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가이드 안병민의 통찰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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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5분혁신=안병민] 사물에 관하여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이나 논리적 난점. 또는 해결이 곤란한 문제.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나 관점에서 새로이 탐구하는 출발점이 됨.
‘아포리아(Aporia)’의 사전적 의미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상대를 아포리아에 빠뜨려 무지를 자각하게 했다, 식으로 활용된다.
강의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되었다. 침몰하는 배와 승객들을 버려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 배를 빠져 나오는 세월호 선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 사진과 함께 슬라이드에 들어있는 텍스트.
“선장이나 선원들이 더 (위급한 상황에 대한) 지식이 많으니,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실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도움을 준 어른은 없었다. 깨진 창문으로 바닷물이 급격히 차오르자 친구들끼리 도와 탈출할 수 있었다.”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는, 2014년 7월 28일 생존 학생들의 법정 증언이다.
“이게 바로 아포리아입니다. 길이 없다는 거지요. 해결책이 없다, 즉 도저히 손을 쓸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성찰을 해야 할까요? 그 대답으로 저는 여러분들께 인문학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인문학을 통해 작금의 총체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김상근 교수가 그 실마리로 내세운 개념은 ‘군주의 거울’이었다. 서구에서는 아포리아 시대에 봉착할 때 마다, 이런 위기를 다시 겪지 않도록, 또 이겨내기 위해서 미래 지도자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때 활용된 교육 텍스트가 바로 ‘군주의 거울’이다. ‘군주의 거울’은 지도자를 위한 인문학으로 각광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이 헤로도투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그리고 플라톤의 <국가>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요, 이 책들은 모두 그리스에서 나온 책들입니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유독 그리스에서 ‘군주의 거울’ 책들이 많이 나왔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아테네는 수많은 위기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위기들을 또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를 서구 문명의 시원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는 페르시아 전쟁이었다. BC 499~449년에 걸쳐 일어난 이 전쟁은 무려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압권은 페르시아의 3차 원정이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52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리스 인구가 15만 명이던 시절이었다.
“그들이 행진을 시작하자 지축이 흔들렸고, 그들이 물을 마시자 강물이 말라버렸다.”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헤로도투스가 전하는 기록이다. 헤로도투스는 스스로가 경험한 전쟁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어떻게 하면 이 전대미문의 아포리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성찰했다.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를 참지 못하고 다시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니, 이가 곧 스파르타 용사들의 장렬한 전사를 그려낸 영화 <300>으로 유명한 전투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페르시아를 향해 미소 짓지 않았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사기가 높아진 페르시아 군은 아르테미시온까지 뚫고 아테네로 진격하였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군에게 크게 패하고 만다.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는 그렇게 수습되었다. 천신만고 끝의 위기 탈출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아포리아가 곧 그리스를 덮쳤다.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이었다. 내전, 즉 스파르타와 아테네 세력이 맞부딪친 동족 상잔의 비극이었다.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분별없는 대담함이 용기로 받아들여지던 슬프고도 아픈 시절이었다. 전쟁은 종교적, 문화적 금기를 마음껏 훼손했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였다.
애초 시작은 아테네의 오만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지역 맹주로서 “아테네는 그리스 전체의 모범”이라 외치며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선을 넘은 아테네의 오만과 독선은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소용돌이치던 이웃나라들과의 역학 관계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 시기에 살면서 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또 관망했던 투키디데스가 조국 아테네의, 아니 그리스의 몰락을 엮어낸 역사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황금 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내가 여기에 쓰는 역사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역사의 반복 또는 적어도 반복에 가까운 것을 대비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글에서 충분한 도움을 얻을 것이다. 이는 대중의 찬사를 받고자 쓰는 문학이 아니라, 영원한 지식의 보고로 남기 위해 이루어진 사실의 집적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투키디데스의 말이다.
이십 년 정도 먼저 태어나 <역사>를 써낸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의 아버지’라는 영예는 빼앗겼을지언정, “오직 사실에 기초한 인간의 역사”의 선구자로서의 위치는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투키디데스의 자부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래서, 단지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리더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군주의 거울’로서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가치다.
그리고 세 번째 아포리아. 30인의 참주와 소크라테스의 죽음. BC 399년의 일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는 민주정치가 폐지되고 스파르타의 후견 하에 30명의 참주가 이끄는 과두정치가 수립되었다. 폭압과 폭정이 난무하는 공포의 시절이었다. 민주파와 과두파의 싸움에서 민주파가 정권을 다시 잡지만, 여기에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겹쳐진다.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를 주장했던 소크라테스를, 정권은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소크라테스가 불경죄로 사약을 받아야 했던 이유다. 그리스의 총체적 난국이었다.
페르시아의 침략,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내전, 그리고 총체적 위기 상황. 그리스가 겪었던 세 번의 아포리아는 우리의 그것과 놀랄 만치 닮아있다. 일본의 침략, 북한군의 남침에 의한 한국전쟁, 그리고 지금의 위기 상황. 그리스의 위기 극복에 큰 역할을 했던 ‘군주의 거울’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그래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하면 다들 플라톤을 떠올린다. 사실 중요한 인물이 하나 더 있다. 크세노폰이다. 크세노폰은 철학자라기보다는 역사가에 가깝다. 우리가 그리스를 ‘철학’의 관점으로 배우다 보니 크세노폰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남긴 <키루스의 교육>이란 책이 바로 그리스의 마지막 ‘군주의 거울’이었다. 이 책을 읽은 피터 드러커가 “리더십에 대한 최초이자 최고의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말했다니, 오늘의 리더들에게도 울림이 크다는 얘기.
크세노폰은 플라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특별한 제자 중 하나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왕위 계승 싸움에 용병으로 참전하여 페르시아 내지로 들어갔다. 그의 역할은 참모와 기록이었다. 하지만 BC 401년 9월, 쿠낙사 전쟁의 참패로 페르시아 군대는 궤멸되고, 그리스 용병들은 고립무원에 빠진다. 무리의 리더가 되어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크세노폰은 스파르타의 왕을 만나 협상을 통해 그리스로 탈출한다. 이 과정을 기록한 책이 바로 <아나바시스>다.
“군사들은 혹독한 추위 때문에 눈이 멀거나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썩어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더 이상의 행군을 거부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크세노폰은 뒤처지지 말라고 애걸복걸하고, 적이 우리를 추적하고 있다고 겁도 줘보고, 화도 내 보았다. 그러나 군사들은 더 이상 행군할 수 없으니, 자기들을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패배와 탈출의 모습을 크세노폰은 이렇게 기록했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온 크세노폰을 아테네는 추방한다. 스파르타와 내통했다는 이유였다. 크세노폰은 할 수 없이 스파르타의 세력권이었던 올림피아로 가서 평생 글을 쓰며 여생을 보낸다. 이 때 <키로파에디아-키루스의 교육>, <헬레니카> 등 크세노폰의 역작들이 세상 빛을 보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서로 경쟁 관계였다. AD 3세기 무렵 나온 책 <철학자 열전>은 그들의 관계를 이렇게 전한다.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서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경쟁 상대처럼 같은 주제의 책, 즉 <향연>,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 회상록> 등을 썼다. 플라톤은 <국가>를 썼는데,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을 썼다. 크세노폰은 플라톤을 반박하기 위해 책을 썼다.”
두 사람의 차이는 작으면서도 컸다. 플라톤은 ‘사유’했고, 크세노폰은 ‘행동’했다. 플라톤은 ‘숙고하는 삶’을 강조했고, 크세노폰은 ‘활동하는 삶’을 역설했다. 실제 크세노폰은 수많은 전쟁에 참가하여 피와 땀과 눈물로 그 모든 걸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기록했다. 잉크로 책을 쓴 플라톤에 비해 크세노폰은 땀과 피로 책을 썼다고 회자되는 배경이다.
‘군주의 거울’로서의 책 <키루스의 교육>. 문득 생겨나는 의문 하나. 크세노폰은 왜 조국 아테네가 아닌, 적국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 대한 책을 썼을까?
키루스(재위 : B.C. 559~B.C. 529)는 페르시아 제국의 실질적 설립자로 세계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이다. 그는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 지역 전체를 지배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가 다져진 시기다. 그럼에도 그는 냉혹한 독재의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는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였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 정책을 씀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열었던 진정한 리더였다.
크세노폰은 여기에 주목했다. 어떻게 그 작은 나라가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을까, 하는 것 말이다. 그걸 통해 ‘조국 아테네가 어떻게 하면 이 아포리아를 이겨내고 다시 성장할 수 있을까’를 찾아내려 한 거다. 핵심은 키루스 대왕의 리더십이었다. 크세노폰은 책에서 이를 이렇게 기술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키루스에게 복종했다. 그들은 몇 달씩이나 걸리는 먼 곳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키루스를 한 번도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키루스의 백성이 되길 원했다.”
대단한 리더십이다.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 적국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키루스 대왕의 백성이 되길 원했다니, 그것도 규정, 감시, 통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거기에 키루스 대왕을 키운 그 부모님의 교육이 있었다. 도대체 어떤 교육이 있었던 걸까? 어떻게 그는 이런 리더십을 갖게 되었을까?
키루스는 13살 때 엄마를 따라 외할아버지의 나라 메디아를 방문한다. 페르시아에서 볼 수 없었던 좋은 말과 그 말들을 달릴 수 있는 넓은 평원을 보고 키루스는 메디아에 남아 말 타는 걸 배우겠다 어머니에게 청한다. 이에 어머니는 묻는다. “그럼 정의는 어디서 배울 것이냐?” 역사적인 리더를 키워낸, 현명한 어머니의 위대한 질문이다. 키루스는 대답한다. 정의는 이미 배웠다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여기 그 모자간의 대화를 옮겨왔다.
“어머니, 저는 이미 정의를 선생님으로부터 다 배웠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지요. 제 선생님은 제가 정의를 다 배운 것으로 알고, 제게 재판을 맡기셨습니다. 사건은 이랬습니다. 덩치가 큰 소년이, 하루는 몸집이 작은 소년이 큰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마침 자기 옷이 너무 작아서, 몸집이 작은 소년의 옷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는 소년의 큰 옷은 자기가 입고, 소년에게는 자기가 입던 작은 옷을 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두 사람 다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게 되었으니 무죄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제 판결을 들으시고는 저를 호되게 나무라셨습니다. 제가 정의를 어겼기 때문에 매질을 당해야 한다 하시면서 절 때리셨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누구에게 옷이 잘 맞는가를 판단하라고 했다면 그 판결은 정당하다. 그러나 네 의무는 그것이 누구의 옷인가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를 판결하라고 한 것이니, 너는 정의를 어긴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 키루스야, 너는 그 선생님의 매질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
“법에 근거하는 것이 옳고, 법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판결로 정의를 내리는 사람은 언제나 법에 근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아들아, 페르시아의 왕인 네 아버지가 따르는 기준 역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법이란다. 네가 만약 메디아에서 폭정의 원칙을 배워 온다면, 반드시 죽을 만큼 매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플라톤은 <국가>란 책에서 통치자는 지혜를, 수호자는 용기를, 시민은 절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게 정의라 했다. 플라톤의 이런 주장을 크세노폰은 반박한다. 지혜를 가진 통치자가 사악하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게 법이다. 결과적으로 각자 사이즈가 맞는 옷을 입게 되었다고 정의가 실현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관건은 법이라는 기준이다.
조직구성원들에게도 그 때 그 때의 기분과 감정이 아니라 기준과 규칙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는 건 그래서다. 모자간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키루스의 교육, 그 첫 번째는 이렇듯 바로 정의다.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법에 의거한 공정한 정의 말이다.
키루스가 20살 때 아르메니아 전쟁이 발발한다. 왕인 아버지는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며 아들에게 묻는다. “부하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어떻게 얻을 것이냐?” 어머니에 이어 키루스 대왕의 리더십을 키워낸, 아버지의 위대한 질문이다.
“충성하는 자에겐 명예를, 그렇지 않은 자들에겐 처벌과 불명예를 주는 겁니다”라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가 말한다.
“그건 강제적 충성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작은 나라는 몰라도 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다. 충성에 이르게 하는 더 빠르고 좋은 길이 있지. 즉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그들과 함께 슬퍼하라. 그들이 고통 받고 있으면 도우려고 노력하고, 그들에게 안 좋은 일이 닥치지는 않을지 항상 염려해야 하며, 실제로 닥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너는 그들과 동행해야 한다.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까지 공유해라.”
리더십에는 로고스와 에토스, 파토스에 의한 리더십이 있다. ‘로고스 리더십’은 이성과 합리적 사유에 근거한 리더십이다. 왜 이래야 하는지 논리를 개진한다. 하지만 이건 하수의 리더십이다. 중수는 ‘에토스 리더십’을 구사한다. 열정과 에너지에 의한 리더십이다. 하지만 최고의 경지는 ‘파토스 리더십’이다. 총기 난사 사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도사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분노와 증오가 가득하던 그 참혹한 현장을 순식간에 화합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던 오바마를 떠올리면 쉽다. 바로 동행과 공감의 리더십이다.
“그대가 산에서 달리는 데 익숙하다고 해서, 군사들도 달리도록 하지 마시오. 대신 약간 빠르게만 이끄시오. 그래야만 군사들이 쉽게 따라갈 것이오.”
아르메니아 전투를 앞두고 키루스 대왕이 지휘관들에게 내린 명령에서도 이렇게 동행의 리더십이 엿보인다.
“페르시아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와 같은 땅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여러분의 용기는 우리보다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와 같은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계를 책임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여러분들에게 귀족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지급할 것입니다.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워 적을 무찌르면, 여러분도 우리와 같은 몫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활과 창을 다루는 기술이 우리와 같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우리처럼 군사 기술을 연마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보려는 의지가 있고 가장 용감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가장 큰 보상을 받는다면 우리들의 용기가 한층 더 높아질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균등한 보상을 받기 때문에 겁쟁이도 다른 사람과 같은 보상을 받게 된다면 우리들의 용기는 소멸할 것입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키루스의 교육> 2권 중 한 대목이다. 전쟁에 나가며 키루스가 일반 사병들 앞에서 했던 연설. “너희들은 생계 문제로 특권을 누리지 못했던 걸 잘 안다, 그러니 귀족들과 같은 무기를 줄 테니 공을 세우면 공정한 보상을 해주겠다”라는 이야기다. 페르시아의 일반 군사들에게 귀족들과 경쟁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공정한 “심판관” 역할을 수행하겠다 공언한 거다. 리더는 이래야 한다. 공정한 심판관으로서의, 리더의 자세이자 역할이다.
전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키루스는 전통적 이론과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늘 새로운 전투 방식을 모색했다. 싸움의 장소에 따라 전투 방법도 바꾸었다. 넓은 벌판에서는 지금껏 해오던, 대오를 맞추어 행진하던 방식의 전투가 답이 아님을 키루스는 깨달았다. 키루스는 부대를 작게 나누어 백병 능력을 키웠다. 대규모로 대오를 유지하며 진군하던 적군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움직이던 키루스 군대를 이길 수가 없었다.
또 하나의 혁신은 전차다. 전차는 기병에 비해 기동성이 크게 떨어지고 지형 제약이 많았다. 전차의 약점이었다. 키루스는 이런 전차에 혁신의 날을 단다. 인적 효율성과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키루스는 이전보다 크고 무거운 전차를 고안한다. 전차병에게 갑옷을 입히고 전차 바퀴에 창날을, 몸체에는 낫을 달았다. 전차바퀴에 달린 창날로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되므로 살상력은 높아지고 방호력도 높아져서 운전병을 보호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단순 운전병은 전투병이 됐고, 키루스 부대의 파괴력은 배가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 2천년 앞서 키루스는 낫이 달린 마차를 개발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말이 낙타 냄새가 싫어 낙타를 피하는 걸 보고 최초의 낙타부대를 만든 것도 키루스였다. 상황 변화에 따른 신속한 작전 변화. 이는 기업 경영에 있어 핵심화두인 변화혁신 개념과 맞닿아 있다. 키루스, 그는 변화의 리더고 혁신의 리더였던 셈이다.
어머니로부터 정의, 아버지로부터 동행의 리더십을 배운 크루스에게 그의 아버지는 또 하나의 가르침을 선물한다.
“아들아, 위대하다고 칭송을 받던 사람이, 바로 그렇게 떠받들던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더냐?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이 나라를 설득해서 전쟁을 시작했지만, 도리어 공격했던 그 나라에 의해 멸망 당한 사례가 얼마나 많더냐? 상대방을 친구로 대하고, 그들과 호의를 주고 받던 사람이, 어느 날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도 또 얼마나 많더냐? 아들아, 결국 인간의 지혜는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인생이란 무엇이 나올지 모르면서 뽑는 제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거라.”
리더는 이런 아픔과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리더로서의 네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아버지의 조언이다. 이런 가르침을 받아서일까, 나중에 시간이 흘러 키루스가 자신의 왕위를 장남 캄비세스에게 물려주며 남긴 유언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내가 아직 왕위에 있을 때 물려주는 이 왕위를 신의 선물로 받아들여라. 하지만 너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힘든 일에 집중해야 하고, 여러 가지 걱정거리에 괴로워하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내가 했던 것과 같은 경쟁에 시달리고, 계략을 꾸미고, 또 계략을 찾아내는 왕의 일이, 결국 너의 행복을 방해할 것이다.”
이게 군주이자 리더의 사명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고 사형 집행을 앞둔 안중근 의사에게 그 어머니가 보냈던 편지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여기 그 내용을 옮긴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어미는 현세에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 편지 어디에도 모자간의 사사로운 감정은 들어가 있지 않다. 나라를 위해 거사를 치른 리더로서의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라는 어머니의 편지다. 그래서 이 편지는 우리의 영혼에 울림을 준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이상, 크세노폰과 크세노폰이 남긴 <키로파에디아-키루스의 교육>이란 책을 중심으로 키루스 대왕의 리더십에 대해 살펴보았다.
결국 우리가 지금 직면해있는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로서 키루스의 리더십을 곱씹어보면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법에 의한 통치다. 리더는 개인적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법을 근거로 판단을 해야 한다. 두 번째는 동행의 리더십이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솔선수범의 자세로 팔로워들을 대해야 한다. 다음은 공정한 기회와 보상이다. 일반 사병들에게 장교의 칼을 쥐어주었던 키루스를 기억하라. 네 번째로는 상황에 따른 전략의 변화, 즉 변화에 맞춤하는 혁신을 빚어내는 리더의 모습이다. 마지막은 자신의 행복마저 포기할 수 있는, 선공후사의 자세다. 크세노폰과 키루스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리더십이다.
국민을 위해 진정으로 봉사(?)할 기회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내가 가져야만 한다는 이유로 증오와 분노의 총부리를 서로 들이대는, 리더 아닌 리더들이 설쳐대는 작금의 현실 또한 영락없는 아포리아다.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필독해야 할 책이지만 그 무게에 대한 감내 없이 왕관만 탐하는 사이비 리더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 <키루스의 교육>이다. ⓒ혁신가이드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헬싱키경제대학교(HSE) MBA를 마쳤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의 마케팅본부를 거쳐 경영직무·리더십 교육회사 휴넷의 마케팅 이사(CMO)로서 ‘고객행복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이자 [방구석5분혁신](bit.ly/5booninno)의 혁신크리에이터로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 리스타트>, <경영 일탈>, <그래서 캐주얼>, <숨은 혁신 찾기>, <사장을 위한 노자>,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실재화하는 혁신의 과정"이라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