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종교에 빠진 딸을 방관하던 나의 나르시시스트엄마
"나를 제발 데리고 가세요.
신이 있다면 제발 나를 흔적 없이 없애 주세요."
그날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 교회는 사이비였으므로.
열다섯 살의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서 역설적으로 나의 소멸을 원했다.
나는 그날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당첨의 주인공'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엄마는 늘 교회와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는 엄마의 '트로피'를 전시하기 좋은 곳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남동생의 고사리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는 것만큼은 금지하지 않았다. 남동생이 다니던 유치원 또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나 역시 엄마를 따라 자연스레 교회라는 공간에 스며들었다.
그곳에 가면 모두 친절의 가면을 쓰고 나를 따뜻하게 대해준다. 어린 나는 용돈을 쪼개 매주 내는 헌금이 내가 받은 '친절에 대한 비용'이라 생각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간파했다. 엄마의 사랑조차 내겐 공짜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교회에서 동경한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하나님은 누구나 공평하게 사랑하신다'
남동생과의 차별을 공기처럼 마시며 자란 내게 ‘불공평’은 지독한 발작 버튼이었다.
어떤 갈등이 생기면 나는 늘 ‘칼 같은 공평함’으로 해결하려 들었다.'공평'은 내게 가장 정의로운 해답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는 상황조차 마음이 불편했다. 모두가 똑같이 공평해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내게는 일종의 '공평에 대한 강박'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내게 신이 우리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달콤한 구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눈부신 봄날이었다.
새 학기 교실 특유의 서먹한 공기를 피해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가스펠 송이 들렸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닌 내게는 뼈에 새겨진 멜로디였다. 노래를 흥얼거리던 친구와 나는 그렇게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말을 건다
"00야~,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서 놀래? 엄마가 떡볶이 해주신대"
나는 반가움에 답했다.
"그래~"
의심 없이 따라간 그 집의 공기는 보통의 가정집과 달랐다. 살림살이도 별로 없었고 벽면엔 예수님 사진이 걸려있었다. 꼭 금방 이사를 온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금방 이사를 갈 것 같기도 했다.
친구의 어머님은 당시 '휴거'를 주장하는 사이비교회에 다니셨고 '떡볶이 허니문'이 끝나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00야~1992년 10월 28일이 되면 세상이 끝나고 선택된 자들만 하나님 곁으로 올라가. 너는 착하게 살아서 선택된 거고 이런 비밀을 알게 된 거야. 이게 큰 은혜지 우리 같이가자, 못 올라가면 세상은 이렇게 멸망해"
그녀는 세상이 멸망하는 무시무시한 그림들을 들이밀었다. 조악하게 편집된 사진들이 웃기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처음엔 내가 배운 기독교 교리를 들이대며 논리적으로 반발해 보았지만, 내 얕은 지식은 금세 밑천을 드러냈다. 떡볶이 모임은 한 달 두 달 내가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되었고, 친구는 교실에서도 내가 그것을 믿는지 믿는 척하는지 감시하는 것 같았다. 이내 나는 백기를 들었다. 사실 처음엔 그냥 설득된 척했다.
사실 나는 학교 끝나고 매일 제공해 주시던 그 떡볶이에 항복한 것이다. 나는 나의 엄마가 있는 나의 집에 돌아가기 싫었다.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나는 엄마가 있는 우리 집보다 이상한 교리를 읊어대는 이곳이 더 안전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친구집엔 나 말고도 떡볶이에 넘어온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열명 넘게 모여 기도를 했다. 학교 끝나고 그 집에 가서 떡볶이를 먹고, 기도하고, 세뇌를 당하는 게 우리 열 명의 일과였다.
그 친구 어머니는 주말마다 우리들을 가이드처럼 직접 데리고 그 교회로 인도했다.
나는 여름 방학땐 그 교회에서 주최하는 캠프 같은 걸 갔다. 그 친구는 공짜고 축제 같은 재미있는 캠프라고 했다. 나는 집을 떠나는 일은 뭐든 좋았다. 게다가 공짜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캠프가 공짜일리 없다. 아마도 그 친구 어머님이 다 지불하셨던 것 같다. 당시 곧 세상이 끝나므로 많은 교인들이 재산을 스스로 헌납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가 그 친구 어머님은 나와 친구들에게 떡볶이를 제공하고, 가끔은 그 비싼 바나나를 제공하기도 했다. 교회를 데려가고 밥을 사주고 하는 모든 행위들엔 그분의 진심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 선행이 곧 올라갈 천국에 포인트를 쌓는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내 기억은 해리를 겪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휴거가 된다는 그날 그곳에 내가 있었는지 그냥 집에서 조용히 휴거가 되기를 기다렸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 나는 이 친구와 1년간 어울렸는데 그때 내가 겪은 충격적인 일들을 일터에서 돌아온 엄마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 털어놨다는 것이다. 나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무서운 경험이었기 때문에 어른의 개입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엄마에게 도와달라는 'SOS'를 친 것 과 같았다.
엄마는 이런 내 말을 듣고도 남일 말하듯 말했다.
"너 그런데 다니면 안 돼~ 이단이야 이단. 그냥 여기 옆에 교회나 다녀"
나는 사이비 종교 생활을 일 년 정도 유지했고 점점 심각한 수준이 되어갔다. 엄마는 늘 나의 심각성을 남일처럼 대했다. 물론 이곳이 이단이라는 정보를 주긴 했지만, 부모로서 대응했다기보다는 그냥 타인에게 조언하는 수준의 대응이었다.
이 지점이 보통의 엄마들이랑 나의 엄마가 많이 다른 점이다. 엄마는 그냥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엄마는 그 시절 엄마의 외모치장이나, 남동생의 트로피 노릇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는 엄마가 있었지만 엄마가 없는 것과 같았다.
나도 자식을 키우지만 내 자식이 이런 헛소리를 하고 주말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온다면 적극적으로 조취를 취하고 정신과에라도 데리고 갈 것이다. 엄마가 한것은 가끔 목사님을 집으로 초대해 내머리에 안수기도를 받게했다. 내가 귀신이라도 씐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것 뿐이었다. 엄마는 그 종교가 사이비라고 만천하에 밝혀지는 그 순간까지도 나를 위험 속에 방치했다.
쉰살이 된 지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참 '운이 좋은 아이'였다고 생각한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은 본인이 취약하다는 힌트를 걸음마다 흘리고 다닌다. 꼭 누군가가 알아보고 도와달라는 듯이 말이다. 어떤 포식자들에게 그 힌트들은 너무도 정복하기 쉬운 먹잇감이라는 표식이 되기도 한다.
돌아보면 나 또한 너무 위험한 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생존해 있지 않은가?
생존 자체로 나는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고 그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생존했기에 나는 생명 같은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하여튼 한바탕 휴거 소동이 끝나고 던진 엄마의 반응도 이 정도였다.
"거봐, 내가 그거 이단이라고 했잖아~ 정신 차리고 엄마 이거나 도와줘"
휴거가 되지 않아 충격과 허망함에 빠진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그렇게 사라지고 싶었을까?
'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엄마가 그제야 나의 소중함을 알게 되지 않을까?'
나는 이걸 기대했던 것 같다. 지금은 내가 곁에 있어서 엄마가 내 소중함을 잘 모르지만 막상 내가 없어지면 그때서야 나를 사랑했다는 걸 깨닫고 울어주길 바랐던 것이다.
1992년 10월 28일 밤, 세상이 멸망하길 기다렸던 그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그 밤, 나는 구원보다 실종을 꿈꿨던건 아닐까?
열다섯 살의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서 역설적으로 나의 소멸을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