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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인문학:어디서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방구석5분혁신.인문사회]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알아두면 쓸 데 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이름하여 ‘알쓸신잡’이다. 잘 모르던 분야였다. 별 관심도 없던 분야였다. 먹고 사는 거랑 상관없는 한가한 얘기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그렇지 않다. 우선 재미가 있다. 묘하게도 끌린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던진다. ‘어떻게 하면 잘 살까’가 아니라 ‘산다는 게 뭘까’를 생각하게 한다. 


‘알쓸신잡’에서 건축 이야기로 우리의 시선을 끈 인물이 유현준 홍익대 건축대학 교수다. 유현준건축사사무소 대표기도 하다. 기업 경영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건축 이야기. 알아두면 쓸 데가 있을까? 그가 얘기하는 '건축'과 '공간'을 글로 당겨왔다. 


▶뉴요커가 좁은 집에 살아도 되는 이유 


1인가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요즘이다. 지금까지는 4인가족이 중심이었다. 방 3개를 가진 3베이의 30평형대 아파트가 4인가구가 사는 공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개인적인 공간과 부엌, 거실들을 감안하면 인당 20평 정도의 공간을 활용하며 사는 셈이다. 


하지만 1인가구의 전형적인 주거형식인 원룸은 좀 다르다. 여유공간을 찾기가 힘들다. 인당 7평 정도의 공간이 전부다. 그러니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산다. 


예전에는 ‘마당’과 ‘골목’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집이 좁아도 그렇게 좁다고 못 느끼며 살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골목은 사라지고, 마당도 없어졌다. 그러니 혼자 사는 사람의 공간은 좁고, 외롭다. 고시원이 딱 그렇다. 그런 고시원을 들여다보면 교도소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게 요즘 젊은이들이 사는 모습이다. 


단위 면적당 부동산 가격이 무척이나 비싼 도시 중 히나가 뉴욕이다. 당연히 그들이 사는 집도 좁다. 하지만 공간 소비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누리는’ 공간은 결코 좁지 않다. 거리에 넘쳐나는 공원들 덕분이다. 대략 1km마다 하나씩 있는 공원들 덕분에 집이 좁아도 집을 나서면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유니언스퀘어에서 열리는 장터에서 먹거리를 사서 센트럴파크에서 조깅을 하고 일광욕을 즐기는 식이다. 대략 10여분 걸어갈 때마다 이런 공원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반면, 서울은 다르다. 적어도 4km를 걸어가야 공원이 나온다. 한 시간쯤을 걸어야 만날 수 있는 게 서울 시내 공원인 거다. 그러니 서울의 공원은 내 삶과 거리가 멀다. 나랑은 상관이 없는 공간이다. 한 시간을 걸어가야 나오는 근사하고 넓은 공간이, 내 방 앞에 있는 작은 공간보다 나을 수 없다. 그러니 서울사람들은 만성적인 공간 부족에 허덕인다. 


커피숍은 그런 그들의 안식처다. 잘 들여다보면 커피숍은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다. '공간'을 파는 곳이다. 우리는 집을 나서면 끊임없이 걸어야 한다. 중간에 쉬어갈 공간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러니 그런 공간을 돈을 내고 사는 거다. 


전국의 수많은 노래방, 찜질방들을 보라. ‘방’이라는 이름에서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숨은 욕구가 보인다. 그런 공간의 가격 역시 제각각이다. 누구는 비싼 호텔 커피숍에서 쉬어가고, 누구는 편의점 파라솔에서 쉬어간다. 경제력에 따라 쉬어가는 공간이 다른 거다. 사회 갈등은 큰 데서 촉발되는 게 아니다. 이런 요소들이 쌓여 사회 갈등이 일어난다. 


그들의 공간을 구분하는 건 경제력뿐만이 아니다. 나이도 있다. 10대가 찾는 공간은 PC방과 편의점이다. 커피숍은 대학생들이 주로 찾는다. 그러다 돈이 좀 생기면 마련하는 게 자동차다. 자동차는 이동 수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차는 곧 나만의 공간이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공간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광장과 공원이 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대형쇼핑몰에 멀티플렉스가 들어서는 이유 


십 여 년 전만 해도 서울의 핫플레이스는 코엑스였다. 실내에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곳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경리단길, 가로수길, 망리단길 등 코엑스가 누렸던 그 명성이 옮겨간 곳은 이런 ‘길’들이다. 실내에서 실외로의 진출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파트가 나오기 전 우리는 주택에서 살았다. 집을 나서면 골목이 있는 그런 집들 말이다.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눈을 들면 하늘이 항상 있었던 골목길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느꼈고, 그 자연의 변화를 즐겼다. 그렇게 살던 세상에서는 코엑스가 신기했었다. 코엑스는 거대한 실내 골목이다. 비가 와도 우산이 필요 없는 공간이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골목이었고, 히터 바람이 따뜻한 골목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아파트에 산다. 마당이 없는 공간이고, 자연이 사라진 공간이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밖을 나오지 않는다. 실내에서 실내로의 이동만 존재한다.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차를 몰고 회사 건물로 출근한다. 거기 지하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간다. 


우리네 삶에서 야외나 자연이란 단어는 실종된 지 오래다. 그러니 역설적이게도 이제 우리는 밖을 동경한다. 이런저런 드라마나 영화에서 직장인들이 속깊은 이야기를 하는 곳은 옥상이다. 실내로만 다니던 현대인에게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옥상이다. 골목길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명이라는 게 있기 전 수 천, 수 만년 동안 인간은 야외에서 살았다. 자연을 내달렸다. 우리의 유전자 역시 자연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하다. 


사람들이 TV를 많이 보는 이유도 비슷하다. 예전 마당은 변화하는 공간이었다. 사시사철 마당이 보여주는 모습은 늘 달랐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마당의 역할을 갖게 된 건 거실이다. 하지만 거실에는 변화가 없다. 우리네 거실에서 유일하게 변하는 건 TV뿐이다. 그러니 다들 TV앞에 둘러앉아 뚫어져라 TV만 쳐다보고 있는 거다.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는 여러가지 기준 중 하나가 뇌의 보유 여부다. 움직이는 생명체, 즉 동물은 모두 뇌를 가지고 있다. 멍게는 유충 시절에는 뇌가 있다. 바다 속을 떠돌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체가 되어 바위에 달라붙어 생활하면서 멍게는 놀랍게도 자신의 뇌를 먹어치운다. 바위에 뿌리내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게 되자 더 이상 뇌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운동이 내면화된 것이 바로 뇌다.” 미국의 뇌과학자 로돌포 이나스의 말이다. 우리가 뭔가 움직이는 것을 찾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변화와 움직임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류는 점점 자연과 격리된 삶을 강요받고 있다. 그 강요를 잊게 만드는 대체물이 ‘미디어’다. 대형쇼핑몰마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들어서는 이유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실내에서 무언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이런 미디어다. 극장뿐만이 아니다. 서점도 대형쇼핑몰의 단골 구색이다. 코엑스에 들어선 별마당도서관을 보라. ‘책’과 ‘영화’를 통해 사람들은 변화의 욕구를 달래며 산다. 


▶열어야 안전한 우리의 공간들 


앞서 우리나라는 공원이 적다 얘기했다. 하지만 녹지는 적지 않다. 문제는 그런 녹지들이 다 경사진 곳에 있다는 거다. 그러니 마주볼 수 있는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센트럴파크처럼 서로 눈을 마주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가쁜 숨 몰아쉬며 상대방의 뒤꽁무니만 따라갈 수밖에 없는 등산의 구조다. 


외국에서는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레 공원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시민사회의 성장 이전에 근대화가 먼저 진행되었다. 경사가 있어 건물을 짓기 힘든 곳이 공원이 되어버린 거다. 외국은 다르다. 부잣집은 다 경사지대에 있다. 그래야 조망권도 확보하고 프라이버시도 보호받을 수 있다. 도시계획이 잘못된 우리는 그 반대다. 


미국의 센트럴파크도 문제는 있다. 너무 넓다는 거다. 인근 빌딩들이 보이지 않는 숲 속 공원은 낭만적이다. 문제는 밤이다. 너무 어두워져 버린 공간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지켜보는 시선이 없다는 것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결국 센트럴파크는 낮에만 사람들이 찾는 절반의 공간이다. 


여기서 감시의 효용을 알게 된다. 감시가 없는 공간이 위험하다는 말은 감시가 곧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음을 가리킨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이 백주에 수많은 삶의 시선이 지켜보는 곳에서 사고를 치기는 쉽지 않다. 한강시민공원은 그런 면에서는 최고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수많은 아파트의 불빛이 내려다보는 한강공원은 새벽 1시까지 범죄 걱정 없이 술을 먹을 수 있는 전 세계 유일한 공원이다. 


그런 면에서 참 안타까운 곳 중의 하나가 학교다. 유럽의 광장과 우리의 학교를 비교해보자. 광장은 '열린 공간'이다. 그러니 범죄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하지만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인 학교에서의 범죄가 빈발한 요즘이다. 닫혀 있어서다. 담장을 허물어야 한다. 학교 운동장을 뺑~둘러싼 상점과 가게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 건물 반경 얼마 이내에는 상업적 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이들을 가둬놓고 키운다. 학교 보안관까지 두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흉악한 범죄가 학교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은 끊이질 않는다. 


▶풍경의 변화와 걷기의 즐거움 


거리는 많다. 하지만 걷고 싶은 거리는 적다. 거리를 걷고 싶을 때 우리는 테헤란로를 걷지 않는다. 이를테면 명동길이 걷고 싶은 길이다. ‘이벤트 밀도’라는 개념을 들이대면 그 차이가 보인다. 가게의 개수를 100m라는 숫자로 나눈 게 이벤트 밀도다. 쉽게 말해 100m라는 단위거리당 즐기고 구경할 수 있는 가게의 개수가 얼마나 많냐, 라는 거다. 


홍대는 34, 명동이 36인 반면 강남대로는 14라는 숫자가 나온다. 10차선인 테헤란로에서는 이 수치가 8로 더 줄어든다. 이 수치가 적어도 30 이상이 되어야 걷고 싶은 거리가 된다. 시속 4km로 걷는다고 가정하면 명동은 2.5초당 화면이 바뀌는 TV프로그램이고, 테헤란로는 11초가 걸려야 화면이 바뀌는 프로그램이다. 어느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더 높을지는 불문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건축 공공의 적은 상가다. 대형 아파트 단지를 보면 그 둘레는 모두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그 긴 거리에 가게 하나 없다. 가게가 없으니 거리에 사람도 없다. 도시는 커지는데 사람을 위한 거리는 줄어들고, 자동차를 위한 도로만 늘어나는 꼴이다. 걷고 싶은 거리가 사라지니 사람들은 상가로 스며든다. 걸어야 옆동네로도 이어진다. 요컨대, 걷고 싶은 거리는 ‘소통’을 의미한다. 그 소통을 상가가 가로막는 셈이다. 지척 거리인 옥수와 압구정은 그래서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상가는 지역 간의 통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셈이다. 


대형쇼핑몰이 생기면 도시는 황폐해진다. 새로 생겨난 대형쇼핑몰 스타필드 인근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차만 다닌다. 거리가 사라졌다. 가뜩이나 배달 음식을 사랑하는 배달의 민족이다. 거리엔 점점 가게가 사라지고 편의점만 남지 않을까? 


▶로마의 콜로세움과 몽골의 텐트 


로마는 천 년을 빛났던 반면 몽골은 고작 90년만에 저물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건축의 관점에서도 재밌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몽골은 건축문화가 없다는 거다. 몽골은 유목민의 삶을 산다. 그러니 그들의 군대도 귀신같이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진다. 적에게는 무척이나 두려운 존재가 몽골의 군대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눈 앞에 있을 때는 궁극의 두려움이었던 몽골의 위력은 건축물로 기억되지 못했다는 거다. 


로마를 보면 그 차이는 극명하다. 로마는 가는 곳마다 그들의 콜로세움을 지었다. 그런 거대한 건축물이 곧 로마의 힘이었다. 적국은 그런 건축물을 통해 그들의 힘을 잊지 않고 아로새길 수 있었다. 몽골군의 텐트가 가질 수 없는 힘이다. 


고인돌도 그렇다. 대략 3톤 정도의 기둥 바위 두 개가 10톤의 또 다른 바위를 떠받치고 있는 형태의 고인돌은 사실 아무런 기능이 없다. 제작 과정도 힘들뿐더러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 필요한 건축물이다. 도대체 이런 무용의 건축물을 왜 만든 걸까? 알서 언급했던 로마의 사례가 힌트다. 


이 정도의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는 건 권력의 크기를 웅변하는 일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고인돌은 사단장급 이상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증표다. 예컨대, 이웃부족에서 쳐들어 왔다가도 고인돌의 크기를 보고 그 힘의 크기를 짐작하여 무모한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거다. 더 무거운 건축물은 더 강력한 권력에 다름 아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그렇고, 중국의 만리장성이 그렇다. 거대한 건축물은 인간 권력의 응집체다. 그런 건축물을 지을 수 없는 이 시대의 소시민들은 인근 야산에 올라 자그마한 돌탑을 쌓는다. 


이런 과시에는 사실 두려움이 녹아있다. ‘생존을 위한 과시’, 즉 ‘나 이 정도 세다’, 라는 걸 주변에 보여주는 행위라는 거다. 실제 가젤을 보면 병약한 개체가 맹수에게 잡아먹힌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몇몇 가젤들은 무리 속에서도 계속 껑충껑충 뛴다. 나는 이렇게 팔팔하니 넌 나를 못 잡을 거라는, 그러니 차라리 다른 애를 목표로 하라는, 포식자에 대한 시위다. 


우스개 소리지만 흡연자들에게도 이런 심리가 있다고 한다. 난 이렇게 담배를 막 피워도 될 정도로 건강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내 건강을 소모하면서 보여주고 싶은 자기과시인 셈이다. 이처럼 쓸 데 없는 데 자원을 투입해야 과시로서의 효과가 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다이아몬드를 수천 만원, 수억 원을 들여 사는 사람들이 일반인들 눈에는 그래서 대단해보이는 거다. 


대개의 역사적 랜드마크 건물들도 마찬가지다. 에펠탑 같은 건축물이 대표적이다. 실용적인 기능이 전혀 없는 건축물일수록 과시의 효과는 크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건물이 랜드마크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이웃부족과의 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고인돌 효과’처럼 이런 건축물도 나름의 효용은 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운용하는 나라들을 보면 이해가 간다. 과거의 거석문화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일종의 전략무기였던 셈이다. 


우리가 배운 물리학 개념 중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가 있다. 거칠게 말해, 위치가 높으면 에너지도 세다는 얘기다. 누군가가 그만큼의 에너지를 써서 그 위치에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각 건축물의 위치에너지를 계산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권력의 크기도 계산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걸 계산하여 피라미드를 기준점 1로 놓았다. 그랬더니 만리장성이 2.3, 세계무역센터가 7.4, 부르즈칼리파가 3으로 나온다. 만리장성을 세운 진시황의 권력이 피라미드를 만든 파라오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가설? 시공간을 초월하여 각 건축물을 통한 권력의 크기를 우리는 이렇게 상대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다. 


이런 과시는 비단 건축 분야에 한정되지 않는다. 헤어스타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상부에 무거운 것을 올릴수록 위치에너지는 세진다. 조선 시대의 상투와 갓 역시 이런 과시의 사례다. 대감들은 망건과 탕건을 썼고, 여자들은 가채를 썼다. 왕관은 또 어떠한가? 아무런 실용적 기능이 없는 물건임에도 권력자들은 왕관을 탐냈다. 머리에 쓰는 왕관 그 자체가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왕관을 쓸 수 없는 요즘, 사람들은 왁스와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머리를 세운다. 영국 신사들이 썼던 모자와 예전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가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패션과 건축, 헤어스타일은 따로 노는 게 아니다. 연결 고리가 있다. 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삶의 양식이기 때문일 터다. 


▶어떤 학교에서 아이들을 키울 것인가 


다양성의 위기다. 사람들은 ‘다름’을 ‘틀림’이라 얘기한다. 중국집을 가서도 메뉴는 짜장면으로 통일해야 한다. 전체주의다. 학교 건축물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전화기, 자전거, 비행기들을 보면 초기의 모습과 180도 달라졌다. 하지만 학교 건물만큼은 예전 소설 ‘상록수’에 나오던 개화기의 모습 그대로다. 운동장 하나에 기역자(ㄱ) 모양의 4층 건물 말이다. 


교도소가 딱 이렇다. 어찌 보면 우리의 학교는 아이를 수감하는 교도소와 다를 바 없다. 아이들 졸업식 때 꽃다발을 안겨줄 게 아니라 두부를 먹여야 할 것 같다는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12년을 버텨낸 아이들에게 우리는 독수리처럼 비상하라 요구한다. 청춘의 꿈을 펼치라 다그친다. 양계장에서 12년을 가둬 키운 닭에게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라고 재촉하는 꼴이다. 


3학년 4반 교실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304호 아파트에 둥지를 튼다. 그러다 납골당 304호칸에서 영면에 든다. 대부분 이렇게 산다. 학교 건물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는 급식에서도 나타난다. 모든 아이들이 같은 반찬에 같은 밥을 먹는다. 이 역시 기시감이 든다. 교도소에서 봤던 모습들이라서다. 


이러니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아이들이 자라나기 힘들다. 왕따 되기 십상이다. 이상해야 창의적일 수 있다. 그 싹을 학교 건물과 아파트 건축에 대한 각종 규제들이 말살시키고 있는 거다. 


대한민국 중산층이 사는 30평대 아파트를 보라. 같은 구조에 같은 건물이다. 하지만 가격이 다르다. 하나는 3억인데 또 하나는 12억이다. 그러니 갈등이 생겨난다. 뭐가 다른데 가격차가 이렇게 나냐는 불만이다. 예전엔 좁아도 마당이 있는 우리 집이 좋을 수 있었다. 다 달랐기 때문이다. 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등은 기계적 획일화를 통해 이뤄지는 게 아니다.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평등이 진짜 평등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학교 건물에 대해서는 진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유현준 교수. 그의 톤이 높아졌다. 학교 건물이 점점 고층화되고 있다. 공간 활용 효율을 따지자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들이 야외로 나갈 일은 더욱 줄어든다. 테라스라도 넉넉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아이들이 하늘을 보며 자랄 수 있다. 어른들이 즐겨 찾는 카페 공간을 보라. 날씨가 좋은 날엔 폴딩도어를 열어두고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구조다. 그런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우리의 닭장 속 아이들을 상가 건물 학원으로 뺑뺑이 돌릴 계획을 짜고 있는 어른들, 진짜 반성해야 한다. 


물론 학교에도 운동장이란 게 있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다. 운동장은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곳이다. 야외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산책을 하고 싶은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학교는 '교실에서 공부 잘 하는 아이'와 '운동장에서 축구 잘 하는 아이'가 '짱'을 먹는다. 나머지 아이들은 그들의 색깔을 낼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공간에서 아이들을 키울 거냐, 하는 건 그래서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을 못하니 창문 크기를 줄여 달라는 주문에 루이스 칸이라는 건축가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연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은 없다.” 이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니 우리는 19세기 건물에서 20세기 선생이 21세기 학생을 가르친다는 슬픈 자조가 나온다. 


학교 건물에 대한 기계적인 규정들을 없애야 한다, 유 교수는 역설했다. 천장고만 높여도 창의력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게 규격화되어 있다. 그렇게 학교 건물은 우리의 아이들을 표준화, 획일화, 전체화시킨다. 나빠도 좋으니 같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유현준 교수와의 건축 여행.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갈 다양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양한 삶의 결을 읽어낸다. 우리 인간에게 어울리는 공간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이 도시에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런 도시에서 사는 우리의 미래는 과연 행복할까? 많은 생각들이 고리에 꼬리를 문다. 

건축에 관한 답은 건축가들이 찾을 것이다. 경영을 하는 우리가 이런 강의를 듣는 이유는 그런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솔루션을 찾는 데 있지 않다. 건축이란 분야에서 이런 통찰을 짚어내는 고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경영에서도 새로운 통찰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사람을 만든다" 했다. 처칠의 말이다. 사무실 자리 배치에도 감시와 권력의 메커니즘을 욱여넣은 우리를 돌아보면 건축과 경영 또한 별개의 이슈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리더십과 조직문화가 점점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건축의 이슈는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의 경영 이슈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삶의 이슈로 이어진다. 다시금 깨닫는다. 일상이 경영이다.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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