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에게 고착된 이미지
굳어진 인식은 바뀌지 않는다. 마초의 상징 최민수 배우가 노인에게 위협을 가했다고 했을 때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의 야성을 카리스마로 포장하던 팬들도 폭력성은 진작에 감지했다고 말했다. CCTV 영상이 공개되고 무죄가 밝혀졌지만 대중 정서에 그는 유죄였다.
수십 년째 국민 MC 유재석, 한국이 낳은 축구 스타 손흥민, 음악과 스포츠에서 국민 여동생인 아이유와 김연아 등등. 대중의 굳건한 신뢰를 얻은 유명인은 ‘까방권’을 갖고 있다. 까방권은 ‘까임방지권’으로 뭘 해도 욕을 안 먹을 권리다. 대중이 스타에게 보내는 전폭적 지지이다.
대중에게 고착된 이미지는 프레임을 형성한다. 틀을 뜻하는 프레임(Frame)은 현실을 해석하는 고정된 인식을 말한다. 뉴스와 신문에서의 보도, 영화나 TV 속 소재, 대중에게 회자되는 말 등 대중문화 속에 익숙한 인상이 프레임을 만든다. 프레임 위에서 현상은 해석되고, 해석된 결과는 다시 기존 프레임을 강화한다. 프레임이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다.
프레임을 바꾼 성공적인 케이스는 길고양이 정도. 도둑고양이가 길고양이로 바뀌면서 생선을 훔치는 약탈자에서 돌봄과 구조의 대상이 되었다.
뒤늦게 밝혀진 진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굳어진 프레임 위에서 설명은 변명이다. 열차 바퀴 일부가 선로 밖으로 나온 것은 ‘탈선’이 아니라 ‘궤도이탈’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설득되지 않는다. ‘열차에는 탈선’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철도는 기계문명을 대표했고, 국내 철도도 130년의 역사를 간직하며 근대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강철로 이뤄진 수십 톤의 둔중한 차체로 산업화의 견인차로 각인되어 있다. 이제는 경량화된 강화 알루미늄이 고속열차에 사용되지만 흔히 아는 철도의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다.
인공지능에게 한국철도의 이미지를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달라고 했다. 시속 300km 속도의 KTX가 대한민국 산하를 질주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1997년에 도입한 7400번대 디젤 기관차가 출처를 알 수 없는 푸른색 객차를 끌고 있는 합성사진을 보여줬다. 호남선 논산역과 비슷한 곳 자갈 선로 위에서 존재하지 않는 열차번호를 달고 있었다.
몇 번의 질문으로 얻은 정보로 해석하면 인공지능이 생각한 철도는 연기를 뿜으면서 시골에서 도시를 잇는 대중교통, 서민의 발이었다. 여기에 해외에서 지배적인 푸른색 열차의 형상이 덧씌워져 있었다. 기대와 실제 인상은 다르다.
철도의 이미지는 용어에서도 드러난다. 쉽게 떠오르는 철도용어 중에는 부정적인 단어와 비정상적인 상황을 묘사한 관용적 표현이 존재한다. 안 좋은 의미로 쓰인다. 탈선, 궤도이탈, 폭주 기관차, 녹슨 기차, 재래식 선로 등등.
이런 표현은 부정적 기사 제목으로 자주 사용된다. ‘고장철’, ‘거꾸로 가는 ○○○행 열차’ ‘안전도 ○○○도 역주행’... 철도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심지어 스포츠와 건강 분야 기사에까지 인용된다. 역시 부정적이다. “○○○ 탄핵열차 출발”, “표류 속 ○○○호 궤도이탈”, “간경변 직행열차 탑승”, “○○ 남용 지옥행 급행열차”
애초에 선로 위에 있어야 하는 열차가 선로를 벗어난 상황이 주는 은유가 비정상적인 상황과 쉽게 결합된다.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으로 인식되는 철도이기에 자칫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더 자극적으로 비친다. 한번 오른 열차는 목적지까지 갈 수밖에 없는 강제성도 철도 이미지의 한 축이다.
철도 사고가 발생했을 때 철도의 부정적 프레임과 용어가 섞여 파급효과는 배가된다. 부정적 인식을 깨트리기 위해 올바른 용어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으나 쉽지 않다.
열차가 정차 위치를 어긋났을 때 후진하는 것을 철도에서는 역주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스크린도어를 지나친 지하철이 다시 뒷걸음질로 정차 위치를 맞추는 것도 후진이다. 역주행이 아니다. 하행 선로에서 상행 열차가 운행해야 역주행이다. 자동차가 일방통행에서 반대 방향으로 들어오는 것, 우측통행하는 도로에서 좌측통행하는 것을 역주행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하지만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기자는 역주행을 후진이라고 바꾸지 않는다. 대중이 인식하기 쉬운 강렬한 단어가 익숙하다. 제목 장사도 한몫한다.
‘사고’, ‘장애’, ‘충돌’, ‘접촉’, ‘사상사고’ 등 철도 분야의 사고 정의와 범위가 철도안전법에 정해져 있다. 같은 사상사고라도 ‘철도교통 사상사고’, ‘철도안전 사상사고’ 등 구분이 따로 있다. 사상사고도 ‘여객’, ‘공중’, ‘직원’ 등 분류하는 세부 기준이 있다. 법상의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프레임에 휘둘리지 않고 사고조사 등에서 언급하는 공식 용어를 쓰기 위해서다.
일부 언론에서는 사고를 축소한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가벼운 용어를 쓴다고 지적한다. ‘열차와 선로 작업자 접촉’이라는 사고급보에 대해 직원이 다친 사상 사고인데 ‘접촉’이라고 한 것은 책임을 경감시키기 위한 회피라고 일갈한다. 기자가 대중의 편의상 통용되는 용어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코레일에서 배포하는 보도자료에서는 공식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