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맷(Format)된 인간: 기록을 지워 직함을 얻다

[방구석5분혁신.사회혁신]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딜리트(Delete)' 키는 현대의 단두대다. 피는 튀지 않는다. 비명도 없다. 오직 0과 1의 배열이 바뀔 뿐이다. 매일 밤, 여의도 캠프의 불 꺼진 사무실에서는 무음(無音)의 처형식이 거행된다. 잘려 나가는 것은 목이 아니라 과거다. 처형자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과거의 변절에는 피 냄새가 났다. 고문실의 공포 속에서든, 회유의 압박 속에서든, 사상을 바꾸는 일은 내면을 부정하는 고통을 동반했다. 전향서에는 잉크 자국보다 깊은 자기 부정의 흔적이 남았다. 그것은 비극이거나 배신일지언정, 최소한 인간적인 고뇌의 산물이었다.


지금의 변절은 무취(無臭)다. 클릭 한 번이면 족하다. 현대 정치에서 '변신'은 고뇌의 영역에서 리스크 관리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사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은 밤새운 번민이 아니다. 과거의 발언을 검색하고 삭제하는 신속한 행정 처리 능력이다. 말을 바꾸는 속도보다 기록을 지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과거는 철회되지 않는다. 영구 삭제될 뿐이다.


선거철 인재 영입과 고위직 검증 과정은 이 '디지털 방역'의 기술을 겨루는 장이다. 여의도 입성을 노리는 인사가 가장 먼저 수행하는 의식은 정책 연구가 아니다. 유튜브 채널을 비공개로 돌리고, SNS 게시물을 날린다. 어제 저 편의 저격수가 오늘 이 편의 방패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서버가 데이터를 삭제하는 시간과 일치한다.


여기에 기막힌 모순이 있다. 시스템은 그가 과거에 보여준 날카로운 비판과 영향력을 탐내 영입한다. 그러나 영입이 확정되는 순간, 그 영향력의 근거였던 과거의 말들은 '결격 사유'로 돌변한다. 영입의 근거가, 제거해야 할 리스크가 된다. 인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던 기록을 스스로 검열하고 삭제한다. 역설적으로 '무해한 존재'가 되었음을, 즉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음을 입증해야 직함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자아는 거세된다. 과거의 전향이 생존을 위한 타율적 굴종이었다면, 작금의 디지털 세탁은 더 높은 권력을 향한 자발적이고 합리적인 기회비용 지불이다. 소신은 화폐로 전락했다. 직함을 구매하기 위해 지불하고 털어버려야 할 우수리일 뿐.


팬덤 정치와 진영 논리는 이 거래의 공범이다.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철학을 가졌는가가 아니다. 현재 우리 편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가다. 어제의 비판은 오늘의 충성으로 상쇄된다. 보상 구조는 명확하다. 오늘의 수치심은 내일의 직함으로 교환된다. 수치심은 더 이상 윤리적 덕목이 아니다. 통제 가능한 변수, 제거 가능한 버그(Bug)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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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와 공천 심사는 누가 더 유능한가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다. 누가 더 자신의 과거를 깔끔하게 포맷했는가를 확인하는 기술적 검증대다. 흔적 없이 나타난 후보자는 '준비된 인사'다. 소신을 남겨둔 자는 '리스크'다.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획득한 직함 위에는 권한만 있을 뿐, 그 권한을 지탱할 철학적 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신념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다. 상황에 맞춰 언제든 다시 포맷 가능한 '공백의 관료'들이다.


삭제된 것은 게시물만이 아니다. 정치라는 행위가 마땅히 가져야 할 무게와 책임, 그리고 한 인간의 철학적 뿌리가 함께 잘려 나갔다.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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