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빨랫줄에 걸린 모르는 사람의 속옷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였다.
내가 일곱 살 즈음의 일이었다.
아빠친구분의 집들이에 우리 가족이 초대되었다.
아파트였는지 단독주택이었는지 기억은 흐리지만
내 뇌리에 정확히 존재하는 단 하나의 장면이 있다.
그 집 거실에 놓여 있던 피아노!
식사를 마치자 드디어 동갑내기 그 집 딸이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 실력을 뽐냈다.
생전 처음 보는 연주에 나는 물개박수를 쳤다.
그 건반 소리가 마치 내 마음을 흔드는 것 같았다.
이런 내게 엄마가 너도 피아노 앞에 앉아보라며 부추겼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그 친구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 친구는 나에게 손가락 두 개로 연주할 수 있는
간단한 기술을 가르쳐줬다.
우리 둘은 기다란 피아노의자를 나눠 앉은 채
'젓가락 행진곡'을 함께 연주했다.
그 친구가 마지막에 피아노건반을 주르르륵 빠르게 쓸어내리며
우리의 연주가 아쉽게 끝이 났다.
나는 그 친구가 시키는 대로
손가락 두 개의 역할만 충실히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의 멋진 마무리덕에
흡사 나도 피아니스트가 된 기분이었다.
무대에 선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벅차오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엄마, 아빠도 박수를 친다.
그 순간 나도 그 친구처럼
엄마,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이 된 것 같았다.
부모님들의 박수와 격려,
칭찬을 하기 위해 모든 준비가 끝난 듯한 너그러운 눈빛이
이곳은 내가 사는 세상이랑 다른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이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 집의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박수받는 삶은 얼마나 신날지 궁금했다.
내 삶은 매일매일이 이유가 명확지 않은 비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날이 어린 내가 첫 빈부의 격차를 인지한 날이기도 하였다.
우리 동네 골목의 생활수준은 다들 고만고만했다.
이렇게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어린 내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 세계의 입장권이 돈이라는 것도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와 아빠는
쓰고 있던 다정한 가면을 벗고 이내 익숙한 얼굴로 돌아왔다.
나는 그 긴 침묵이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증거라는 걸 쉽게 알아차렸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나는 국민학생이 되었고
우리 집은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우리 동네 생활수준이 비슷했다 하더라도
다른 친구들은 국민학생이 되자
학원 한 개쯤은 다니고 있었다.
취학 전 유치원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은
동네 미술학원이나, 주산학원이라도 다니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나는 일곱 살 때 한 달 정도 미술학원에 다녔지만
그마저도 한 달 이상 허락되진 않았다.
국민학교 입학 즈음을 돌이켜 보면
당시 나는 일터에 나가신 엄마를 대신해
남동생을 주로 돌보았고
연탄갈기, 설거지 등등 집안일을 맡아했다.
엄마가 일 나가며 동생 돌보는 품삯처럼 손에 쥐어주시던 100원으로
50원은 사탕이나 껌 같은 간식거리를,
남은 50원으론 종이인형이나 동그란 딱지 등 놀잇감을 사며
무료한 시간을 버텼다.
뉘엿뉘엿 해가 질 즈음 지친 엄마의 발소리가 문밖으로 들려오면
비로소 나도 보호받을 수 있음에 안심이 되곤 했다.
이런 형편에
내게 국민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학원이 당연시될리는 없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반 여자친구들은
하교 후 모두 피아노학원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만남을 가졌다.
여자친구들은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기다렸다는 듯
교실 앞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리곤 교실마다 놓여있던 풍금 페달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쟁적으로 밟으며
피아노 실력을 뽐냈다.
내가 일곱 살 때 아빠친구의 딸에게 배웠던
젓가락 행진곡이나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것이었다.
젓가락 행진곡은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에
타이밍을 보곤 다음 수업종이 울리기 직전
1분전 즈음 노렸다.
그때가 경쟁이 가장 적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나는 '풍금 무리' 틈에 끼어들었다.
젓가락 행진곡을 조급하게 연주했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걸어 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의 피아노로망은
충족되지 않았다.
여전히 피아노학원 모임엔 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나답지 않게 엄마에게 떼를 써볼 작정이었다.
반드시 이루리라 나의 첫 떼!
어느 날 나는 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용기 내 입을 떼었다.
"엄마 피아노 학원 보내주시면 안 돼요?
친구들도 다 가고 나도 피아노 배우고 싶어요.
정말 열심히 할게요"
엄마는 늘 그렇듯 돈이 없어서 안된다고 하셨다.
내 모든 좌절의 이유는 돈이었으므로
이번에도 예상된 답이었다.
늘 그랬기 때문에
나는 이번엔 떼를 쓸 작정을 한 것이다.
이번만은 물러서기 싫었다.
울면서 몇 날 며칠을 떼썼던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최초의 작정한 떼는
결국 통했다.
그때 내가 느낀 유능감은
통쾌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이었다.
너무 큰 성취였다.
그리고 또 떼를 쓰면 통할 수도 있다는
희망의 길이 열린 것이었다.
드디어 나는 힘겹게 피아노 학원 입장권을 얻었다.
처음 가져본 핑크색 피아노 가방이
너무 자랑스러워 학교까지 들고 다녔다.
바이엘 상권이 들은 그 가방은
내 보물 1호였고 학교에 들고 다녔다는 건
나도 피아노모임 입장권이 있다는
선포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피아노 학원에 다닌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똑같은 걸 해볼 수 있다는 사실이
꼭 나를 안심시키는 것 만 같았다.
"너도 사랑받는 아이야. 다른 친구들처럼 똑같이"
나는 그 피아노모임 입장권 하나로
단숨에 눈에 띄게 당당해졌다.
친구들의 피아노학원 모임에도 낄 수 있었고
쉬는 시간 교실 앞에 뛰쳐나가
풍금 페달을 밟는 행위에도 머뭇거림이 없어졌다.
마치 나의 당연한 권리인 듯 아이들에게
풍금을 칠 순번을 정해 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달콤한 한 달이 지나고
두 달로 접어드는 어느 날이었다.
얼마 전부터 자꾸 우리 집 빨랫줄에
모르는 사람의 속옷이 걸려있는 게 발견되곤 했다.
가끔은 여성 속옷, 가끔은 남성속옷,
가끔은 아이들 속옷 같은 것도 걸려있었다.
그 시절엔 세탁기나 건조기가 없었다.
엄마에게 퇴근 후 그날 발생한
자잘한 손빨래는 익숙한 루틴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걸려있던 낯선 빨래의 존재를
나는 무심히 스쳤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퇴근 후 엄마는 당연한 듯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간 무시했던 낯선 빨래의 존재에 대해 물었다.
"엄마! 왜 모르는 사람 빨래가
자꾸 우리 집 빨랫줄에 걸려 있는 거예요? “
엄마는 무심히 나를 보며 말했다.
"너네 피아노선생님 빨래야!
내가 너 피아노 보내려고
피아노 원장님 빨래받아서
해주고 있는 거잖아!"
순간 심장이 발끝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눈앞의 빨래들이 일렁였다.
나는 가끔 그날의 감정을 꺼내어 마주해 해석해 보곤 한다.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했던 어린 나를 살포시 안고 말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
이 말을 건네기까지 나는 수십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손빨래를 하던 엄마의 무심한 등과,
원망하듯 필터 없이 내게 쏟아 놓은 진실을 마주한 순간
나는 나를 혐오했던 것 같다.
나는 내 피아노학원을 위해
엄마에게 피아노선생님 가족의
속옷을 빨게 한 '나쁜 딸'이었다.
반면 엄마는 딸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진정한 '희생의 아이콘'이었다.
또 그동안 나에게만 유독 달랐던 원장님이 온도차의
이유를 깨달았다.
다시는 피아노 학원에서 예전처럼 해맑게 웃을 수 없으리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감정이 나를 사로잡아
한동안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던 그 골목 초입에서
늘 주춤했다.
나는 내가 아주 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혹시 골목에서라도 마주칠
피아노원장님을 피해 도망 다녔다.
나는 피아노 원장님의 냉랭함이
내가 피아노를 잘 못 쳐서 인 줄 알았다.
연습할 피아노가 집에 없던 나는
늘 접힌 종이건반을 펴 두 손을 올리곤
성실히 숙제를 했다.
당시엔 연습 횟수만큼 진도 노트에
사과를 그려갔다.
숙제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칭찬한마디가 나에게 만은 늘 예외였다.
숙제를 안 해온 친구들에게 조차
애정 섞인 잔소리가 존재했는데
나는 꼭 투명인간 같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마주한 그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사과를 그리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바로 그다음 날 말했다.
피아노를 그만 다니겠다고
엄마는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고단한 손빨래를 끝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한 번만 물어주길 바랐다
“ㅇㅇ야 왜 안 다닌다고 하는 거야. 너 피아노 좋아했잖아”라고
나는 그때 어쩌면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엄마가 한 번만 물어줬다면
"엄마 떼써서 미안해"라고 말하곤
피아노원장님이 나에게 보여줬던 냉랭함에 대해
일러바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그래" 하고 말았다.
나는 '그래'라는 두 글자에 울고 싶은 마음을 멈췄다.
내가 잘못해서 엄마가 나에게 화가 많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첫 피아노 학원은 또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나는 학원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딱 두 번, 취학 전 미술학원과, 입학 후 피아노 학원 모두 딱 한 달이었다.
이후 난 늘 배움에 목마른 아이로 성장한다.
그래서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한다.
공부가 나의 미래를 구원해 줄 것처럼
의미 없는 노력을 반복한다.
그때 피아노 학원에서 배웠던
"딸랑딸랑 딸랑 바둑이 방울 잘도 울린다~"라는 연주곡과
왼손으로 쳤던 "도솔미솔 도솔미솔~ "은 아직도 잊히지 않고
가끔 내 머릿속에서 되살아 난다.
그날 엄마의 손빨래하던 무심한 등과 함께
결혼해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엄마의 고단한 삶에 많이 공감했지만
같은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지점에서
늘 혼란스러웠다.
특히 내가 내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나는 이런 엄마의 행동에 대해
늘 물음표를 달고 살았다.
엄마가 나를 위해
피아노원장의 빨래를 해주고
그 사실을 필터 없이 어린 내게 알린 것은
어린 딸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고
나는 결론 내렸다.
오히려 내게 진실이 전해진 그 순간의
무게와 분위기는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나는 나의 엄마가 보통엄마랑은
다른 분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밖엔 없었다.
어쩌면 엄마의 시작은
정말 어린 딸에게 남의 집 손빨래를
맡아해서라도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은
고귀한 희생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이렇게까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고귀한 엄마야'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동기가 어찌 되었던 나였다면
내 자식이 그렇게 떼를 썼다면.
나는 정식 입장료를 내지 않은 곳에
절대로 내 귀한 아이를 들여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우리는 정말 가난하다고
아이를 설득하고 아이의 원망이
나를 향하게 하는 쪽을 선택
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집 밖 그곳에서 마저
천덕꾸러기가 될 거라곤 정말
예상치 못했을까?
또 내가 엄마였더라면
빨래를 절대로 아이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하진 않았을 것 같다.
들켰더라도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묻거든 그냥 둘러댔을 것이다.
그리곤 혹시 피아노 선생님이
안 보이는 곳에서 차별하진 않는지
꼼꼼히 챙겨 물었을 것이다.
특히 피아노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래"라고 무성의하게
동의하진 않았을 것이다.
상처받은 어린 자식을 나는
절대로 혼자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였다면 피아노원장에게 가서
빨랫감을 뒤집어엎으며
왜 우리 딸을 차별하냐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와 딸에게 말할 것 같다.
동네방네 이 선생의 미성숙한 인간성에 대해
소문을 낼 거라고 그렇게 어린 딸과 실천하지도 못할
여러 가지 망신주기 복수방법에 대해
한편이 되어 작당모의를 실컷 하곤
착한 우리가 참자며 웃어넘길 것 같다.
가장 중요하게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다.
네가 원장에게 미움받은 건
원장이 인성이 안 좋아서 이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엄마는 돈대신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노동력으로 정당하게 지불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도 의심 많은 딸을 위해 당시 최저 시급으로
계산해서 숫자로 보여줄 것이다.
엄마가 돈대신 노동력을 선택한 건
그냥 엄마 선택이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렇게라도 연약한 아이의 자존감을 사수했을 것이다.
나는 자라면서 가난은 참을 수 있었다.
다만 부모의 외면과 방치로 인해
외부로부터 수시로 침범되어 상처받던
내 낮은 심리적 울타리에 대해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부모님을
증오했다. 나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지켜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낳은 거야?
이런 무서운 세상에 왜 나를 나은 거야?
동생 보모로 사용하려고 나를 나은 거야?'
나는 그게 전부 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호해야 할 만큼 뛰어나지 않아
엄마가 나를 지키지 않는다라고 느꼈다.
가끔은 엄마마저 그들과 한편인 듯 동조했고
오히려 더 심하게 나를 향해 공격한다고 까지 느꼈다.
한마디면 되었는데..
아니면 그냥 안아만 줘도 되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겐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엄마가 미안해 딸"
이 말 한마디가 그녀의 옵션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의 세계에서 피해자는 언제나 엄마 자신이었다.
자식을 위해 남의 집 속옷까지 빠는,
세상에서 가장 가엽고 숭고한 희생양.
이후 내가 성장해
엄마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나이가 될수록
엄마가 다른 보통엄마들이랑
다르다는 걸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나의 엄마가 나르시시스트엄마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후 나에겐 치유의 과정과
어린 나를 향한 친절한 설명이 필요했다.
어릴 때 "그래"라는 두 글자에 좌절되어 마음껏 울지 못했던 내가
지금이라도 울고 싶다고 다 큰 나에게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50이 되어서야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주기로 했다.
내가 나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내가 나의 감정을 인정해 주고
내가 나에게 엄마를 대신해 그때 혼자 두어 미안하다고 사과해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