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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스케치 031]‘그냥 보기’ 말고 ‘들여다 보기’

안병민의 [통찰을 스케치하다]

박웅현. 그는 원래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였다. 지금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 불린다. 임원급 대우를 받고 있기에 이그제큐티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ECD)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수많은 히트 광고 캠페인을 만들었던 그는 요즘 인문학에 대한 책을 쓰며 사람들의 관심을 ‘사람’에게로 돌리고 있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하면 창의력이 쑥쑥 자라나요? 아마도 그가 광고회사에서 이른바 창의력의 아이콘이라고 하는 광고들을 쑥쑥 만들어 내고 있기에 그런 것이리라. 오늘 강의의 주제는 바로 그거다, 창의력. 성질 급한 독자들을 위해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박웅현 ECD는 그 답으로 ‘발견의 힘’을 꼽는다. 박웅현 ECD가 이야기하는 발견의 미학, 그 속으로 들어가본다.


잘 자, 내 꿈 꿔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에 도전한다 / 사람을 향합니다 /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 See the Unseen / 생각이 에너지다 / 진심이 짓는다

                                                  
아주 낯익은 광고 카피들이다. 이른바 우리 사회에 나름 반향을 일으켰던 히트 광고들. 이 광고들의 공통점은 바로 박웅현 ECD의 작품이라는 것. 하나 제대로 만들어내기도 힘들다는 히트 캠페인을 이렇게나 줄줄이사탕처럼 만들어 낸 사람. 바로 박웅현이다. 아니나다를까. 옷차림부터 예사롭지 않다. 청바지에 걸친 셔츠와 자켓, 그리고 머리 위에 자리 잡은 중절모가 빚어내는 분위기가 물 흐르듯 자유롭다.


박웅현. 그는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란 저서로 창의력이란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던졌다. 이른바 ‘발견의 힘’이다. 오늘 아침, 강의를 여는 그의 화두 역시 바로 ‘볼 견(見)’자였다. 


“제 인생 최고의 단어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글자, ‘볼 견(見)’자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그다지 창의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근데 광고라는 걸 계속 만들다 보니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더군요. 창의력이란 게 뭔지, 어떻게 하면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지 말이죠. 뭐라고 답을 해야 될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겸손일까? 이어질 그의 말이 궁금해졌다. 


“세계 유수의 대학들에 왜 창의력 학과란 게 없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창의력이란 건 그런 거였습니다. 규격화가 안 되는 거죠. 하나의 공식으로 완성되는 순간, 창의력의 본질적인 가치는 사라져 버립니다. 창의력은, 그런 면에서 보자면 개인의 기본기, 즉 실력에다 순간순간의 현재 적응력이 더해진 개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끄덕끄덕. 수학처럼 창의력에 대한 공식이 있다면 그게 무슨 창의겠는가. 아이디어라는 게 수학 공식처럼 달달 외워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잖은가?


그러면서 박웅현 CD는 자신이 만든 수 많은 광고 캠페인의 아이디어, 그 창의력의 결과물들을 오롯이 ‘보다’라는 개념의 공으로 돌렸다. “내가 창의력이 뛰어나서 이런 광고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내 주변 모든 것들을 관심을 갖고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라는 그의 설명. 어슴푸레하나마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고등학생 딸이랑 미국 여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깊은 밤, 어느 이름 모를 휴게소 가게에 들렀는데, 인상이 아주 험악한 주인이 우릴 맞더군요. 덜컥 겁이 났지만 용기를 내어 피자를 하나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밑바닥이 새까맣게 탄 피자가 나왔었지요. 우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못 하고 도망쳐 나오듯이 그 가게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요. 그 때 그 여행을 되돌아보면 제일 기억에 남는 게 이 장면입니다. 아름다운 경치들, 유서 깊은 건물들이 아니라 바로 이 새까맣게 탄 피자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자주 여행을 다니곤 했지만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거창한 의미와 근사한 풍경이 아니라 생활 속 사소한 일들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무 것인 게 삶이더라’라는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참이다. 삶이란 것도 자세히 보면 우리네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합. 누가 빠른지 경쟁하듯 질주하는 레이스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레이스에서의 승리를 위해 많은 것들을 유보하며 산다. 심지어는 우리의 행복까지도. 나중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유보하며 사는 모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다. 행복하려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발상도 똑같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걸 잘 챙겨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냥 무관심하게 본 게 아니라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공을 들여 본 거죠. 그러니 새로운 게 보이더군요. 여러분들, 아이가 넘어져 있으면 어떻게 하세요? 일으켜 세우죠. 아는 아이인가요? 아니죠. 그럼 잘 알지도 못 하는 아이를 우리는 왜 일으켜 세웠을까요? 바로 이 광고는 그런 장면을 다시 들여다 보았기에 만들어진 광고입니다.” 


Let it be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쓰러진 아이를 일으켜 주고, 날아가는 풍선을 잡아주고, 쏟아진 과일을 주워담아 주고, 넘어진 자전거와 사람을 위해 가던 길을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차례대로 화면에 나타난다.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사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감동이다. 그러면서 나오는 마지막 카피. ‘사람 속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모 이동통신사의 광고다. 우리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박웅현 ECD는 생활 속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다시 보며 발견했다. 이 광고는 그 ‘발견의 힘’이 만든 광고다.


“우리 주변의 삶만 잘 들여다 보아도 이렇게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다음 순서는 책입니다. 예전 언젠가 읽었던 책에 세잔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나는 한 알의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리라’ 했던 세잔의 말이 그때 제 머리 속에 콱 박혔지요. 인물화, 풍경화가 대세이던 그 시절, 세잔은 사과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정물화에 매진함으로써 미술사에 길이 남을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내지요. 그가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이유입니다. ‘나는 한 알의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리라.’ 책에서 읽었던 그 말 한 마디가 제 머리 속에 잠복해 있다가 어느 날 다시 껍질을 깨고 나옵니다. 제가 그 책을 다시 들여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빛을 보게 된 광고가 바로 이겁니다. 생각이 에너지다!”


내 주변 삶에 다시 돋보기와 현미경을 들이대고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읽었던 책, 내가 들었던 음악, 내가 보았던 그림과 조각 등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들여다 보는 것. 창의력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이렇듯 바로 내 앞에서 ‘나를 발견해달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무심히 보고 넘어 갔을 뿐. 시이불견 청이불문 (視而不見 聽而不聞)이라 했던가. 보되 보지 못하고 듣되 듣지 못 한 것이다. ‘시청’과 ‘견문’의 차이다. 우리는 TV를 ‘시청’하지 ‘견문’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행을 가는 이유가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지 단순히 ‘시청’하러 가는 게 아닌 것처럼. 


“자, 여기서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요즘은 집단지성이란 말이 화두인데요. 창의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이란 게 얼마나 클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제 경험들과 제가 읽었던 책들을 벗어나 주변 사람들까지도 깊숙이 들여다 보는 이유입니다.” 


박웅현 ECD의 말을 듣다 보니 주변 모든 것들이 아이디어의 파편이다. 아이디어는 도처에 널려 있다. 그 파편들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 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내가 있을 뿐. 재미가 있었다면 ‘재미있네’로 끝나지 말고 ‘왜 재미가 있었을까?’ 다시 한번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재미를 만들어 내는 메커니즘이 보인다. 사람들과의 대화나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다. 


박 ECD의 이어지는 이야기. 어느 날 한 후배의 책상 위에서 북극곰이 나무를 심고 있는 그림을 발견했단다. 그리고 또 다른 어느 카피라이터 후배의 글. ‘북극 곰이 털을 밀 수도 없고 펭귄이 피서를 갈 수도 없고.’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이 글과 그림의 파편들에 박 ECD는 주목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공들여 쳐다보았다. 그 조각들을 가지고 그는 지구온난화에 경종을 울리는 캠페인 광고를 하나 근사하게 만들었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단다. 아이디어라는 건 초기에는 아주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고. 애정을 가지고 그 아이디어를 들여다 보고 지켜봐 주는 과정이 필요하단 이야기. 박웅현 ECD도 후배들의 덜 익은 아이디어들을 무심히 흘려버리지 않고 애정과 관심으로 들여다 보고 물을 주며 정성껏 키웠다. 박웅현 ECD가 이야기하는 창의력의 ‘집단지성 버전’인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후배들의 덜 익은 아이디어들을 잘 가꾸어 생명으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상사의 역할이다. 아이디어 열 개씩 갖고 오라며 재촉하는 상사는 제대로 된 상사가 아니다. 아이디어는 벽돌이 아니다. ‘들여다 봄’이라는 과정이 만들어 내는 정성과 사랑의 화학적 결과물이다. 


지인을 따라 낚시터에 간 적이 있다. 내가 못 잡는다고 물고기가 없는 건 아니다. 고수는 순간의 감각으로 물고기를 낚아채 올린다. 하수는 그 장면을 멀뚱하니 지켜만 볼 뿐이다.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다. 한 시간의 회의 속에서 누구는 아이디어를 건져 올리고 누구는 허망하게 시간만 보낸다. 내 촉수만 예민하다면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부디 후배들에게 내리치던 채찍질을 거두고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그의 ‘주변 사람 들여다보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파트 광고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저희 회사에서 일했던 대학생 인턴의 이야기입니다. 아파트 광고를 만들던 때인데요. 대학생은 아파트의 구매층이 아니기에 더욱이나 귀담아 들을 이유가 없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그 인턴의 말 한 마디가 대한민국 아파트 광고의 전형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기존 아파트 광고에 대한 그 인턴의 말은, 요지인 즉 이랬다. 

“저는 아파트 광고가 싫어요. 진정성이 없잖아요. 집에서 누가 저런 롱 드레스 입고 파티를 합니까? 그리고 저 광고에 나오는 저 연예인요. 실제로는 저 아파트에 살지도 않는대요.” 


이 말은 들은 박웅현 ECD의 창의적 촉수가 또 마구 작동하기 시작했다.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정말 아파트 광고들이 다 왜 이래? 우아한 상류층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과연 현실적인가? 기존의 아파트 광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의 과정을 통해 나온 게 바로 ‘진심이 짓는다’ 아파트 광고 시리즈다.  톱스타가 나오지만 그 아파트에 살지 않고 유럽의 성이 나오지만 우리의 주소지는 대한민국. 아파트 시세 때문에 그러리라 이해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뭘까. 우리는 그게 진심이라 생각한다, 이런 흐름으로 이어지는 광고다. 아파트는 전통적으로 광고 탄력도가 낮은 상품이다. 광고 잘 만들었다고 당장 하나 사서 끓여 먹을 수 있는 라면 같은 아이템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이 광고는 많은 걸 바꾸어 놓았다. 대한민국 아파트 광고 속에 즐비했던 톱스타 모델들이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우아한 라이프트타일만 보여주던 그 때깔 좋은 화면도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광고인으로서의 박웅현 ECD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세상 모든 것이 아이디어다. 일상을 다시 들여다 볼 때 우리의 삶은 그대로 창의력의 현장이다. 이는 비단 광고 제작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의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에서 시 작법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는 보는 거라고. 우리는 사과를 본 적이 있는가? 물론 있다. 하지만 시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사과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도 쳐다보고, 저 방향으로도 바라보고, 그 그림자까지도 챙겨보는 걸 말한다. 확신컨대, 우리는 보되 보지 못 했다. 중국에서는 시인을 ‘견자(見者)’, 즉 보는 사람이라 했다. 앙드레 지드가 시인의 재능이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것’이라고 얘기한 이유다. 창의적이려면 우리는 자두를 보고, 수박을 보고, 사과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알아야 한다. 오죽하면 소설가 김훈은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라 했을까. 창의력은 그렇게 새로운 발견에 의해 스필오버(spillover, 흘러넘치는 것)가 돼야 나오는 것이지 스퀴즈아웃(squeeze out, 억지로 짜는 것)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간장게장 좋아하시지요? 홈쇼핑 방송을 보면, 속에 알과 살이 꽉 차서 그걸 쥐어짜는 모습으로 고객을 유혹합니다. 정말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게 바로 밥도둑이라 불리는 간장게장입니다. 그런데요. 안도현이란 시인은 간장게장을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한번 들어보시죠.”

뜬금없이 갑자기 웬 간장게장 이야기? 그러면서 박웅현 ECD의 낭독에 귀를 기울였다.


“시 -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 꽂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 어찌할 수 없어서 /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 한 때의 어스름을 /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 저녁이야 /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아. 짠~하다. 맛있게 먹을 줄만 알았지 누가 이 게장을 먹으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 험한 세상을 자식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아 그들을 꼭 껴안은 채로 마지막 숨을 몰아 쉬는 어미 게의 모습에 우리의 부모님이 오버랩되어 갑자기 울컥해진다. 창의력, 발견의 힘, 다 좋은 데 도대체 이제 간장게장을 어떻게 먹으라고 이런 시를 썼나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저는 이 시를 읽고 나서 그 뒤로 간장게장, 끊었습니다 (웃음). 근데 이처럼 모든 예술은 발견에서 시작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는 거죠.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모짜르트가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에서 그 유명한 ‘마적’의 악상을 떠 올리는 장면.” 


그래서 그랬나? 늘그막에 한글을 배우시고는 시를 쓰시면서 유명해진 어느 할머니가 문득 생각났다. 시를 쓰니 뭐가 달라졌어요? 하는 질문에 그 할머니의 대답. “안 보이던 꽃이 보여.” 박웅현 ECD는 이런 ‘들여다보기’를 통해 이젠 직업적 성과뿐만 아니라 삶의 행복까지 찾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것저것 애정을 갖고 들여다 보니 모든 게 신기합니다. 저 시커먼 흙에서 꽃이 올라오는 거 보세요. 저게 기적이지 뭐가 기적이겠습니까? 저희 동네에 있는 작은 화단에 피어나는 꽃들도 매일 이렇게 조금씩 변해 갑니다. 작은 씨앗 하나에 불과했던 가녀린 생명이 이렇게 매일매일 꿈틀대며 꽃봉오리를 맺어가다 결국 이렇게 활짝 꽃을 피우지요. 그러니 제게는 이 작은 꽃 한 송이도 흥미진진한 드라마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매일매일의 꽃 사진을 보여주었다. 


헬렌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란 글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법’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했다. 보지 못하는, ‘시각의 결핍’에서 나오는 통찰이다. 우리는 늘 볼 수 있기에, 오히려 보지 못했고, 오히려 보지 않았다. 뒤쳐지지 않으려 마냥 달렸을 뿐이다. 달리니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걸어야 보인다. 박웅현 ECD는, 그래서 ‘들여다 봄’을 통해 제대로 걷는 방법을 배웠단다. 삶의 속도는 좀 느려졌지만 그가 삶의 행복을 얻은 비결이다. 


“천천히! 우리는 ‘느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호학 심사 심지 기의 (好學 深思 心知 其意)’. 사기에 나오는 말인데요. 즐겁게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하나 다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건 ‘심사’라 생각합니다. 사색.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요소입니다. 책을 즐겁게 읽었다 해도 깊이 생각하는 과정이 없으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책을 읽는 ‘다독 콤플렉스’에 빠질 수 밖에 없지요.“ 


박웅현 ECD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스마트 기기들이 개떼처럼 우리를 쫓는 세상이다. 아니,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잠깐의 틈만 나도 우리는 ‘검색’한다. 남들보다 좀 늦게 알면 어떠랴.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엄청난 양의 정보와 지식이 사방에서 넘쳐나는 오늘날, 지식의 양과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지식과 싸워 이기는 건 지혜다. 단지 읽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 읽는 것? 아무 소용이 없다. 천천히 '사색'해야 한다. 


박웅현 ECD와의 90분이 그렇게 흘렀다. 박웅현 ECD는 ‘볼 견(見)’자 한 글자를 가지고 창의력과 행복의 생산 메커니즘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주변 사소한 것들을 들여다 보고, 내가 읽었던 책을 다시 들여다 보고, 내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들여다 보고, 내 주변 모든 것들의 작은 변화들을 들여다 볼 때 창의의 아이디어들은 넘쳐 흘러나고 내 하루하루의 삶이 드라마가 된다. 그의 강의를 들으며 긁적인 노트가 벌써 다섯 페이지째다. 오늘 저녁에는 이 노트를 다시 공들여 들여다 볼 테다. 애정과 관심과 사랑과 정성을 갖고 천천히, 그리고 짙은 사색과 함께! ⓒ보통마케터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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