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엄마는 드라마처럼 머리채를 잡혔다.

나르시시스트엄마의 눈물과 수혜자인 남동생이 죄책감을 털어내는 방법

by 보통엄마
Scene #1 <33년 전>


나는 아빠의 죽음 이후 엄마마저 우리를 두고 떠날까 두려웠다. 엄마는 당시 꼭 '사춘기 소녀'처럼 긴 방황을 시작하였고, 그녀의 몸부림을 지켜보는 일은 마치 나에게 내려진 무거운 형벌 같았다.


아빠의 죽음은 자연스레 '엄마와 딸' 역할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나는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희생양 딸' 역할에 더해 아빠가 맡았던 '돌봄자'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매일밤 일을 마친 엄마는 잠깐 집에 들러 옷을 갈아 입 곤 노래방, 술집, 나이트 등으로의 화려한 외출을 감행했다. 어슴프레 동이 트는 새벽녘 술이 덜 깬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잦았다. 나는 그 모습이 무서우면서도, 그래도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했다.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술이 취해 말했다.

"00야~ 나는 나이트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어"


내 생각에 엄마는 그 정도로 빼어난 외모도 아니었고, 노래도 잘 못했다. 그런데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엄마가 꼭 연기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은 흡사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에 푹 빠져있는 여배우 같았다.


쉰 살이 되어 엄마의 인생을 돌아보면 같은 여자로서 남편을 잃은 그 막막함과 외로움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방황 속에 아빠 없이 클 자식들에 대한 걱정 같은 게 조금이라도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나는 엄마에게 그것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그저 엄마는 자식자체보단 자식인 남동생의 성적에만 관심이 있었다. 방황하는 와중에도 남동생의 학원을 더 좋은 곳으로 옮겼고, 남동생의 트로피 노릇에 더욱 집착하였다.


꼭 남동생의 성적이 본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것처럼 남동생을 매일 같이 압박했다. 곁에서 보기 불쌍할 정도였다. 내가 중학생 때 꽤 괜찮은 성적표를 들이밀 땐 '가난한 집에 성적 좋은 딸은 비극'이라며 면박을 주던 사람이 남동생에겐 정 반대로 구는 것이다.


나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장례식장에서 아빠와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결국 공부에 대한 미련은 잠시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엄마가 술에 취해 밤마다 쏟아낸 "돈, 돈, 돈" 돈노래를 제발 멈추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니며 주말엔 고속도로 휴게소 캐셔, 국밥집 서빙등의 일들을 닥치는 대로 했다. 방학 한 달 전엔 친구들에게 부탁해 한 달 이상 일할 공장을 소개받았다. 봉고차를 타고 아침저녁으로 통근하는 외곽에 있는 작은 공장들이었다. 몸은 고됬지만 나는 일머리가 있는 편이라 다음 알바기회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다행히 상고엔 형편이 비슷한 친구들이 많아 조금만 빠르게 움직이면 괜찮은 알바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당시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통하는 게 가장 믿을 만했다.


나는 방학이 지나면 꽤 큰 목돈을 엄마에게 가져다 드릴 수 있었고 엄마는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돈을 주는 나를 반길 뿐이었다. 나 또한 엄마가 나에게 물어주길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를 떠나지만 말아달라고 기도할 뿐이었다.


끊이지 않는 알바 덕에 그런대로 풍족했지만, 나의 마음은 늘 공허했다. 알바한 돈으로는 주로 허기진 남동생의 배를 불리거나, 공허한 나머지 걸인에게 나누거나 그냥 아무 데나 의미 없이 써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 돈으로 나를 위한 건 왠지 마음에 걸려 하나도 하지 못했고 차라리 그 돈을 공중에 흩어버리는 편이 마음 편했다. 돌아보면 많이 안쓰러운 열여덟의 나였다.


그렇게 학생신분으로 돈을 부지런히 벌고 있었지만, 엄마의 긴 방황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내가 계속 돈을 가져다주면 엄마가 우리를 버리는 시기가 늦혀 질 거라고 믿었다.


이젠 늘 부끄러워하던 상고 교복마저 아무 느낌이 없었다. 나에게 교복타령은 사치인지 오래다.


매우 이상했던 그날도 하교 후 그 교복을 입고 언덕이 높은 빌라촌 골목을 올라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여니 입구엔 못 보던 남성의 신발이 놓여있었다. 아빠의 죽음 이후 오랜만에 보는 남성의 신발 한 켤레에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엄마는 평소와 다르게 현관문 앞까지 나와 미소를 띠며 나를 반겼다. 나에겐 익숙한 낯선 사람들 앞에서만 만들어지던 그 억지미소다.


"어서 와 딸~~ 힘들었지?"


"다녀왔습니다..."


나와 그 사내의 눈치를 번갈아 보며 엄마가 말한다.

"어... 여기 전구 고쳐 주시러 오신 분이야, 며칠 전부터 전구가 깜빡여서 엄마가 부탁드렸어"


"네.."


엄마가 쭈뼛거리던 내 머리를 누르며 억지 인사를 시킨다.

"인사드려~~ 제 딸이에요."


의자 위에서 천장의 전구를 갈던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며 다정히 말을 건넨다.

"응.. 네가 00이구나.~"


엄마의 누르는 힘에 못 이겨 내 고개가 억지로 숙여진다.

"안녕하세요~"


나는 엄마가 나를 그 사내에게 소개한 그 순간 알았다. 그 사내는 그냥 단순히 전구를 갈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빠가 돌아가신 지 겨우 일 년 조금 지난 시점이었는데..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이상한 상견례가 끝난 후 이 사내의 정체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알게 될 진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 그날도 하교 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 전 그 일 이후로 왠지 현관문을 열 때마다 그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르게 초인종을 누르곤 했다.


그렇게 고민 끝에 초인종을 누루고 현관문을 여니 그날도 평소 같음 없어야 할 엄마가 있었다. 순간 이상했지만 조심스럽게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누군가 현관문을 부서져라 요란하게 두드렸다. 꼭 예전에 빚쟁이들이 들이닥칠 때랑 비슷했다.


"쾅쾅쾅! 문 열어! 문 열라고!

자식 앞에서 망신 좀 당해봐야지! 쾅쾅쾅! 문 안 열면 경찰 부를 거야. 자식 앞에서 쇠고랑차고 싶어?"


그 소음들로 빌라동 전체가 전쟁난 듯 울려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무슨 일이지?' 나는 상황파악을 위해 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집이 이 불행의 주인공 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내 희망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들은 제대로 찾아온 것이었고 나는 또 그 불행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녀들은 신발을 신은채 거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곧 막장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장면을 연출했다. 그녀들은 순식간에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나는 엄마를 보호하려 그녀들을 가로막고 무슨 일이냐며 따져 물었고 내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도 했다.


그녀들은 오히려 잘되었다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경찰을 부르라고, 자식 앞에서 쇠고랑을 채워 망신을 주겠다며 어디서 들어본 듯한 드라마 대사 같은 말들을 읊어댔다.


그녀들은 일주일 전 나와 인사를 나누었던 그 전구 아저씨의 부인과 처제였던 것이다. 그녀들은 그동안 집 앞에서 나를 지켜보며 내가 입은 교복을 통해 학교, 학년과 이름을 알아냈고 그동안 기회를 엿보다 오늘을 디데이로 잡은 모양이었다. 자식인 내 앞에서 엄마를 망신주기 위해 계획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나와 엄마에게 모욕적인 말과 폭력을 실컷 행사한 후 지쳤는지 또 그러면 나의 학교까지 찾아가 망신을 주겠다며 엄포를 놓곤 떠났다. 그들이 떠난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나는 그녀들이 나가자마자 숨 쉴 틈도 없이 그들의 흔적을 빠르게 지우기 시작했다.


나에겐 엄마에게 어떤 연유인지를 따지는 것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남동생이 곧 집에 돌아 올 시간이었다. 나는 울고 있는 엄마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남동생이 눈치채지 않게 빨리 집안을 정리해야 했다.


엄마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내게 언급하지 않았다. 어린 나도 내가 그 사건을 들추면 엄마가 결국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침묵했다.


아빠의 죽음 이후 나는 엄마까지 잃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그 침묵을 계속 유지했다. 엄마마저 떠나면 나는 정말 고아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내가 고아가 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으므로 이 사건을 아예 없는 일로 만들고 태연히 행동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해결되지 않은 수치심엄마에 대한 실망감, 폭력에 대한 충격으로 인해 병들고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매일 반복되는 등하굣길과, 학교 생활 중에 늘 긴장했고 혹시 어디선가 그녀들이 들이닥치진 않을까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편히 웃지 못했다.



Scene #2 <3년 전>



내가 이 사건을 엄마에게 다시 꺼낸 건 그 후로 30여 년이 지난 약 3~4년 전이었다.


그날은 엄마의 생일을 맞아 엄마를 백화점에 모시고 가서 선물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한 후였다. 엄마는 나의 효녀 노릇을 참 좋아했다. 늘 무언가 대접받았다는 기분이 들면 조금은 마음이 열리는 것도 같았다.


나는 출발 전부터 엄마에게 오늘은 이 말을 꺼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식사를 마치고 햇살이 비치는 백화점 옥상정원엔 엄마와 나 둘 뿐이었다.


"엄마, 그날 말이야..

나는 어렵게 입을 뗐다.


"무슨 날? "

선물과 용돈에이어 음식도 대접받은 엄마 기분이 좋다.


"응. 그날 전구 갈아주던 아저씨...."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다음 말을 이었다.


"그분들이 들이닥친 일 말이야. 나에겐 그날이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수치스럽고 상처된 날이었어. 나는 이제라도 엄마가 나에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어린 내가 그런 일을 겪게 한 것에 대해 말이야."


"그랬니? 뭐 다 지난 일을 말하고 그래. 너는 쓸데없는 거에만 기억력이 참 좋다. 오늘 날씨 너무 좋다. 나는 다 잊었는데 늙어서 기억도 안 나~"


나는 좀 전에 똑똑히 보았다. 나의 ‘전구 갈아주던 아저씨’란 말에 놀라 똥그래진 엄마의 눈을,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히 안다. 그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시하는 건 당황할 때마다 취하는 그녀의 흔한 수법이었다.


"그때 사실 나 죽고 싶었어. 어린 마음에 엄마마저 떠나고 고아가 될까 봐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이거 나한테 사과 안 하면 나는 앞으로 엄마를 안 보려고 해"

물러 설 수 없다는 듯 나는 덤덤히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늙고 혼자인 엄마는 그냥 사과를 하는 편이 이렇게 생일에 백화점도 오고 딸이 해주는 효도도 받을 수 있으니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심 쓰듯 말한다.


"그래. 미안해.. 엄마가 그때 너무 힘들었나 봐. 됐지?"

엄마는 오히려 눈물을 흘린다. 늘 하던 수법이다. 나를 나쁜 딸로 만들려는 거다.


나는 그녀의 눈물 공격에 굴하지 않았다.

"너무 힘들었던 거 나도 알아, 그땐 우리 가족 모두 힘들었어. 그래도 그렇지, 세상 모든 남편 잃은 엄마들이 모두 엄마처럼 하진 않아. 어쨌든 30년 만의 사과는 받을게. 사과해 줘서 고마워"


솔직히 나는 그녀가 평소처럼 사과하지 않길 바랐다. 이 시기즈음부터 나는 여러 영상과 책들을 탐독한 끝에 나의 엄마가 조금은 특별한 '나르시시스트 엄마'라는 해답을 얻었고 해결방법은 '거리두기'뿐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늙은 엄마는 내 예상대로 영리했다. 내 단호한 눈을 보고 내가 정말 떠나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불안을 느낀 엄마는 사과하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연극을 하고자 하는 의지는 꺾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올려 기어코 눈물을 보인 걸 보면...


나는 더 이상 엄마의 눈물을 보고 마음 아프지 않다. 그녀가 나의 감정을 착취하려고 할 때마다 아무것도 못 느끼는 '회색돌' 방법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절대로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본인의 필요에 의해 '사람을 도구화'하는데 그 방점이 있다. 자식도 예외는 아니다. 본인의 부정적 감정을 투사한 희생양인 딸이 본인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 그래서 늙고, 병든 자신을 위해 기꺼이 '희생양이자 돌봄자'인 딸에게 사과를 하기도 한다. 물론 말뿐이다.



Scene #3 <1년 전>



"띵동"

멀리 사는 남동생이 갑자기 일 때문에 내 집에 들렀다. 나는 커피와 간단한 과일을 대접했다.


남동생과의 관계는 늘 이렇다.

불편하지만 편한 척 늘 주변부만 긁는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이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남동생이 결심했다는 듯 톤을 바꾸어 말을 꺼낸다.


"누나, 나 아무한테도 말 못 한 게 하나 있다."


"그런 거면 나한테도 말하지 마, 나도 내 인생 말 못 할 걸로 넘쳐나서 들어주기가 힘들어."


우리는 동시에 어이없다는 듯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무언가 같은 걸 비밀로 간직했다는 걸 직감했다.


"그때 거기 빌라 살 때 생각나? 어떤 아줌마들이..."

남동생이 이 말을 꺼낸다.


"너 있을 때도 들이닥쳤어? 난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누나 있을 때도 그랬어? 나는 지금까지 나만 겪은 줄 알고 말을 못 했는데"


"나도 말을 못 했지.. 너 알까 봐 엄청 숨겼는데, 그래서 30년간 나는 엄마랑 나만 아는 일인 줄 알았는데. 기어코 너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는 오랜만에 한편이 되어 빠르게 말들을 주고받았다.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나는 동생이 이제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동생은 평생 나를 보며 느꼈던 죄책감을 '자기도 피해자라며 누나랑 한편이라며' 조금은 덜고 싶은 것이다. 동생은 나르엄마 아래 골든차일드이자 수혜자였고, 지금도 내 희생을 묵인하고 있는 방관자이므로..


남동생은 본인이 공부를 못한 큰 핑곗거리를 하나 더 추가하듯 신이 나서 말을 이어 갔다.

"응 나 그날 이후로 삐뚤어지기로 결심한 거잖아. 나 공부도 안 하고, 그날 이후로 제정신 아니었어, 학교에서도 왕따 당하고 있었거든."


"그랬구나.. 네가 그즈음에 정말 문제가 많았지, 왕따 당했으면 누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힘들었겠네"

나는 억지 공감을 해주었다.


지금은 심리 상담가의 길을 걷고 있는 남동생이 말한다.

"누나, 누나도 우리 엄마 조금 이상한 거 알지?"


"응, 나르시시스트?"


"응, 누나도 나르시시스트 아네. 내 생각엔 좀 그쪽 스펙트럼 같아, 그래서 나는 멀리 도망 나와서 살잖아. ㅋㅋㅋ"


자기는 도망 나와 산다면서도, 나보고 '누나도 엄마 멀리 도망 나와 살라'고는 하지 않는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수혜자이자 심리상담가인 남동생의 '이중잣대'가 솔직히 나는 역겹다.


본인의 자유가 나를 제물로 엄마 곁에 묶어두어 가능한 거라는 걸 심리전문가인 남동생이 모를 리 없다.


남동생은 대학교에 들어간 후 엄마를 나에게 맡기곤 자유로이 떠돌아다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동생은 나보다 심리학을 먼저 접하곤 이론으로 무장했을 터이고, 아마도 스스로 자기 살길을 찾았나 보다.


어쨌든, 엄마는 30년간 남동생도 나와 똑같은 걸 겪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엄마는 늘 남동생과 내가 엄마를 두고 경쟁하게 만들었고, 본인은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불쌍한 피해자였으며, 우리 남매는 그런 엄마를 돌보느라 서로의 상처는 각자의 비밀로 간직하고 공유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점점 더 가족 본래의 가치에서 멀어져 변질되었다. 이것이 나르시시스트 엄마가 있는 가정의 비극이고, 개선의 여지는 제로에 가까우며 해결방법은 '거리 두기''탈출'뿐이라는 증거이다. 심리상담가인 남동생조차도 선택한 방법이니 말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홀로 감당하며 끝없는 책임과 부채의식만 가득한 그런 가정이라도 최선을 다해 지켰다. 나는 아빠에게 장례식장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겠노라고.


나는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 청소년기와 청춘을 기꺼이 지불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아빠에게 당당히 청구서를 내민다.


"아빠~ 거기 하늘나라에 잘 있지?

나 아빠 죽고 아빠한테 한 약속 지킨다고 최선을 다했어. 그동안 하늘에서 다 보고 있었지? 그러니까 아빠손주 00이 말이야, 내 아들 00 이가 살면서 혹시 위험한 일 있을 때나 힘들 때 꼭 한 번은 지켜줘. 난 그거면 돼! 우리 나중에 하늘에서 보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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