 딸이 예능 PD랑 결혼하겠다 그러면 과연 좋아하실까 걱정을 많이 했단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상전벽해다. 전 국민이 예능을 찾고 예능 스타가 대한민국의 스타가 되는 세상이며, 인기예능 프로그램의 PD 또한 유명인사가 되는 세상이라서다. 김태호 PD는 나영석 PD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 위상 제고의 1등 공신이자 당대 최고의 ‘핫피플’이다.
“2005년 4월 23일 ‘무모한 도전’이라는 코너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MBC는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요. 예능 주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타 방송국 대비 엄청난 열세를 보이던 시기였지요. 그래서 MBC는 ‘쌀집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영희 PD를 최연소 예능국장으로 임명합니다. 김영희 PD가 불과 44세일 때였으니 일종의 혁신적 조치였지요.”
그렇게 <일밤>이라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시작했던 게 바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2001년 <동거동락>이란 프로그램으로 '국민 MC'라는 별명을 갖게 된 유재석씨가 KBS로 가서 그 유명한 ‘쿵쿵따’ 돌풍을 일으키고 오랜만에 복귀한 MBC 무대였다. 하지만 시작은 처참했다. 시청률 4프로. 방송 종영을 알리는 애국가 시청률이 4프로가 나올 때니 주말 예능 시청률로서는 말이 안 되는 숫자였다. 시작 한 달 만에 폐지설이 돌았다. 그러나 대체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었다. 막강한 경쟁 프로그램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다.
“<무모한 도전>이 없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내가 한번 해보겠다' 했지요. 자신이 있었냐고요? 아니, 그런 건 전혀 없었고요. 어차피 없어질 프로그램이니, 제 생각은 단지 이 기회에 유재석씨랑 친해지겠다는 거, 그게 다였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유재석씨를 섭외할 수도 있겠다 하는 얄팍한 생각이었지요 (웃음).”
<무모한 도전>은 담당 PD 교체와 함께 <무리한 도전>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2005년 10월 19일이었다. 시청률은 5~6%로 병아리 오줌만큼 나아졌다. 하지만 멤버에 대한 호불호와 프로그램 구성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토요일 저녁에 가족들과의 외식, 연인간의 데이트 등 모든 걸 포기하고 집에 돌아와 TV를 틀었는데 박명수, 정준하, 정형돈, 노홍철 같은 친구들이 나오면 기분 좋겠냐? 시청자들의 기회비용에 대해 생각해봐라.” 매주 월요일마다 김태호 PD가 MBC 예능국 윗선(?)에 불려가 듣던 닦달이었다.
“사실 당시의 멤버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숙제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박명수씨는 팀 승리에 기여하지 못하는 4번타자였습니다. 팀보다는 개인에 촛점을 맞추는 스타일이다 보니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합과 흐름을 깨트리는 경우가 잦았지요.
정준하씨의 고민은 고착화된 ‘바보’ 캐릭터였습니다. 당시 ‘브레인 서바이벌’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독보적인 바보 캐릭터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보 캐릭터를 빨리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지요. 캐릭터는 함께 방송을 하며 만들어 나가는 거라 설득해서 겨우 섭외했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첫 녹화 때 박명수씨가 “바보 나온다”하며 정준하씨를 놀린 이후로 아직 정준하씨의 캐릭터 중 상당 부분을 ‘바보’가 차지하고 있습니다(웃음).
정형돈씨는 당시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에서 4개 코너의 주인공을 맡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리얼버라이어티에 적응을 잘 못했지요. 게다가 정준하씨가 영입되면서 ‘뚱보’ 캐릭터도 뺏기고. 매일 밤 술에 취해 전화해선 울면서 하는 얘기가 “형, 나 어떡해야 돼?”였습니다. 그 때 저도 고민을 많이 했지요. <무한도전>의 컨셉 자체가 좀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가자는 건데, 웃기는 능력이 모자란다고 하차시킨다는 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사자 말입니다. 세상을 호령해야 할 사자임에도 나비를 보고도 도망가는 반전의 캐릭터였지요. 이걸 응용해서 ‘못 웃기는 개그맨’이라는 캐릭터로 정형돈씨의 컨셉을 잡았습니다. 사실 방송보다 일상 자체가 무척이나 재미있던 정형돈씨는 그렇게 스타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억지로 만들어 보여주기 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그의 일상이 캐릭터가 된 겁니다.
노홍철씨는 방송 출연 자체가 위태롭던 시절이었습니다. 과연 공중파에 출연 가능한 캐릭터냐, 라는 거였지요. 이처럼 모든 멤버들이 크고 작은 자신만의 숙제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다들 프로그램 자체에 몰입하기 힘든 상황이었지요."
그럼에도 사실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좋았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었다. 김태호PD는 고민했다. 현장에서는 이렇게 재미 있는데 왜 이게 시청자들에게는 전달이 안 되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멤버들간에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촬영 중 잠시 쉬는 시간이었는데 만두를 사와서 함께 먹던 바로 그때였다. 누가 하나 더 먹었니 덜 먹었니 하며 멤버들이 다투는데 나이가 마흔이 넘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으니 그게 그렇게 재미있더란다. ‘그래, 이걸 카메라에 담자’ 생각했던 김태호 PD는 이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늘 생각과 다르게 전개되는 법. 카메라 앞에서 멤버들은 다시 ‘차렷’ 자세가 되었다.
“어느 날 모든 멤버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했지요. “우리 프로그램, 이렇게 가다간 곧 폐지된다. 시한부다. 그러니 뭐라도 의미있게 해보자. 우리 프로그램,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다들 의견을 모아보자.” 그랬더니 이게 멤버들에겐 일종의 감동이었나 봅니다. 그 동안엔 PD가 하라는 대로만 했는데, PD가 프로그램의 방향이나 취지에 대해 출연자들의 의견을 물어본 건 처음이었던 거지요. 그때 나왔던 이야기가 이런 겁니다. “촬영하러 나올 때랑 집에 돌아갈 때랑 기분이 너무 다르다. 손님에게 안방 침대를 내주고 나는 거실에서 쪽잠을 자는 느낌이다.” 그래서 결정한 겁니다. 그래, 게스트 부르지 말자. 우리 스스로를 위한 방송을 해보자, 라고 말이지요.”
소통을 하니 변화가 생겼다. 멤버들이 프로그램에 대한 책임감을 갖기 시작했다. PD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니라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공동체로서의 책임감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의기투합했다. “우린 예능만 생각하자. 예능의, 예능을 위한, 예능에 의한 프로그램을 만들자.” 그들은 뜻을 모았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바로 ‘6시간 녹화’였다.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전파견문록’이란 프로그램의 방송시간은 55분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녹화시간은 불과 1시간 10분. 편집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라이브처럼 방송이 되던 프로그램이었다. ‘상상플러스’라는 인기 예능도 90분 방송이었지만 녹화는 2시간 반이면 충분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여타 프로그램과 달리 시청자들에게 우리의 땀을 보여드리자, 라는 생각이었다. 다른 인기 연예인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왜 예능 프로그램의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냐는 거였다. 당연한 항의였지만 <무한도전> 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2006년 5월 6일, 모두가 하나임을 확인하고 <무한도전>이라는 독립 프로그램이 시작됐습니다. 특정 프로그램의 한 코너가 아니라 <무한도전> 자체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방송되기 시작한 거지요. 이후 11년, <무한도전>의 역사는 시스템 변화의 역사입니다. 바로 제작 시스템의 변화인데요. 그것은 카메라 시스템과 자막, 편집 시스템의 변화였습니다."
그러면서 김태호 PD가 보여준 영상. 2005년 첫 방송 오프닝 영상이었다. 영상을 보니 유재석씨 혼자 이야기를 한다. 주고 받는 대화가 없다. 화면도 퍽이나 단조롭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카메라 2대로 촬영하던 시절이었단다. 게다가 오디오가 물리면 편집 작업에 영향을 미치니 서로 오디오가 안 물리게 멘트를 치라는 게 출연자들에 대한 주문사항이었다. 어찌 보면 출연자들에게 시작부터 부자연스러움을 강요했던 거다. 현장의 재미가 안방에 전달되기가 힘들었던 이유다.
김태호 PD는 그래서 바꾸었다. 현장의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전달하려면 어떤 환경에서건 오디오와 카메라로 모든 것을 다 담아야겠다 생각했다. 카메라 8대를 동원해서 전체 상황뿐만 아니라 개별 멤버들의 동작과 몸짓, 목소리까지 모든 걸 담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많아지니 누군가의 일방적 멘트가 아니라 자연스레 멤버들 간 상호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런 대화 속에서 자연스레 캐릭터도 잡히기 시작했다. 물론 편집은 예전 대비 훨씬 힘들어졌다. 편집할 필름 자체의 양이 엄청나게 방대해졌기 때문이다. <무한도전> 프로그램 하나만 해도 이제는 연출이 4명에 조연출이 9명이다.
MBC TV의 광고는 15초에 대략 1,240만원이다. <무한도전>에는 이런 광고가 48개 붙는다. 광고만으로 약 6억의 매출이 발행한다. 하지만 다가 아니다. <무한도전>에 광고를 내고 싶어하는 광고주가 많기에 <무한도전> 광고 시간을 패키지로 판매한다. 여타 프로그램의 광고 시간까지 끼워 파는 거다. <무한도전>의 MBC 광고 매출 기여도가 50%를 넘어가는 건 그래서다. IPTV 유료 판매 매출도 있다. 시청자들의 시청 행태가 바뀌면서이제 <무한도전>은 매 회 1,300~1800만 다운로드가 이루어지는 핫콘텐츠다. 그러니 한 주 쉬어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엄청난 금액의 매출이 걸려 있어서다. <무한도전>의 이런 위상을 만들어 낸 또 다른 혁신 요소가 바로 자막 시스템이다.
"<무한도전>이 만들어 낸 몇몇 시스템 혁신 중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자막입니다. 예능 자막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인 전지적 작가 시점의 자막이 들어갔다는 겁니다. 자막을 통해 제작진과 출연자의 속마음을 표현한 거지요. 사실 이건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하다 나왔던 건데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제 오디오가 맞물리다 보니 서로 튀기 위해 배려와 질서 없는, 대화 아닌 대화들이 난무하더란 거지요. 너도 나도 순서와 맥락 없이 대사를 던지다 보니 쉽게 말해 정신이 없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가 자막을 넣기 시작한겁니다."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그램 <브레인 서바이벌>은 분당 시청률이 55%가 나왔다. 장안 최고의 인기였다. 그 인기를 분석해보니 결론은 오디오의 명확성과 웃음의 확장성. 당시 MC였던 김용만씨와 게스트들의 1대 1의 정돈된 대화가 깔끔한 오디오로 맞아 떨어졌고 다른 게스트가 대화할 때 또 다른 게스트들은 청중이 되어 현장의 웃음이 확장되더라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에도 <무한도전>은 정반대로 갔다. 마구 엉키는 오디오를 해결하기 위해 출연자를 규제하기 보다는 자막이라는 요소를 활용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녹화한 화면을 오직 하나의 화면으로 편집해내야 하는 PD나 영화감독은 이 시대 최고의 편집자다. ‘제 7의 멤버’로 불리는 <무한도전>의 김태호 PD가 만드는 자막은 이제까지 우리가 봐왔던 예능프로그램의 자막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토록 인기가 있는 거다.”
여러가지문제연구소 김정운 소장은 저서 <에디톨로지>에서 <무한도전>의 인기 비결을 이처럼 자막의 힘이라 설명한다.
“카메라나 자막, 편집 시스템이라는 하드웨어적 변화 외 사실 또 다른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PD로서 제가 많은 걸 내려놓았다라는 겁니다. 방송에서도 간혹 보면 유재석씨가 “태호야” 하고 저를 지칭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요. 이게 메인PD를 우습게 보는 행위라고 제 선배들이 뭐라 그랬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저 혼자 이끌어가는 방송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방송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맡은 역할에 상관없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했습니다. 권한도 과감하게 위임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저란 사람 자체가 카리스마가 넘치고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들을 나눠주니 더 중요한 걸 챙길 수 있었습니다. 바로 R&D였습니다. 저 스스로가 홀가분해지니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예능을 관통하던 클리셰를 하나씩 깨나갔던 겁니다.”
‘클리셰’란 판에 박힌 듯 반복되는 상투적 문구나 표현들을 일컫는다. <무한도전>은 다양한 차원에서의 클리셰를 깸으로써 기존 예능과의 차별화를 선언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스포츠 특집들이다. 레슬링, 봅슬레이, 조정, 에어로빅 등을 통해 그야말로 각본 없는 예능 드라마가 완성됐다.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표현이 이런 특집들을 통해 시청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의 클리셰 깨기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한국 예능은 잘 알다시피 ‘시즌 제’가 없다. 그러니 모든 프로그램들이 박수를 받으며 인기를 구가하다가 손가락질 받으며 막을 내린다. 애당초 박수칠 때 떠날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그래서 김태호 PD는 생각했다. 우리도 배우들처럼 ‘작품’이란 걸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시청자들이 한번 웃고 마는 휘발성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시청자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 또한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다. 회당 출연료를 받던 멤버들에게는 방송 시간과 상관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했던 이런 아이디어가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반대는 곧 사라졌다. 두 달을 연습해서 패션쇼의 모델로 런웨이를 걸었던 ‘슈퍼모델’ 특집에 시청자들의 찬사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후 멤버들은 제작진보다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이런 걸 해보자며 앞다투어 아이디어들도 냈다. 멤버들이 갹출하여 만든 <무한도전> 연습실도 그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장르도 새롭게 개척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추격전이지요.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 특집이었는데요. 다들 검은 색 정장을 입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돈 300만원이 담긴 가방을 준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양상의 이야기가 펼쳐지더군요. 예컨대 늘 한 자리에 모여있던 멤버들이 서로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는 겁니다. 그게 2008년이었는데요. 이때만 해도 스마트폰 같은 게 없던 때라 각 멤버들을 따라다니던 작가나 조연출들이 제게 문자로 현장 상황들을 알려주는데 이걸 다 모아보니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그림이 나오는 겁니다."
이후 추격전은 <무한도전>만의, 또하나의 불패 장르로 자리 잡았다. 물론 실패 사례도 있다. 늘 성공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엄청난 사전 준비와 투자를 했음에도 폭망했던 ‘뱀파이어’ 특집이 대표적이다. 비행선에 카메라를 달고 무려 300명이 넘는 엑스트라도 동원했다. 이 엄청난 준비를 했음에도 방송 시작 28분 만에 전 멤버들이 ‘사망’했다. 게임 종료! 분노바이러스를 해결하려다 오히려 시청자들에게 분노바이러스를 전염시켰던 저주받은 특집이었다. 물론 엑스트라들과 제작스텝들에게 얘기해서 다시 한번 촬영하자 할 수도 있었을 터다. 하지만 김태호 PD는 알았다. 이 엑스트라 배우들이 집에 가는 순간 시청자가 된다는 걸 말이다. 결정은 명쾌했다. 다소간의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재촬영 없이 ‘리얼’이란 명분을 챙기자 라는 거였다. 이런 실패 아닌 실패들이 쌓여 지금의 <무한도전>은 한 발 한 발 ‘전설’에 가까워졌다.
오랜 기간 방송을 하다 보니 크고 작은 사건 사고도 많았다. 그런 논란이 생길 때마다 피하지 않았다. 각종 논란에 대해 방송에서 직접 언급하며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가장 중요한 건 반성 그 자체였다. 잘못이 있으면 최대한 빨리 드러내어 사과했다. 비바람 속 위태롭던 <무한도전> 호는 그렇게 위기 때마다 살아남았다.
90분의 강연이 끝났다. 차분한 어조로 <무한도전> 11년의 변화를 풀어준 김태호 PD를 통해 혁신이란 단어를 곱씹게 된다. 카메라와 자막, 편집 등의 하드웨어적 변화와 ‘클리셰 깨기’라는 소프트웨어적 변화, 이 모든 변화의 한 가운데 시청자가 있다. 출연진을 포함하여 100여 명의 스탭이 있음에도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역시 시청자다. 벌써 11년 관록의 <무한도전>이지만 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방송한다는 김태호 PD. 목요일이 정규 방송 녹화일임에도 싸워야 될 건 타 방송사 경쟁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이기에 제대로 된 기획이 안 나오면 하루 전날이라도 촬영을 취소한다는<무한도전> 팀. 어찌 보면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무한도전이자 무한혁신이다.
업종과 직종을 불문하고 모든게 격변하는, 그래서 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 <무한도전>의 11년은 변화혁신이란 화두와 관련하여 묵직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두 말이 필요 없다. ‘닥치고 혁신’할 일이다. ⓒ보통마케터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