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줄다리기, 이름 속사정(+1)

‘안전하지 않으면 운행하지 않는다’

by 문좀열어주세요

정해진 시간에 출발·도착하는 정시성도 철도의 상징이다. 철도는 곧 시간이다. 기차역 간판 밑에 대형 시계나 역광장에 시계탑, 역무원 허리춤의 회중시계 등 해외에서 철도와 시계는 세트처럼 어울린다. 세계 표준시의 기원도 미국철도이다.


철도의 정시성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행하는 ‘꾸준함’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여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달리는 철도, 천재지변이 없는 한 지키는 약속 등의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전쟁에도 물자를 나르고 인질을 구조하는 작전에 철도가 투입된다. 영화 속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아도 기차는 온다.


철도의 정시성은 철도원의 근면성과 어우러져 소설과 영화 등의 소재로 재탄생한다. 우리보다 철도 도입이 빠른 일본 문화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 ‘철도원’이 대표적이다. 사방천지 흰 눈이 내리는 홋카이도, 폐선이 될 호로마이 노선에서 기차역을 지키는 주인공 오토마쓰 역장은 근면의 상징이다.


가족을 잃는 비극에도 시간 맞춰 철도를 운행하기 위해 깃발을 흔들고 호루라기를 분다. 그의 애환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위로한다.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개인을 희생하면서 철도를 운행하는 직업윤리가 애잔한 이야기를 만든다.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국내에 개봉되었다.


반면 정시성이라는 프레임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안전에 대한 인식이 더 고차원적으로 바뀌면서 정시성과 안전성이 상충되기도 한다. 이젠 위험을 감내하고라도 정시성을 고집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무리한 열차 운행은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레일은 2021년 ‘안전하지 않으면 운행하지 않는다’를 안전경영의 슬로건으로 정했다. 365일 쉬지 않고 운행하는 열차라는 프레임을 스스로 허무는 시도였다. 위험을 무릅 쓴 운행은 하지 않겠다는 발표이다. 극한 호우나 폭염 등 자연재해가 닥치면 열차를 멈추겠다는 ‘양해’를 ‘당당하게’ 선포했다. 반대로, 열차가 달리는 이상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선언이었다.


아울러, ‘안전하지 않으면 작업하지 않는다’를 덧붙여, 직원들 내부에서도 안전의식을 제고하는 운동도 병행했다. 산업재해와 중대재해 근절이 일터에서 최우선 조건으로 떠오르면서 문화로서의 안전의식을 뿌리내리고자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초기에는 열차 운행중지와 지연에 대한 불만과 민원이 많았으나 안전을 위한 선제적 조치임을 다소나마 인식하고 있다. 열차 여행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정에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는 것은 염치없겠지만 안전을 위한 ‘피치 못할 선택’이라고 꾸준히 알리고 있다.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가 일깨운 ‘아프면 쉬자’가 ‘아파도 출근한다‘의 틈바구니에서 싹을 틔웠다. 쉴 수 없는 현실을 개선하자는 주장이 확산되었다. 일터의 문화를 개선하자는 의견은 법제화 추진을 이끌었다. 쉴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 철도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유럽 철도 선진국에서는 운행 취소와 지연이 잦다. 프레임은 사회적 기류에 편승한다.


무리하게 추진했던 철도 프레임도 있다. 기차역 승강장을 통과하는 화물열차를 보면 거무튀튀한 녹색 글자로 ’GLORY(영광)‘를 써붙인 컨테이너가 있다. ‘영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민망한 글자는 한때 코레일에서 쟁취하고자 했던 글로리 운동의 일환이다.


GlORY는 영어 단어의 첫머리를 따서 만든 두문자어(Acronym)이다. 2010년 당시 기관장이 직접 만든 Green Life Of Railway Yearning(철도를 열망하는 녹색생활)의 첫 글자를 딴 단어로 만들었다.


2010년 개통 5년을 맞은 KTX 효과가 대한민국의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을 즈음 코레일은 글로리 운동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글로리 운동은 ‘저탄소 녹색성장 시대’에 녹색생활 실천을 위해 범국민적으로 기차를 타자는 취지의 활동이다. 코레일이 주도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발대식도 개최했다.


당시 코레일의 모든 것에는 글로리 이름표가 붙었다.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다. 식당도 ‘글로리 라운지’, 강당도 ‘글로리홀’, 멤버십회원도 ‘글로리 회원’, 글로리 회원을 위한 마일리지도 ‘글로리 포인트’, 승차권 앱도 ‘글로리’, ‘글로리 관광열차’, ‘글로리 기차타기 운동’, ‘글로리 중앙회’, ‘글로리 정산센터’, 월례조회도 ‘글로리 미팅’, ‘글로리 고객모니터단’, ‘글로리 동반성장센터’, 심지어 ‘오 글로리 코레일’이라는 사가도 만들어 불렀다.


명찰이 필요 없는 설비에도 굳이 대국민 이름 공모를 거쳐 답이 정해진 ‘글로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서울역에서 민망한 명명식까지 열었다. 사회자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새로 발명한 침목의 이름을, 바로... ‘글로리 침목’입니다.” 이 한마디를 허공에 날리기 위해 수십여 명을 초청했다. 박수 소리가 공허하게 퍼졌다.

기관장이 자리를 떠난 이후 글로리 명패들은 하나둘씩 철거되었다. 이제 철도를 글로리로 기억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한 프레임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손이 닿지 않는 유개화차 측면을 장식하고 있던 글로리 글자도 서서히 페인트가 벗겨지고 있다.


반면 우리 문화와 대중 인식 속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린 철도의 소중한 인상이 있다. 귀성열차, 귀경열차, 급행열차, 완행열차, 구원열차, 낭만열차, 청춘열차, 황혼열차, 입영열차 등등. 벽지 노선을 연결하는 철길, 꿈을 찾아 도시로 떠나는 청춘을 태운 열차, 고향 가는 열차, 기차역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 한해의 마지막 열차, 새해 첫 열차 등이다.


새로운 홍보를 발굴하는 것만큼 철도의 값진 프레임을 간직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명절마다 수십여 명의 사진기자들이 서울역에 진을 친다. 선물꾸러미를 들고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기차역을 찾는 수백만 명의 귀성, 귀경객을 촬영한다. 고향행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몇 주 전부터 기다리고, 새벽부터 승차권 앱을 들여다보며 접속 전까지 마음 졸이는 사람들은 코레일의 소중한 자산이다.


명절 이용객 수요가 좌석 공급을 폭발적으로 넘어선다고 배짱을 부리면 안 되는 이유이다. 여느 때와 같은 무탈한 현상 유지가 절실하다.


프레임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중이 익숙한 단어로 부르고, 평범한 문장으로 전해지고, 친근한 이미지로 떠오를 때 프레임이 형성된다. 뉴스에 보도된 사건과 사고만큼이나 개인의 반복되는 경험이 쌓여 프레임이 굳어진다.


사람들의 기억을 불러내는 자연스러운 노력으로 프레임은 가꿔진다. 스스로 불러달라고만 하는 홍보는 억지스럽다. 의미 없는 실적과 계획, 뻔한 서비스와 상품을 내세우는 보도자료 기사나 유튜브 영상에 한번씩 달리는 댓글이 가슴에 꽂힌다. “열차 운행이나 안전하게 잘해라”

안전띠가 없는 KTX 좌석 (전동 휠체어 전용공간에는 별도의 고정벨트가 있다. 왼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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