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홀어머니 밑에서 시작된 K-장녀라는 형벌
엄마의 사주를 받아 딸을 억지로 상고에 밀어 넣은 지 몇 달 되지 않아, 아빠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빠가 떠난 그날은 분홍 벚꽃이 아름답게 흩날리던 4월 중순이었다. 온 세상이 하얗고 분홍빛으로 물든, 누구에게나 공짜 꽃길을 선물하던 동화 같은 날.
'아빠도 그 꽃길을 밟고 하늘로 갔을까?'
나는 죽은 아빠가 그 꽃길을 걸어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40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생을 마감하기엔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날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피어나는 '생명 자체'인 그날이, 역설적이게도 내게는 무척이나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아빠는 단 한 마디의 작별 인사도 없이 말 그대로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그날 나는 마음껏 울지 못했다. 상고에 입학하고 나서 어린 마음에 아빠를 두고두고 원망하려 했는데, 그럴 기회조차 사라졌다. 아빠의 죽음 앞에서 나 또한 '갑자기' 아빠를 용서해야만 했다. 고작 열일곱의 나는 이제 원망할 대상이 사라졌으므로, 누군가를 미워할 권리마저 빼앗겨 버렸다.
나는 억지로 진학한 상업고등학교의 교복이 부끄러웠다. 마치 '나는 공부 못해서 대학을 포기한 애예요'라고 떠들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등굣길 가방 안에서 '딸깍'거리며 부딪히는 주판알 소리조차 수치스러웠다. 버스 안에서는 인문계 교복을 입은 친구들을 피해 멀찍이 섰다. 주판 소리를 들킬까 봐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발가락 끝까지 힘을 주고 버텼다.
길에서 마주치는 인문계 여고생들의 예쁜 세일러복과 양갈래 머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도 저 학교에 가서 저 교복을 입고 싶었는데…'
나의 등하굣길은 매일 못난 열등감을 확인하는 정해진 코스였다.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중학교와 사뭇 달랐다. 이곳에선 '성적'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유일한 방패였던 성적이 힘을 잃자, 작은 키와 갈린 앞니 같은 외모 콤플렉스가 새로운 열등감으로 고개를 들었다. 친구들은 출중한 외모로 벌써 은행원이나 대기업 사원을 꿈꾸고 있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혼란 속에서 나는 3년 내내 이방인처럼 겉돌았다.
그럼에도 나는 공부를 놓지 않았다. 언젠가 성인이 되었을 때 대학에 갈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 희망은 나를 다독여준 유일한 위안이었다. 공부만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임을 증명해 주는 행위였으니까.
아빠가 돌아가신 그날도 나는 독서실에서 중간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평소 왕래가 뜸했던 친척이 나를 급히 찾아왔다.
"00야, 아빠가 돌아가셨대. 얼른 가자."
그 말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버스 창밖 벚꽃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워 나에게 밀려오려는 슬픔을 금세 회수해 갔다. 아빠는 아침에도 나와 눈을 마주쳤고, 전날 밤엔 자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상고 진학을 미안해하던 아빠의 마지막 손길. 그게 마지막 선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어떤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 젊은 여자의 살이 뜯겨 나가는 듯한 비통한 울부짖음. 나의 엄마였다. 엄마는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실신했다. 그제야 아빠의 죽음이 실감 났다. 하지만 내게 슬퍼할 틈은 없었다. 이성을 놓은 엄마를 부축하고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짐승의 포효 같은, 앞뒤 안 맞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곁에 있기 무서울 정도의 슬픔이었다.
그 옆에는 아직 초등학생인 남동생이 상주 표시를 팔에 두른 채, 상황도 모른 채 나를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어른들은 엄마 대신 나를 불러 상의했고, 내게 '이제 네가 아빠 대신 가장'이라고 말했다.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빠가 나를 억지로 상고에 보낸 건 아마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미리 준비한 '신의 한 수'였을 거라고.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아빠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죽은 아빠를 원망한다면 나는 악마 같은 자식이 될 테니까.
얼굴도 모르는 어떤 분은 나를 상고에 진학시킨 아빠에게 감사하라고까지 했다. 아빠가 본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 날줄 미리 알고 나를 상고에 보낸 거라면서 이제 내가 취직해서 아빠역할을 대신하면 되겠다고 정말 다행이라고 들떠 연신 말했다.
장례식 마지막날이었다. 누군가 나와 엄마, 남동생을 부른다.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수의를 입은 아빠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하얀 옷을 입고 누워있는 창백한 아빠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냥 매일 나랑 같이 밥 먹던 아빠랑 똑같이 느껴졌다. 내가 아빠의 죽음을 실감한 건 장례식을 다 치른 후 집에 돌아와서였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야 아빠의 부재에 대해 실감하곤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주는 먹먹하고 깊은 통증을 느꼈다. 아빠의 죽음은 나에게 슬픔보다는 고통에 가까운 통증이었다. 슬픈 게 아니라 아픈 거였다. 일꾼이자 파수꾼처럼 엄마와 동생을 지키느라 미처 하지 못했던 애도가 먹먹하고 깊은 통증으로 밀려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빠를 안고 우는 대신, 아빠가 듣고 싶어 할 말을 해주기로 했다.
"아빠. 내가 취업해서 엄마랑 남동생 잘 돌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동안 속으로 미워해서 미안해. 사랑해 아빠. 잘 가."
마지막날 운구 차량으로 아빠를 옮기던 순간, 영정사진을 들고 걷던 초등학생 남동생의 모습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았다. 훗날 그 장면은 나를 끝없이 희생하도록 채찍질하는 근원이 되었다.
나를 위한 결정을 하고 싶을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올라 스스로를 포기했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공부, 사고 싶은 가방… 나를 위한 모든 행위가 죄악처럼 느껴졌다. 행복에 대한 죄책감은 결국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감정을 무디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고작 열일곱 살, 고1이었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였지만, 그날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나에게 온전히 의지했고, 나는 기꺼이 그 무게를 짊어졌다.
나도 울고 싶었다. 충분히 애도하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무섭고 외로웠다. 내가 붙들고 있던 대학에 대한 알량한 희망마저 그날의 꽃잎과 함께 흩날려 사라졌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