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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칼럼 02] ‘바람의 옷’은 혁신이었다

[국제신문 연재 칼럼] 안병민의 세상읽기

국제신문 2019년 3월 20일자 30면에 실린 <세상읽기> 연재칼럼입니다.

 

짧은 치마에 반바지 디자인 등 이른바 '개량한복'이 인기다. 바지 스타일의 여자 한복도 시대에 맞춤하고, 점퍼 디자인의 한복도 눈길을 끈다. '번거로움'과 '고루함'이라는 꼬리표가 굴레처럼 따라다녔던 한복의 눈부신 진화다. 그런 한복들이 언제부턴가 고궁을 누빈다. 역사를 눈으로만 담는 게 아니라 한복을 직접 입음으로써 기꺼이 그 역사의 일부가 되려는 사람들. 일종의 즐거운 놀이다. 이 놀이에 누군가가 전통복식 규정을 들이밀었다. ‘제대로 된 한복’을 입지 않으면 고궁 무료입장 혜택을 안 주겠다는 거다. 아니나다를까 역풍이 불었다. 제대로 된 한복이 무엇이냐는 거다. 무엇이 '정답'이고 무엇이 '기준'이냐는 반문이었다. 그리고 그 정답과 기준은 누가 정한 거냐는, 획일적 규제에 대한 반발이었다.  


'학고창신(學古創新)'이라 했다. 과거를 배워 미래를 창조한다는 의미다. 옛것이 없으면 지금 내 눈 앞의 이것도 없다. 옛것이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방점은 '학고'가 아니라 '창신'에 찍힌다. 과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미래다. 파격적인 개량한복은 우리의 한복문화가 과거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시대 흐름에 발 맞추어 진화하며,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웅변하는 증거다.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과거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바람직한 사상이나 관습, 행동 따위가 현재까지 전해진 것. '전통'의 사전적 의미다. 하지만 문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거의 '바람직한 사상, 관습, 행동'들이 더 이상 현재와 맞지 않아서다. 전통을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의 충돌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시간을 버텨내어 살아남은 게 전통이다. 그러니 전통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그럼에도 박제된 전통이 기준으로 작용하여 저 멀리 혁신을 밀어내고 있다면 이는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격이다. 

 

'요즘 것들'이란 단어가 유행이다. '밀레니얼 세대'라고도 한다. 대략 1980년에서부터 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킨다. '비혼'과 '퇴사', '따로 또 같이', '그냥 좋아서'가 이들을 드러내는 대표적 열쇳말이다. 사회의 중심으로 떠올랐지만,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기성세대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런 신세대는 인류 역사의 상수(常數)였다. 문제는 '요즘 것들'이 아니라 '옛날 것들의 고리타분한 기준'이다. 내가 살아온 과거를 기준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재를 재단하려 드니 계속 어깃장이 난다. 기존 정답에 '맞추는' 게 아니라 새로운 정답을 '만드는' 게 경쟁력인 요즘이다. 관건은 유연함! 과거를 고집하면 할수록 '꼰대'를 넘어 '화석'이 된다. 그때는 맞았어도 지금은 틀릴 수 있다. 

 

지난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드레스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빌리 포터라는 배우였다. "남성성과 여성성, 그 사이의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러고 보니 ‘화장하는 남자’나 ‘양산 든 남자’도 이젠 일상이다. ‘나는 나, 너는 너’를 구분 짓던 장벽의 붕괴는 비단 뷰티패션 업계만의 이슈가 아니다. 다양한 분야, 수많은 영역의 크고 작은 경계가 속속 무너지고 있다. 바야흐로 융합, 복합, 크로스오버, 하이브리드의 세상. 그러니 퓨전이 창의이고 잡종이 대세다.  


1994년 파리 프레타포르테. 외국모델들이 한복 치마만 입고 맨발로 런웨이를 활보했다. ‘르몽드’지는 '바람의 옷'이라 극찬했다. 한복디자이너 고(故) 이영희 선생의 작품이었다. 국적 없는 옷이란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옷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저지른 일이다. 혁신이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시대, 우리는 선례를 ‘만드는’ 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선례를 ‘따르는’ 이가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한 유생들에게) 어떤 한자를 쓸 때 점을 두 개 찍는 게 맞는지, 네 개 찍는 게 맞는지 하는 문제는 너무나 중요해서 모든 이들의 관심을 단번에 집중시켰는데, 이 놈의 글자 모양이 뭔지, 원래 논의하던 주제나 글자가 지닌 뜻은 완전히 잊히기 십상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배태했던 조선말기를 외국인 한국학자가 담담히 그려낸 책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중 한 대목이다. 그렇게 아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보통마케터안병민



*국제신문 2019년 3월 20일자 30면 <세상읽기> 연재칼럼 http://bit.ly/2HBSSs6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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