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검버섯

by 장아무개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듬직한 등과 튼튼한 어깨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가족 구성원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기대어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고, 아버지는 가족에게 아낌없는 나무,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존재로 바로 서야 함을 교육받는다. 나의 아버지가 그러한 삶을 살았고, 우리의 아버지가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좌절과 실패 때로는 행복과 감동을 겪으며 현재의 노인이 되었고, 나의 아버지는 손자 손녀들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이제는 할아버지라 불리는 게 더 익숙하겠지만, 나에게만큼은 영원히 아버지라 마음에 새겨진 '그'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졌다.


명절이 되면 매번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올해는 '역귀성'이라는 걸 처음 경험해봤다. 아무리 빨리 내려간다고 해도 명절 정체가 없는 시간이 없을 수 없고, 대여섯 시간에 걸쳐 운전을 하고 내려가면 지처버리는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결정했다지만, 이제는 완숙한 노년에 접어든 부모님이 몇 시간 운전을 하고 올라오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역시나 장시간 운전에 지친 아버지는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에 누워 힘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도 이제 늙으신 건가?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시간의 흐름은, 나이 들어감은, 이제는 젊지 않음을 '나' 위주로 생각했기에 나 외에 다른, 그러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인 아버지에게 흘러간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나의 모습이 순간 어색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라니.


누워계신 아버지 곁으로 가서 옆모습을 아버지 몰래 바라보았다. 정면도 아니고 왜 옆모습이었을까. 왜 우리들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까, 뭐가 그리 부끄러워 아버지와 눈 한 번 못 맞추고 있는 걸까. 슬그머니 바라본 아버지의 옆모습은, 세월이 깊이 새겨진 주름살의 굴곡을 더욱 진하게 보여주는 미소를, 어릴 적 내가 봐왔던 그 모습 그대로 짓고 계셨고, 이제는 무료한 생활을 누려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여전히 몸을 움직이는 게 더 익숙해 귀촌 후에도 뜨거운 태양 아래 본인의 꿈을 키우느라 검게 탄 피부가 겨울이 돼도 회복되지 못해 마치 원래의 피부색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앞모습에는 절대 발견할 수 없었던 검버섯이 아버지의 옆모습에, 마치 바이러스가 번지듯 서서히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검버섯이라니, 늙음의 흔적이 저토로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니. 매일 거울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직접 목격하는 아버지는, 서서히 하지만 어느 순간 급속도로 번진 검버섯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언제부터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꽤 많은 수의 검버섯을 보고 지금까지의 나의 무심함에 반성하고, 현재의 아버지를 갉아먹고 있는 검버섯을 보고도 아무 말, 아무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멍청함에 반성한다. 어쩌면 지금 글은 그런 반성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고향 집에 가면, 테이블의 유리와 상판 사이에는 어느 집에나 있을 사진이 몇 장 꽂혀 있다. 그 속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 20년 전, 40년 전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어릴 적 봐왔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어째서 지금의 아버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늙어 힘없는 미소를 짓고 계신 걸까.


사람이 태어나면서 달고 있는 입은 먹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닐텐데, 속에 있는 말을 털어 놓기 위한 기능도 충분히 할 수 있을텐데. 과연 나는 언제쯤 아버지의 눈을, 아버지의 주름살을, 아버지의 검버섯을 똑바로 바라보며 '왜 이리 늙으셨어요.'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네가 손이 차가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