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변화혁신]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장사가 잘 되는 집은 이유가 있다. 반드시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잘 된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다 못해 화장실이 깨끗해서라는, 사소한 이유라도 있게 마련이다. 장사가 이럴진대 국가 경영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강대국 역시 강대국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얘기.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강자의 조건>의 저자 이주희 EBS PD와 함께 짚어본 '강자의 이유'를 스케치했다.
1 달랑 10만명으로 세계를 정복한 몽골의 비밀
몽골 제국이 유럽을 침공한 건 1241년 가을이었다. 몽골의 첫 번째 제물은 헝가리였다. 헝가리 군은 전멸했다. 다음 제물은 누가 될까, 유럽 전역이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1242년 유럽에서 몽골군이 사라져 버렸다. 몽골의 다음 공격지로 점 쳐졌던 빈은 이를 신의 가호로 생각했다. 전 유럽에서 감사 미사가 집전되었다.
우리나라에 쳐들어오지 않은 걸 신의 가호로 여길 정도로 당시 유럽인들에게 몽골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면 왜 승승장구하던 몽골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던 유럽을 눈 앞에 두고 다시 몽골로 돌아간 것일까?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대칸을 맡고 있던 오구데이가 사망한 것이다. 몽골은 칸을 투표로 뽑았다. 이른바 황금씨족과 주요 장군들이 이 선거의 유권자였다. 그랬다. 그들은 그들의 리더를 뽑는 선거에 참여하러 미련없이 발길을 돌린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칸을 선출한 그들은 다시 유럽을 찾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 유럽은 가난한 지역이라 몽골의 입장에선 정벌의 가성비가 떨어졌던 거다. 몽골 입장에서 보면 상황은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유럽 입장에서는 끝난 게 아니었다. 몽골을 통해 받은 엄청난 충격, 그 후폭풍과 여진이 이어졌다.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그런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농경민족으로 살아온 우리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지녔던 유목민족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대표적인 게 용맹하고 무서운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실제 몽골군의 모습은 우리 생각과는 좀 달랐다. 몽골군은 엄청나게 죽음을 두려워했다. 정면승부를 절대 하지 않았던 이유다.
세계를 정복했던 대몽골군이 죽음을 두려워했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고? 오늘날 몽골의 인구는 300만이다. 예전 세계를 제패했던 시절의 인구 또한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100만이었다. 군대도 많아야 10만명이었다. 그러니 이들에게 군사 1명은 무척이나 귀한 자원이었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을 거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다.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였기에 몽골군은 더 강한 존재였다. 숫자가 적고 죽음을 두려워했기에 그들은 오히려 늘 새로운 전술과 무기로 스스로를 혁신하여 적을 섬멸했으니 말이다.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달랑 10만명으로 전 세계를 정복했다는 걸.
2 열면 살 것이요, 닫으면 죽을 것이다
몽골군은 모두 기병이었다. 보병은 없었다. 그런데 잘 보면, 북방 기마민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퉁구스계와 몽골계다. 몽골계는 최대한 가볍게 무장을 하고 기동성을 앞세웠다. 주요 무기는 활 같은 가벼운 것들이었다. 적을 한 지역에 몰아넣어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흩어지는 적을 향해 칼로 공격하며 백병전을 벌이는 게 이들의 기본 전술이었다. 이런 작전은 효과적이고 또 효율적이기도 했지만, 문제도 있었다.
무기가 가벼우니 적진을 정면 돌파하는 게 불가능했다. 마차 같은 견고한 장애물로 방어진이 펼쳐지면 치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 거다. 다시 말해, 정면 공격은 몽골군이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지혜로웠다. 우리가 못 하는 건 남에게 맡기면 되다는 걸 알았다. 정면 돌파의 임무는 퉁구스계에게 맡겼다.
만주족이라 불렸던 퉁구스계 민족은 경장기병을 운영했던 몽골계와 달리 중장기병을 운영했다. 중세 유럽 기사들의 육중한 갑옷과 투구를 떠올리면 쉽다. 이들의 특기는 당연히 정면 돌파였다. 요즘으로 치면 탱크 역할이다. 중무장을 한 기사들이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거다. 다가 아니다. 세 마리의 말을 밧줄로 묶어 돌파력을 배가시켰다. 이런 중장기병들에게 장애물은 없었다. 말 그대로 거칠 게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방향을 바꾸는 게 쉽지 않아 유연한 전술 변화와 상황에 대한 탄력적 대처가 안 되었던 거다.
하지만 몽골군은 퉁구스계 기병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에 주목했다. 몽골군은 퉁구스 기병을 그들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역할은 효율적으로 분배되었다. 퉁구스 기병들의 저돌적 돌파에 이은 몽골 기병들의 날렵한 공격이 적군의 혼을 쏙 빼놓았다. 환상의 조합이었다.
몽골군의 또 다른 강점은 공병대였다. 예전에는 병종 변경이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말을 타는 기병과 활을 쏘는 궁사는 아주 전문적인 직역이었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역할 변경이 쉽지 않았다. 군사들의 훈련과 실전 배치에 있어 효율이 떨어질 수 밖에.
그런데 총이 나타난 거다. 총은 총 자체가 가진 파괴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 총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개나 소나 쏠 수 있다’라는 거다. 활을 쏴서 사람을 죽일 정도의 스킬을 가지려면 수 년간의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 총은 누구나 쉽게 배워 쏠 수 있다. 그러니 군대 운영의 효율이 확 올라간다.
공병대도 마찬가지였다. 공병대는 유목민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조직이다. 유목민족은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녔기에 성을 쌓고 다리를 만들고 하는 일은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일었다. 하지만 몽골군의 위대함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중장기병의 활용에 있어 이민족을 활용했던 것처럼 농경 정주민족에게 공병대 역할을 맡긴 것이다. 유럽을 정복할 때도 몽골은 중국인 공병대를 활용했다. 중국을 정복할 때는 당시 중국인들이 전혀 접하지 못했던 이슬람 지역의 기술과 무기로 무장했다.
상기의 사실들은 몽골군의 개방성을 보여준다. 몽골은 몽골만으로 전 세계를 정복한 게 아니었다. 다른 민족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 거다. 중장기병이나 공병 조직도 그런 개방의 연장선상에 있다. 유럽군이 몽골군 장교를 잡았는데 갑옷을 벗겨보니 영국 사람이었더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생기면 그 상황 자체를 의식적으로 지워버리려는 게 사람의 심리다. 유럽의 어느 누구도 영국인이 몽골군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다. 애써 외면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 아랍군에 잡힌 영국인이 나중에 몽골군에 몸을 담게 된 게 아닐까 추정된다.
몽골이 남송을 공격할 때였다. 초반에 몽골은 고전했다. 양자강이라는 커다란 강 때문이었다. 초원을 달리며 살았던 몽골군에게 강은 또 다른 성벽이었던 거다. 고려가 몽골의 공격에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골은 서남아시아, 죽 이슬람 기술자들의 활약으로 ‘회회포’라 불리는 투석기를 전장에 도입했다. 결과는 우리 모두 아는 대로 몽골의 승리였다.
관건은 혁신이다. 그런데 혁신의 성공에는 필요한 요소가 있다. 관용이다. 당시 사람들은 몽골군이 강대한 성벽으로 방어진을 치고 있던 유럽군을 결코 뚫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중앙아시아나 유럽 지역의 성들은 몽골군의 공격을 한 달도 채 견디지 못하고 속속 무너지고 뚫렸다. 기병대만으로 이룰 수 있는 성과가 아니었다. 기병대뿐만아니라 새로운 병기와 전술들을 통해 몽골군은 항상 승리했다.
이런 지속적인 혁신은 몽골 내부에서 나왔던 게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몽골군의 혁신은 중국, 이슬람, 심지어는 유럽군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성의 문화에 빚진 바가 크다. 그런 관용과 개방을 통해 몽골은 불과 50년 만에 첨단기술로 무장한,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군대로 변모했다.
혁신은 곧 관용이다.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개방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혁신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방만 한다고 혁신이 가능할까? 우리는 혁신을 아주 쉽게, 그리고 아주 자주 말한다. 하지만 혁신은 어렵다.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깝다. 대표적인 게 대포다.
3 시대가 바뀌면 게임의 룰도 바뀐다
몽골 제국의 팽창은 13세기 중반 무렵 멈춘다. 동쪽으로는 고려까지 갔으니 더 이상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며, 서쪽, 즉 중세 유럽은 약탈의 경제적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그랬다. 그러니 몽골에 있어 다음 목표는 이집트였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에는 맘루크가 있었다. 맘루크는 중장기병으로서 이집트의 엘리트 노예군단이었다. 그들에게 몽골은 패퇴했고 맘루크는 이집트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붉은 꽃이 열흘 가는 법은 없다. 13세기 이후부터 몇 백 년간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던 맘루크에게 오스만투르크의 도전장이 날아들었다. 16세기의 일이었다. 이슬람지역의 패권을 놓고 오스만투르크와 이집트의 맘루크가 격돌했다. 승부는 싱거웠다. 대포로 무장한 오스만과 중장기병으로 구성된 맘루크는 애초에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이른바 대포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일이다. 왜 오스만이 받아들인 대포를 맘루크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걸까? 대포 기술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즉 유럽과의 물리적 거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민족성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둘 다 아니다. 오스만이 육지로 유럽과 연결되어 있었다면, 이집트는 바다로 유럽과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맘루크도 투르크 계통이었기에 민족적 차이점도 없었다. 그러면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답은 이들의 군대 구성에 있었다. 오스만의 주력부대는 보병이었다. 기병이 아니었다. 보병은 중장기병과 달리 포격 공격에 쉽게 대응할수 있고, 유사시엔 언제든 포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맘루크 군대는 중장기병이었다. 그러니 맘루크 입장에서 대포를 받아들인다는 건 중장기병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꼴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신기술은 초기에는 완벽할 수 없다. 그러니 맘루크 입장에서는 저 정도 수준의 대포 기술을 우리가 꼭 받아들여야 할까, 했었던 거다. 맘루크가 대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다.
대포와 중장기병의 전쟁은 그렇게 허무하게 결론이 났다. 이후 세상은 오스만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한다. 성벽을 무너뜨리는 대포가 등장하자 수비 측에서도 새로운 무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참호였다. 애초 성벽이란 돌이나 벽돌 등 단단한 재질로 쌓아올린 수직의 방어 진지다. 그러니 활로는 강건한 성벽을 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포가 나타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대포가 날아와서 성벽이 무너지거나 깨지자 우리 군사의 피해가 더 커졌다. 성벽을 쌓는 방법이 바뀐 건 그래서다. 화약무기에 대한 가장 유효한 방어수단은 바로 흙이었다. 보병의 역할에 '참호 파기'가 추가된 건 그래서다.
수비의 패턴이 바뀌자 공격 입장에서도 기존의 중대형 대포의 효용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수비의 전략과 기술이 발전하니 공격도 그에 발맞추어 진화한다. 바로 경량 대포의 도입이다. 말 한 마리가 끌 수 있는 경량 야전대포가 나타난 것이다. 말이 끄니 기동성이 확보되어 육지 여기저기서 힘을 발하고, 이걸 배에 실으니 바다에서도 효과적이다. 고정된 중대형 대포가 아니라 움직이는 기동형 대포가 출현한 것이다. 범선과 대포를 앞세운 유럽군대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오스만이 주력으로 내세웠던 중대형 대포는 고정형이었다. 성벽을 깨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 참호 속 보병들의 스피디한 움직임에 맞추어 공격을 하기에는 너무나 느렸다. 하지만 초대형 대표의 맛에 길들여진 오스만은 반대로 대포의 크기를 더 키우기 시작했다. 대포가 커지자 하루에 쏠 수 있는 탄환 수도 줄어들었다. 150킬로의 화약을 넣어야 한 번 발사 가능한 대포를 생각해보라. 파괴력은 크지만 속도 면에서 오스만의 대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오스만 역시 '역량파괴적 환경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성공의 덫'에 발목을 잡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역량파괴적 환경 변화는 기존 역량을 무력화 시키는 환경 변화를 가리킨다. 예컨대, 필름 산업을 삽시간에 붕괴시켰던 디지털 카메라의 출현이라든지, 정밀 기계 산업이었던 시계 산업을 전자 산업, 한발 더 나아가 패션 산업으로 바꾸어 버렸던 시장의 변화가 그 예다. 신기술이 나온다든지, 산업의 경계가 파괴된다든지, 규제가 변하거나 새로운 시장이 나타난다든지, 경쟁의 룰이 바뀐다든지 할 때 이런 역량파괴적 환경 변화가 나타난다. 기존의 우량 기업들에게는 치명적 위기 상황인 셈이다. 그들을 지금까지의 성공으로 이끌었던 경쟁력이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성공의 덫은 이 때 작동하기 시작한다. 지금껏 나를 지켜주었던 나의 무기가 오히려 덫이 되어 내 목과 심장을 겨눈다는 말이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대포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하나가 더 남았다. 오스만 이후 유럽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게 스페인이었다. 유럽 최강의 육군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 스페인이 유럽 최강의 해군을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다. 강한 육군을 배에 태우니 강한 해군이 되는 거다. 이 당시만 해도 바다에서의 싸움 역시 육지에서의 그것과 별 다를 게 없었다. 적군의 배가 나타나면 접근하여 옮겨 타서 백병전을 벌이는 게 당시의 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페인은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거다.
스페인 역시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주공격 무기는 대포가 아니었다. 세계 최강의 육군이 그들의 존재이유이자 자부심이었기에 그들은 대포에 주목하지 않았다, 아니 대포를 중용할 수 없었다. 중대형 대포로 항상 승리했던 오스만이 경량 대포라는 신기술에 오히려 대포의 크기를 키우는 우를 범했던 것과 너무나 똑같은 이유다. 역시 성공의 덫에 걸린 활동적 타성의 사례다. 대포로 무장한 영국이 스페인을 누르고 새로운 승자가 된 배경이다.
“이 비겁한 놈들아. 가까이 안 와?” 스페인군은 멀리서 대포를 쏘는 영국군에게 소리쳤다. 새로운 기술과 전술은 늘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기존에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방식이라서다. 최초의 근대소설인 <돈키호테>를 저술한 대문호, 스페인의 세르반테스도 대포를 경멸했다. 인간이 가진 남성적 용기를 대포가 말살시켰다는 이유다. 하지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며 끊임없는 자기혁신이 필요함을 우리는 이렇게 역사를 통해 곱씹게 된다.
4 관용이 개방이고 개방이 혁신이다
맘루크가 그랬고, 오스만이 그랬으며, 스페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의 성공에는 그들만의 성공 공식이 있었다. 그들은 그 성공 공식에 집중하고, 그를 반복 활용하고 확대 적용하여 강자의 왕관을 차지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뀐 거다. 위기감을 느낀 이들은 기존의 성공 공식을 신주 단지 모시듯 떠받들며 개선에 집착하고 근시안적 변화에 치중했다. 이른바 ‘성공 공식의 내부적 효율성 강화’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들이 성공 공식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그 공식은 오히려 덫이 되어 더더욱 그들의 발목을 옥죄었다. 마치 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기존의 석기를 더더욱 날카롭게 갈려고 노력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라고나 할까? 혁신이 가능할 리 없다.
스페인도 대포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적이 있긴 하다. 문제는 이 주철대포를 만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신교도였다는 거다. 스페인은 구교가 국교인 나라였다. 그런 종교적 이유로 기술 이전이나 도입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서 역설한다. 혁신에는 관용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놓치기 쉬운 사실 하나가 있다. 지금 얘기하는 이 맥락에서의 관용은 사랑이나 자비 같은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는 거다. 남을 위하는 이타주의 관점의 개념이 아니라 싫은 것을 억지로 참고 견딘다는 개념의 관용이다.
관용은 참는 거다. 견디는 거다. 불편하지만 참고 견디는 거다. 실용적 가치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관용은 곧 실용적 개방이며, 이런 개방이 혁신으로 이어진다. 검은 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되는 거다. 몽골이 모든 고양이에게 문을 활짝 열었던 배경이다. 그런 열린 자세를 통해 몽골은 세계를 내달렸다. 강자의 비밀? 핵심은 관용이었다. 기억해야겠다. 열면 살고 닫으면 죽는다! ⓒ혁신가이드안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