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경영혁신]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현대 기업의 사무실은 거대한 연극 무대와 같다. 키보드 소리는 요란하고, 모니터 불빛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으며, 회의실은 언제나 예약 만료 상태다. 겉만 보면, 치열하게 돌아가는 조직이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글쎄다. 모두가 숨 가쁘게 달리고 있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마치 제자리에서 러닝머신 위를 열심히 달리는 것과 같은 이 집단적 행위, 바로 ‘가짜 노동(Fake Work)’의 실체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조직을 망가뜨리는 이 가짜 노동의 주범이 게으른 직원이 아니라, 시스템에 가장 충실한 ‘모범 직원’들이라는 점이다.
가짜 노동은 표면적으로 완벽한 업무의 형태를 띤다. 화려한 그래프로 채워진 보고서, 참조인만 수십 명에 달하는 이메일, 결론 없이 다음 일정을 잡는 것으로 끝나는 회의. 이 모든 활동은 ‘일’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인 가치나 결과물과는 무관하다. 업무라기보다 일종의 ‘알리바이’에 가깝다. “나는 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행정적 방어기제다. 문제는 이 가짜 일이 진짜 일을 밀어내고 조직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는 데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냐고? 그 근원에는 불신과 공포가 결합된 기형적인 평가 구조가 자리한다. 많은 기업이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흔적’을 보상한다. 문제를 10분 만에 해결하고 퇴근하는 직원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시간 동안 야근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직원이 ‘고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과는 측정하기 어렵지만, 야근 시간과 문서의 두께는 눈에 확연히 보여서다. 이 왜곡된 신호 체계 속에서 직원들은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모험을 감행할 리 없다. 실패하지 않을 보고서를 다듬는 안전한 길을 택한다.
더 심각한 원인은 ‘권한 없는 책임’이다. 실행의 권한은 주지 않은 채 결과에 대한 책임만 물을 때, 조직은 보고서 공장으로 전락한다. 결정권자가 없는 회의에서는 그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는다. 대신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회의에 부른다. 더 복잡한 승인 절차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서의 목적? 정보 공유가 아니다. 훗날 문제가 터졌을 때 “나는 보고했다”는 면책 사유를 만들기 위한 보험 증서일 뿐. 불신 비용이 문서화된 결과물이 바로 가짜 노동이다.
이러한 가짜 노동은 기업의 ‘혁신 근육’을 마비시킨다. 시장은 분초를 다투며 변하는데, 내부에서는 보고서 양식을 맞추느라 하루를 보낸다. 경쟁사가 프로토타입을 시장에 내놓고 피드백을 받을 때, 이쪽에서는 기획안의 폰트를 수정하고 있다. 가짜 일에 함몰된 조직은 속도전에서 필패한다. 구성원들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며, 무기력한 관성만이 남는다. 단순한 비효율이 아니다. 서서히 진행되는 조직의 괴사(壞死)다.
생산성 혁신은 더 많은 도구를 도입하거나 업무 시간을 늘리는 데서 오지 않는다. 철저한 ‘덜어내기’와 ‘비우기’에서 시작된다. 리더는 “무엇을 더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안 해도 되는가”를 결정해야 한다. 보고를 위한 보고, 결정을 미루기 위한 회의, 보여주기식 평가 지표를 과감히 삭제해야 한다. 핵심은 기술적인 다이어트가 아니다. 심리적 안전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신뢰, 형식보다 본질이 우선이라는 합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직원들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가짜 일을 만들어낸다.
진짜 일은 대개 조용하고, 때로는 위험하며, 무엇보다 결과로 말한다. 반면 가짜 일은 요란하고, 안전하며, 과정으로 포장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회의실에서 가짜 노동이 재생산되고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성실하게 망해갈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덜어내고 본질로 돌아갈 것인가. 회사를 살리는 것은 밤늦도록 켜진 사무실의 불빛이 아니다. 그 불빛 아래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가 하는 냉정한 물음이다.
가짜 노동이라는 잡초를 뽑아내지 않으면, 진짜 혁신의 싹은 결코 틔울 수 없다. 움직임(Motion)과 행동(Action)을 구분하는 통찰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혁신가이드안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