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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스케치 003] 대한민국 경제와 한민족의 DNA

보통마케터 안병민의 통찰스케치


"2000년대 초 중국의 동북공정에 피가 끓어 북방 고대사 연구를 결심했어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말의 주인공이 금융계 인사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1993년 금융실명제, 1995년 부동산실명제, 1997년 외환위기 등 고비마다 실무대책을 이끌었던 그다. 2003년 SK글로벌 사태나 신용카드 사태 때는 해결사로 투입됐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터지자 금융위원장에 발탁됐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이야기다. 그는 2008년 재정경제부 1차관을 마치고 3년간 야인생활을 하면서 만주와 유라시아를 여행하며 각종 역사 자료를 모아왔다. 중국이 발굴하다가 유야무야된 '하가점하층문화' '홍산문화'의 비밀에 접근해 보려고 했다는 그는 금융위원장을 마치고 지금은 법무법인 지평이 설립한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서 역사 연구에 한창이다. 오늘 강의는 금융계 주류였던 김석동 대표가 역사학계 비주류로서 내는 절절한 목소리다. 그의 강의를 통해 헤집어 본 유라시아의 북방민족사, 그 안에 녹아있는 한민족의 성장 DNA를 추적한다.  


01 대한민국 현대경제사-기적의 드라마 


▶한강의 기적과 대한민국 경제의 위상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적의 드라마다. 1960년도 이후 GDP 기준으로 세계 경제는 7배 성장했다. 한국의 성장은 무려 38배다. 미래가 보이지 않던 전쟁 폐허 한국은 이제 세계 13위권의 경제강국이 되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했다. 이런 기적의 이면에는 도대체 어떤 배경이 있는 걸까? 


“세계적인 고성장 사례와 비교해보아도 한국 사례는 독보적입니다. 중상주의시대 이후 「16세기 스페인」이 1940만㎢에 달하는 大식민제국을 건설할 당시(1500~1600년) 세계 GDP가 1.3배 증가하는 동안 스페인의 GDP는 1.6배 증가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해양·상업강국으로(1500~1700년) 세계 GDP가 1.5배 증가하는 동안 5.6배의 GDP 성장을 이루었지요. 「18~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으며(1700~1870년) 세계 GDP가 3배 증가하는 사이에 9.4배의 증가를 이룹니다. 「19~20세기 미국」은 1870~1940년 사이 세계 GDP가 4.1배 증가하는 동안 9.5배의 GDP 증가율을 기록합니다. 20세기 1·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화와 수출주도로 경제강국을 이룩한 일본의 GDP도 1913~1970년에 세계 GDP가 5배 증가하는 동안 14.1배 증가했지요. 세계적인 고성장으로 거대국가를 건설한 사례와 비교해보더라도 대한민국이 이루어낸 것은 실로 역사가 기억할 작품입니다.”


도대체 한국의 성장은 어느 정도길래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1960년에서 2012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GDP의 성장은 무려 35.2배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세계 GDP는 7.1배 성장했을 뿐이다. 세계적인 고성장 사례와 비교해보아도 한국의 성장률은 압도적이다. 그야말로 괄목상대! 


반세기만에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적 산업국가를 건설한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에 79달러에서 70년에 243달러, 77년에 1000달러, 96년에 1만달러, 2007년에 2만달러를 돌파했다. 


수출은 70년 8.4억달러, 77년에 100억달러, 95년에 1000억달러를 각각 돌파하고, 2012년 5478억달러를 기록하여 세계 7위 수출국가, 9위 무역국가로 등장했다. 1950년대 이후 세계 10대 수출국가로 진입한 국가는 일본(1960년), 중국(2000년), 한국(2009년), 세 나라뿐이다. 우리의 주력 수출상품을 보면 DRAM 세계1위(시장점유율 65.3%), 휴대폰 세계1위 (31.1%), 자동차 세계5위 (5.8%), 조선 세계1위(48.1%), 디스플레이 세계1위(53.8%), 철강 세계6위(4.1%)다. 


이러한 국력을 토대로 한국은 80년대 후반 세계무대의 중심에 등장한다. 이후 IMF 개도국 졸업, 올림픽 개최(1988), OECD 가입(1996), 월드컵 개최(2002), OECD 원조공여국(2009), G20정상회의 개최(2010),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2011), 동계올림픽 개최(2018) 등 숨가쁘게 달리는 중이다. 물론 우리 현대사에 수많은 주름과 명암이 있었고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민이 이룩한 위업을 덮어버릴 순 없다. 


▶기적의 원동력-인력, 기술, 자본, 전략, 그리고… 


그렇다면 이런 기적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①근면하고 우수한 ‘인력’을 꼽을 수 있습니다. 둘째, ②R&D 투자를 통해 축적한 ’기술’이지요. 이제 기술에 있어서는 한국이 세계 정상급임을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③높은 저축률과 대외 개방을 통해 조달한 ‘자본’입니다. 인력과 기술, 자본, 이 세 가지 요소가, 수출 지향과 신산업에 대한 도전으로 요약되는 ④‘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과 ⑤’한국인 특유의 DNA’와 맞물려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세계 10위권의 선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게 된 거지요.”


김석동 대표의 설명에도 의문은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DNA는 어떤 것인가? 이 대목에서 김석동 대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첫째, 경쟁·시장친화적 문화다. 우리 민족은 경쟁에 친숙하고 시장을 인정하며 시장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 두 번째는 자존과 자립의 사회 분위기다. 척박한 환경에서의 생존 본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셋째는 강한 성취 동기와 집단의지다. ‘하면 된다’는 신바람 문화가 기본이고 목표를 향한 구성원의 강한 결속력은 거기에 불을 붙인다. 마지막으로는 대외 지향성이다. 전 세계가 한국인의 활동 무대다. 세계 최고의 해외 유학, 국제 이동 인구가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을 잘 살펴보면 특기할 만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 특유의 DNA가 옛날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던 기마민족 전사들의 DNA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는 거지요.”


02 유라시아 기마민족사 – 노마드의 DNA 


▶유라시아 대초원 지역과 기마군단 


김석동 대표의 강의는 자연스레 유라시아 기마민족사로 이어졌다. 유라시아 대초원 지역의 자연조건은 매우 열악하다. 비가 적어 농경이 어렵고, 뜨거운 여름(+40℃)과 혹한의 겨울(-40℃)이 교차한다. 목초지를 찾아 가축과 함께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생활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과거 유라시아 대초원을 무대로 활약하던 기마민족의 피 속에 녹아있는 DNA는 이처럼 엄격한 자연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용감하고 유능해야 했던 인간상에서 유래한다. 


이런 기마 유목민이 주축이 된 기마군단은 혁명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면서 약 2,500년간 유라시아 초원지역에서 동·서양에 걸쳐 거대국가를 끊임없이 건설했다. 스키타이,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거란, 몽골, 티무르·무굴, 셀주크·오스만 튀르크, 금·청나라 등을 건설한 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몽골의 말은 하루에 200km를 주파합니다. 대초원에서의 말은 교통과 생활의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모든 생활이 말을 기초로 이루어졌지요. BC 800년경 아시아 유목민의 기마군단이 출현했는데요. 어찌 보면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중앙 아시아 지역에는 BC 12세기 무렵부터 유목민이 활동한 것으로 보여지고 BC 9세기말 경에는 말의 기동력을 활용한 전투 집단이 등장했다 한다. 기마군단에 대한 최초의 역사 기록은 스키타이다. 스키타이는 아시아 유목민이 BC 8~7세기경 볼가강에 진출하여 우크라이나·중앙아시아 지역에 건설한 강대한 부족국가였다. 스키타이는 최초로 초원을 지배한 기마유목민집단으로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라고 명명되는 흔적이 유라시아 지역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들 기마군단은 기동력과 마상궁술을 무기로 드넓은 초원지역에 산개하여 바람같이 나타나 도발하고 상대를 초토화시키는 위협적인 전술을 구사하면서 공포의 대상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헤로도투스가 그의 저서 ‘역사’에서 기마유목민인 스키타이인은 ‘도시도 성채도 없이 그들의 집을 직접 끌고 다닌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지금도 우리는 ‘게르’라고 불리는 이동식 주택을 몽골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들은 초원에서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개인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사회 전체로서도 풍부한 자립심을 갖는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세력화하거나 외부세력과 전쟁을 하게 되면 순식간에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서 기마군단을 이루어 강한 결속력을 유감없이 과시하면서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과거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기마민족국가는 스키타이, 흉노, 선비, 돌궐로 이어지면서 하루에 200㎞를 달리는 놀라운 기동력과 강궁으로 무장한 공포의 전투력을 과시했고 이후 거란, 여진, 몽골도 이를 이어받아 중세 유라시아 스텝지역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무려 2,500년간 세계사를 주도했다. 대초원을 무대로 가공할 기동력으로 전세를 장악했으며 특유의 기동성으로 전투력을 극대화시켰다. 그들은 총·화기가 등장하기 이전, 역사상 가장 강하고 효율적 기동군단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1126년, 宋 보병 2,000명이 金기병 17기에 대패했고 1637년, 조선보병 4만이 靑기병 300기에 대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실로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의 생활풍습이나 전술·전법은 후대에 등장하는 기마유목민들의 국가인 흉노·선비·돌궐·위구르·몽골 등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스키타이는 BC 3세기말 몽골지역을 통일한 흉노와 이후의 돌궐 등과도 문화적인 친연관계가 이어지고 기마유목 군단의 전통도 확실히 이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주름잡던 기마군단의 활약이라. 몽골 정도를 빼고 나면 사실 제대로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던 그들만의 역사 이야기다. 하지만 왠지 낯설지 않다. 나도 모르게 자꾸 빠져든다.   


▶기마유목민족이 건설한 국가들


“기마민족이 건설한 제국들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흉노, 선비, 돌궐, 몽고, 여진족이 세운 나라들인데요. 그럼 하나씩 살펴볼까요?”


먼저 흉노다. 흉노는 스키타이를 잇는 기마유목민 국가로 BC 3세기 후반에 몽골고원을 통일했다. 흉노는 연, 진(시황제), 한(고조·무제)등과 격돌하여 620만㎢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AD 375년, 흉노 멸망 후 잔존 세력이 서진하여 유럽에 세운 게 훈제국이다. 역사에서 사라졌던 흉노가 약 3백년이 지난 4세기말 유럽에 공포의 기마군단으로 재등장한 것이다. 


다음은 선비다. 1세기 초 흉노의 지배를 받던 선비족은 AD 156년 단석괴라는 리더를 통해 대제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단석괴 사후 선비는 유연, 전연과 후연, 북위로 갈라졌다. AD 916년 선비족의 한 그룹이 만든 요나라의 주인이 거란이다. 그들은 AD 1125년 여진의 금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 년을 번성했다. 


세 번째는 돌궐이다. 흉노 이후 선비, 유연이 몽골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차 AD 552년 돌궐이 건국된다(터키는 1952년 터키 건국 1,400주년 기념제를 치르며 터키가 돌궐이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명확히 했다). 세계사상 처음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나라가 바로 돌궐이다. 돌궐은 후에 위구르 제국, 셀주크제국(1037)과 오스만제국(1299)으로 이어져 지금의 터키에 이른다. 실제로 터키는 초․중등 역사교과서에서 그들은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튀르크족이며, 튀르크의 최초 국가는 흉노이고, 그 영역은 오늘날 만주, 몽골, 남시베리아, 북중국, 위구르, 티벳, 중앙아시아 지역에까지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또 동쪽의 흉노는 대흉노제국, 서쪽의 훈족국가는 유럽훈제국이라 하고 있는데, 중국의 주서(周書) 돌궐열전에도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고 하여 흉노와 튀르크의 친연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네 번째가 몽골이다. 1125년 거란 멸망 후 몽골고원은 5개 집단이 분할하고 있었다. 그러다 1206년 칭키즈칸을 앞세운 대몽골제국이 출범한다. 몽골은 그야말로 대제국이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3,320만 ㎢에 이르는 방대한 제국. 이후 몽골은 티무르제국으로 이어져 중앙아시아·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과 북부인도·아나톨리아 지역을 지배했다. 끝이 아니다. 티무르제국 멸망 후 5대손 바부르가 북인도에 진출하여 세운 게 무굴제국이다. 몽골의 역사는 1857년 무굴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진 셈이다. 

끝으로 여진이다. 여진족은 송화강 유역에서 부상한 퉁구스 계 민족이다. 1115년 아골타는 금나라를 건국했으나 1234년 몽골과 남송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여진은 1616년 후금을 새로이 건국하고 후에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중국을 지배했다. 


“어떤가요? 우리가 지금까지 한낱 변방 오랑캐 정도라고만 생각했던 이들이 사실은 기마군단의 DNA를 통해 세계를 지배했던 민족들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들 모두가 우리 한민족과 남이 아니라는 겁니다.”


변방 오랑캐로만 알고 있던 그들의 활약도 놀라울 따름인데 이들이 우리와 남이 아니라니? 김석동 대표의 강의는 이제 그 근거들로 이어졌다. 한민족의 성공DNA를 추적하는 과정은 이제부터다. 


▶기마유목민족과 한민족의 친연관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흉노는 고조선에서 분리되었고, 고조선에 붙었다 배반하기를 되풀이했으며 묵특이 전 흉노의 기병을 총동원하여 조선을 기습공격하고 이에 조선이 미약해지자, 속민 선비도 선비산으로 도주했다”라 밝히고 있다. 흉노에 대해서는 독일의 공영방송인 ZDF TV의 다큐멘터리도 한민족과의 연계성을 지적한다. 



선비족과 우리 한민족의 친연관계를 추정케 하는 근거들도 있다. 대표적인 게 선비족의 무덤벽화 무사도와 고구려 무용총에 있는 수렵도다. 그림 속 활을 쏘는 무사를 보면 마치 한 사람이 그린 그림마냥 닮아있다. 


(그림) 선비족 무덤벽화 무사도(연나라 시대, 내몽골 조양)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왼쪽부터)


몽골도 마찬가지다. 몽골인들은, 코리족에서 몽골족이 나왔고 코리족 일파가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믿고 있다. 칭기스칸은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뿐만 아니라 몽골은 중등 교과서에서 흉노·선비·유연뿐만 아니라 튀르크·위구르·키르키스·거란까지도 몽골 영토상의 고대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흉노는 유목민이 몽골에 세운 최초의 국가로 정치규범, 경제생활, 문화면에서 기마유목국가의 전형이 되는 강력한 대제국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03 한민족의 고대역사-사라진 역사 


▶한민족의 고대역사 


“이렇듯 북방기마민족은 우리 한민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의 고대 역사에 대해 한번 살펴보지요.”


한민족의 시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러시아 유가이 교수는 “현대 한국인의 조상이 수 만년 전 알타이·몽골 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왔으며 현대 한민족은 신석기시대(BC 5000~1000)와 청동기시대(BC 1000~300)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했던 몽골계 민족의 후손으로 추정…중앙아시아와 우랄 인근, 알타이지역이 한민족의 기원이 시작된 장소”라 밝힌 바 있으며,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서 동방으로 나와서…”라 하였다. 이렇듯 한민족의 시원지를 바이칼호, 몽골 지방 또는 파미르고원, 천산지역으로 보는 것이 다수 견해다. 


한국 고대문명이 한반도 북부와 시베리아·만주·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북방기마민족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배경이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오늘날의 조선상고사)에서 “조선족·흉노족은 우랄어족으로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는데…”, “여진·선비·몽골·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 “조선·만주·몽골·터키 네 민족은 혈족”, “조선이나 만주나 몽골·터키·헝가리·핀란드가 3천년 이전에는 적확히 하나의 혈족”이라 밝힌 바 있다. 


이를 좀 더 부연한다면 단군조선이 BC 2333년에 건국되었고 단군조선 건국세력인 고조선족은 세월이 흐르면서 부여·선비·몽골·오환·거란·여진 등으로 이어지고, 보다 일찍이 분파된 흉노족은 이후 훈족·돌궐·위구르·셀주크튀르크·오스만튀르크·터키 등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흉노를 ‘호(胡)’로 칭하고 선비 등 그 동쪽 민족을 ‘동호(東胡)’로 칭하고 있다. 당시 문헌에서 호와 동호의 구별이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호’는 튀르크 계, ‘동호’는 몽골·퉁구스 계로 보여진다. 이들이 지내온 곳, 살고 있는 곳에서는 언어는 물론, 생활풍습, 사회체제, 전쟁양식 등에서 너무나 많은 유사점들이 나타나고 있어 고대로부터의 그들의 관계가 남다르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가늠케 한다.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세계를 놀라게 하다 


한편, 중국의 황허문명과 궤를 달리하는 북방알타이 문화권은 한반도, 만주, 몽골 및 내몽골, 신장위구르, 티벳,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 및 남러시아, 터키, 동부유럽 등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기마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다. 역사시대에 들어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서부에서는 스키타이, 흉노, 훈, 돌궐, 위구르, 토번, 서하, 셀주크·오스만튀크르 등이, 동부에서는 선비, 유연, 수-당(선비), 요(거란), 금-후금(여진·청), 원-티무르-무굴(몽골) 등의 국가가 건설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내몽골 자치구의 요령성 접경 홍산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대거 발굴되었고 최근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 유물들은 놀랍게도 BC 7000년 전까지 소급되는 고대 문명공동체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특히 1983~85년 홍산지역의 「우하량」에서 BC 3500~3000년경 초기 중앙집권국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적석총, 여신묘, 대형제단, 옥기 등 유적·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중요한 포인트인데요. 이들 초기 문명유물들은 계급이 완전분화되고, 사회적분업이 이루어진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대발견이었습니다. 의문의 이 문명은 중국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그동안 중국이 자신들의 문명이나 문화라고 주장한 바 없었던 지역에서 홀연히 나타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4대 문명권보다 적어도 1,000년 이상 앞서는 고대문명으로, 세계역사와 문화사를 다시 쓸 수밖에 없게 하고 있는 「홍산문화」다. 중국 역시 자국 영토 내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선 고대문명이 출현한 데 대해 놀라고 있는데, 중국의 역사공정은 바로 이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영토로 편입된 만주(79만㎢)와 내몽골(148만㎢), 신장위구르(166만㎢), 티벳(127만㎢)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황허 문명과 확연히 구분되는 또 다른 문명 지역이며, 현재 동북·서북·서남공정 등의 이름으로 역사공정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인근 하가점이란 촌락에서 발굴된 「하가점하층문화」는 BC 2400~1500년 청동기 시대에 지금의 난하-요하 사이의 요서지방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 문화 역시 중국의 황허문명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명권이다. 따라서 이 「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는 한민족 고대국가인 환국·배달국·고조선의 존재와 직결된다고 볼 수도 있다. 한민족의 유래와 고대역사가 밝혀지는 무대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데도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외면합니다. 그러니 우리 고대사를 잃어버린 역사라고 할 수 밖에요.”


김석동 대표의 말투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에 따르면, 한(韓)민족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다. 단일민족이란 이름으로 미화할 대상이 아니며 그럴 이유도 없다. 광활한 유라시아 동·서 스텝지역에서 오랜 기간 삶을 영위했던 기마유목민족의 면면한 DNA가 오늘날 한국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거다. 


우리의 고대국가에서는 언어·관습제도 등 많은 부분에서 알타이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들이 알타이계의 부족연맹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다른 세상과 교류·협력했고 또 다른 세력과 투쟁하면서 살아왔는지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게 김석동 대표의 이야기다. 고대 화려한 역사와 어렵고 참담했던 기록으로부터 시작해 현재 우리가 묵도하는 기적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적 인과관계를 톺아보며 우리의 고대사를 다시금 조명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흐름에는 마음을 닫아버리고, 실존했던 고조선의 비중이 우리의 역사에서 이렇게 작아진 데 대해서는 눈을 닫아버리고, 중국이 가져가는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인식을 닫아버려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04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설계하다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설계 


“한민족은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 고조선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ㆍ발해로 이어지는 북방지배의 맥을 상실하면서 한반도로 영역이 축소되었지요. 결과적으로 작은 반도국가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지면서 뿌리를 같이하는 만주 세력과 단절되고 기마군단의 에너지가 약화된 겁니다. 그러니 안타까울 수 밖에요.”


하지만 마냥 아쉬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지금, 그리고 미래다.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설계함에 있어 이런 웅혼한 한민족의 DNA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김석동 대표가 역설하는 대한민국 경제와 한민족 미래의 열쇠는 첫째, 기마민족 DNA에 기초한 Dynamic Energy다. 강력하고 신뢰받는 리더십에 구성원들의 강한 결속력, 거기에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문화를 가리킨다. 두 번째는 열린 세계와의 적극적인 교류와 협력이다. 인류의 문화는 서로 다른 것과 충돌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하고 발전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 이런 미래ㆍ개방형 성장 에너지로 무장한 SMART 국가로 발전해 나가자는 게 김석동 대표의 주장이다.

 

“미래형ㆍ개방형 Global 성장 에너지는 다른 게 아닙니다. 예컨대, 철의 실크로드와 두만강 세계도시, 남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가스관 사업 프로젝트 같은 겁니다. ITㆍBTㆍETㆍNT 등 첨단 산업기술과 금융, 물류, 한류 등의 소프트 산업도 그 예가 될 수 있겠지요.”


김석동 대표가 그리는 미래의 통일한국은 세계 6위의 경제 대국이다. 역동적이고 대외지향적인 경제 운용과 남북통일을 통해 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자는 것이다. 실제 우리 경제는 지난 2014년 스페인을 넘어섰다. 이런 추세라면 2021년 이태리를 제치고 10위에 진입하는 것도 상상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2046년 러시아를 제치면서 세계 6위의 경제대국도 가능한 이야기다. 한 평생 금융인으로 살아온 김태동 대표의 역사적 관점에서의 당부는 그것이었다. 


그렇게 90분의 특강이 끝나고 남는 진한 여운들.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한 좌우 이념 논쟁이 한창인 지금, 오히려 우리는 훨씬 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듯 중앙아시아의 역사는 공백이자 진공 상태다. 게다가 세계를 지배했던 이들의 역사가 우리 한민족의 고대사와 이어져 있다니. 제대로 배운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들. 오늘 김석동 대표의 강의 내용에서 반가움과 답답함이 교차했던 이유다. 역사 교육의 편향성을 바로잡자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작금,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우리 고대사의 실종 문제도 함께 거론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까?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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