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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 민주주의: 여론은 없다, 취향만 있을 뿐

[방구석5분혁신.디지털&AI]

by AI혁신가이드 안병민 대표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 그곳은 시끄러웠다. 땀 냄새가 났고, 침이 튀었다.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고함소리를 억지로 들어야 했다. 불쾌하고 비효율적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소음과 마찰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합의가 태어났다.


이제 시선을 출근길 지하철로 옮겨보자. 수십 명의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지만, 차 안은 절간처럼 고요하다.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만 스마트폰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누군가는 분노에 찬 얼굴로 댓글을 달고, 바로 옆사람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만, 인지적으로 그들은 완벽하게 분리된, 서로 다른 우주를 살고 있다. 이 침묵의 공간에서 민주주의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해체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여론(Public Opinion)’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수의 시민이 공유하는 상식과 사실을 전제로, 토론을 통해 최적의 합의점을 찾아갈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AI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론은 더 이상 자연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철저히 ‘설계’된다.


내가 스마트폰에서 뉴스 하나를 클릭했다면? 무심코 본 그 기사에 내 시선이 0.5초 더 머물렀다면? AI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이 사용자는 이런 종류의 자극에 반응하는군.” AI에게 나는 시민이 아니다. 체류 시간을 늘려 광고 수익을 창출해야 할 데이터 포인트다. 즉시 나의 피드는 그와 유사한 논조, 비슷한 분노, 같은 색깔의 정보들로 최적화된다.


진보 성향의 사용자에게는 세상이 부패하고 불공정한 곳으로 보이는 증거들만 배달된다. 보수 성향의 사용자에게는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성 뉴스들만 공급된다. 우리는 같은 나라에 살지만, 알고리즘이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벽 안에서 서로 다른 ‘사실’을 믿으며 살아간다. 단순한 취향 존중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인 ‘공통의 현실(Shared Reality)’이 붕괴되는 과정이다. 서로가 보고 있는 현실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겠는가?


이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 무서운 진짜 이유? 우리 사회의 인지적 면역력을 바닥까지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반대 의견은 자동으로 차단된다. 내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들만 24시간 공급된다. 이 달콤한 확증 편향의 누에고치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확신에 찬 맹인이 되어간다. AI가 만들어낸 ‘딥페이크’라는 바이러스는 이 틈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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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비즈랩] 대표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HSE MBA / *저서 [마케팅 리스타트]+[경영일탈]+[그래서 캐주얼]+[숨은혁신찾기]+[사장을 위한 노자]+[주4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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