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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스케치 026] 숙제가 아니라 출제를!

안병민의 [통찰을 스케치하다]

안경을 끼고 연단에 선 최재천 교수. 인상이 참 맑다. 그는 ‘스키너의 쥐’와 ‘쾰러의 침팬지’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했다. 결코 침팬지의 수준이 될 수 없는 쥐 이야기로 그는 통찰력이란 게 선천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후천적 능력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쥐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이 침팬지처럼 도구들을 이용한 지적 활동을 보여줄 수 없는 것처럼 통찰력 또한 어느 정도는 타고 태어나야 합니다. 물론 노력을 통해 키워나갈 수도 있지요. 일정 부분 타고 태어나면서 또 한편으로 연구나 독서, 토론 등을 통해 길러나갈 수도 있는 게 통찰력입니다.”

다행이다. 통찰력이란 게 오롯이 타고 태어나는 거라고 말했다면 내게는 참으로 암담한 일이었을 터. 


“지난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를 기억하시나요? 왜 그런 금융위기가 생긴 걸까요?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분석을 하고 연구들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탐욕이 불러 일으킨 재앙이었답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지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금융위기의 원인이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인가?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해도 된다는 건가? 혼란스럽다. 가벼운 두통이 몰려온다. 


최재천 교수의 설명. 

“경제학이 뭡니까? ‘인간은 가장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학문이 경제학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라뇨? 적어도 경제학자들은 이런 분석을 내놓아서는 안 되는 거죠.” 


듣고 보니 그렇다. 하지만 현실 속의 인간이란 존재가 어디 합리적이기만 하던가. 재래 시장에선 콩나물 사며 100원, 200원을 깎으면서도 공정무역 커피를 사 마실 때는 다른 브랜드보다 가격이 더 비싸더라도 흔쾌히 지갑을 여는 게 인간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인간이란 존재.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대니얼 카너먼이라는 사람인데요. 놀랍게도 심리학자입니다. 최근 “생각에 관한 생각”이란 책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계적 학자이지요.” 


헉,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심리학자라니? 결코 합리적일 수만은 없는 경제 주체인 인간. 이제 경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성과 심리를 꿰뚫어 봐야 하며, 대니얼 카너먼의 경제학상 수상도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소위 경제학(Eco-nomics)과 생태학(Eco-logy)의 접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이런 경제학과 생태학의 만남은, 인간을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입자로 간주하던 ‘뉴턴 경제학’의 시대가 저물고 개인의 행동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다윈 경제학’의 세상이 왔음을 알려주는 신호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진화경제학’이고 ‘행동경제학’이다. 실제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 등 세계 유수 대학에서의 경제학 연구 흐름도 이렇게 바뀌어 가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아직 깜깜무소식이다. 대한민국 경제학의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라며 이야기하는 최재천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기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하나 있습니다. 쇼핑 몰에서 갭 청바지를 하나 사오는 미션을 남자와 여자에게 줬는데요. 그 남녀 차이에 대한 결과 분석 자료입니다. 남자는 단 6분만에 미션을 완수한 반면 여자는 3시간 26분이나 걸렸습니다. 그 뿐인가요? 남자가 쓴 돈은 33달러인데 반해 여자는 무려 876달러를 썼지요.” 


여기저기서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많이들 체험한 진실이라서 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확연히 다른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과연 뭘까? 먼 옛날 수렵 시절, 허탕치기 일쑤인 남자들의 사냥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곤란함을 느낀 여자들은 주변의 열매들을 채집함으로써 식구들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열매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했다. 이런 성향이 지금까지 남아 이렇게 남녀의 쇼핑 행태 차이를 보이는 거란다. 그러니 목적 지향적인 남성의 쇼핑 행태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할 수 밖에. 자, 하지만 이러한 실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건 이 포인트다. 이런 남녀 차이를 알고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거랑 모르고 하는 거랑의 차이. 그렇다.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진화심리학과 마케팅의 만남이 빚어내는 시너지의 현장이다.


“뇌과학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의 뇌를 촬영해서 어떤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뇌를 살펴보니, 뇌라는 게 특정 자극에 대해 종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라 모듈 별로 나뉘어 각 부위마다 다른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이런 뇌과학, 인지과학 분야의 학문들이 이제 경제학과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경제학은 이렇게 한발한발 ‘과학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경제과학’, ‘경영과학’이란 말들이 그래서 이젠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생태학이라는 것도 자연생태계의 안정성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분야인데, 외부의 충격에 살아남기 위한 기업 경영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자연생태학에서 주목하고 있는 생태계의 ‘저항력’과 ‘회복력’ 개념에 대한 스터디가 경영경제학에서도 필요한 이유다. 


“자, 이제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지요. 전 미국에서 오래 생활을 했는데, 제가 유학하던 시절만 해도 당시 한국은 정말 못 사는 나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요? 정말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지요. 우리나라 차들이 세계 각국을 누비고 다닙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스마트폰도 그렇고요. 전자, 조선, 철강 등 우리가 1등하는 분야가 한 둘이 아닙니다. 정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말투가 심상찮다. 저절로 다음 이어질 말에 귀를 더 기울이게 된다. 


“맞습니다. 이제 이 정도 숙제들은 반에서 1, 2등 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요. 이 숙제들은 누가 내준 건가요? 누가 내 준지도 모르는 이 숙제들을 우리는 들입다 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숙제가 아닙니다. ‘출제’지요.” 


아, 한 방 제대로 맞았다. 숙제가 아니라 출제. 그렇다. 우리 대한민국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나라를 본 적이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열심히 일한다. 다 이 숙제를 잘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렇게 숙제를 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출제’하는 기업들이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애플이다. 애플이 만든 모바일 세상. 애플은 스마트폰을 만든 게 아니라 세상을 모바일로 집어넣었다. 삶의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꾼 ‘출제’다. 그렇게 애플이 출제한 문제를 풀기 위해 수많은 기업들이 열심히 숙제를 하고 있는 거라는 최 교수의 설명. 최 교수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숙제가 아니라 출제!


“아까 경제학 말씀도 드렸지만 우리는 너무나 비슷한 공부들만 하면서 너무나 비슷한 인재들을 양산해 내고 있습니다. 이제 필요한 건 그런 숙제 잘 하는 인재들이 아니라 문제를 출제할 수 있는 창의적 인재입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그런 사람들은 결코 모범생이 아니었습니다. 싸이도 마찬가지지요. 이제 세상을 좀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합니다. 넘나 들어야죠. 이런 게 바로 통섭입니다.” 

통섭에 대한 이해의 폭이 벌써 한 뼘은 더 커진 거 같다. 


최재천 교수의 조근조근한 강의도 어느 새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면서 보여주는 슬라이드엔 아리스토텔레스, 다빈치, 박지원, 정약용, 네 사람의 이름이 씌어있다. 

“자,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이 뭘까요? 맞습니다. 소위 ‘통섭’의 대가들이지요. 그런데요. 냉정하게 보자면 이 분들이 후세에 남긴 그 대단한 업적들은 그 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 시절엔 ‘넓고 얕게’가 통했지요. 그런데 요즘은 안 됩니다. 그 동안 우리 인류가 쌓아 온 지식이 너무나 방대해졌기에 이젠 전문화를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좁고 깊게’ 파야 되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우물을 파더라도 깊게 파려면 넓게 파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럼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이 방대한 학문 분야들을 넓게 파라니. 그것도 깊게 파기 위해서. 답답한 노릇이다. 그런데 답은 바로 ‘통섭’에 있단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이제 여럿이 해야 한다는 게 최재천 교수의 처방이다.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경제경영 분야에 대한 문제점 해결도 생태학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듯이 이제 현대의 문제들은 어느 누군가, 혹은 어느 특정 분야에서 혼자 다 해결할 수 없으니 같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런 ‘통섭’이 바로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라는 최재천 교수의 말이었다.


“왜 우리가 잘 할 수 있냐고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비빔밥 아시죠? 비빔밥이란 게 뭔가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나물과 야채, 그리고 쇠고기에 달걀까지 풀어 넣어 고추장에 참기름 쳐서 쓱쓱 비비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맛이 납니다. 외국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요. 어떻게 이렇게 맛있고 건강한 웰빙 식품을 만들어 먹게 되었냐고 아주 난리입니다. 그런데 뭐 비결이 있나요? 그냥 남은 밥과 반찬들 처리하려고 그랬던 거지요 (웃음). 그런데 이게 바로 ‘통섭’의 메커니즘입니다. 굳이 비빔밥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 한국인의 밥상은 ‘통섭’의 시스템으로 운영됩니다. 먹어야 할 단일 아이템이 하나의 접시에 담겨 나오는 단순한 서양의 식탁과 달리 우리 한국의 식탁에는 다양한 반찬들이 동시간대에 올라옵니다. 밥 한 숟갈과 같이 먹을 반찬들의 다양한 조합의 수. 네, 그렇지요. 우리에게는 섞음의 재능이 있습니다. 타고 태어난 거지요.” 


결코 우스개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수렵시대의 DNA가 오늘날 쇼핑 행태에서의 남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나. 이웃나라 일본만 봐도 그렇다. 이른바 ‘매뉴얼 사회’로 불리면서 매뉴얼에 없다면 쉽게 돌아 앉지도 못하고 한 자세로만 앉아 있는 일본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마구 섞고 마구 바꾼다. 우리는 ‘통섭’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작금의 융합, 복합의 시대가 우리 한국엔 기회인 이유다. 하지만 ‘다이내믹 코리아’의 앞길이, 그래서 탄탄대로이기만 할까? 


“어떻게 보면 우리에겐 정말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지금처럼 똑같은 교육을 받으며 도토리 키재기식의 경쟁 시스템으로는 숙제만 아니라 출제를 하는 인재를 키워낼 수 없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통섭형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서는 안 되지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겁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윈의 자연선택론도 철저하게 상대적인 겁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더 ‘통섭’을 잘 한다면 우리가 살아남는 겁니다.” 


강의의 말미, 우리나라가 더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한 처방으로 ‘통섭’을 역설하는 최 교수의 말투에서 절실함이 느껴졌다.


그래, 담을 낮추어야겠다. 서로가 행복하게 넘나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다고 담을 아예 없애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기에 담은 있어야 한다. 다만 그 담을 지금보다는 훨씬 낮추어 좋은 이웃들과 행복한 만남을 가꾸어 나가자는 것, 그래야 융복합의 하이브리드 세상에서 지적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게 오늘 최재천 교수 강의의 골자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과학자가 되었다는 최재천 교수. 그래서일까. 평소 고등학교의 이과, 문과 구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그의 오늘 강의에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경계가 없었다. 경제를 이야기하다 어느 샌가 자연을 이야기하고 그러다 또 역사를 말하고 있는 그를 따라 바쁘게 뛰어다닌 그와의 90분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천의무봉의 지적 여행이었다. 이렇게 최재천 교수는 내게 또 하나의 문제를 출제하고 갔지만 이번 숙제는 평소와 달리 즐겁게 할 수 있을 거 같다. 강의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그래서 경쾌하다. ⓒ보통마케터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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