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만 있으면 뉴스로...” 차세대 고속열차 도입

방송 성격에 맞는 장소 섭외와 연출

by 문좀열어주세요

“명분만 만들어주면 얼마든지...” 몇 년 전 정부 부처와 산하 공공기관이 홍보 협의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주무관의 무리한 요청에도 공공기관 실무자가 기꺼이 응하면서 말했다. 직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내가 말한 터라 당혹스러웠다. 예산이나 업무 범위를 벗어났었다.


미팅이 끝난 후 명분을 만들어달라는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차피 하게 될 일인데 시원하게 생색내고 책임 안 질 명분만 챙기면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말대로 됐다. 나보다는 고수였다.

“그림만 만들어주면 얼마든지...” 종합편성 기자께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방송 뉴스 특성상 그럴듯한 장면만 있으면 뉴스가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뉴스거리로는 충분한데 영상이 마땅치 않으면 제작할 수 없다.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와 ‘스페인 괴물 파도’처럼 영상을 기반으로 뉴스가 제작되고 큰 파급효과를 낸다. 최근 사건사고 뉴스 취재팀은 현장을 비추는 영상을 우선적 확보한다. 주변 상가 CCTV 영상과 주차된 자동차 블랙박스 영상까지 찾는다.


딱딱하고 복잡해 제작하기 쉽지 않은 내용도 잘 준비한 영상과 함께 나오면 뉴스로 탄생한다. 핵심 메시지와 볼만한 화면으로 완성도를 갖춘다. 2004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KTX는 곧 수명이 다해 차세대 고속열차를 준비해야 한다. 기대수명이 30년으로, 2026년부터 본격적으로 KTX 도입을 위한 사전단계 착수가 필요하다. 계획수립부터 예산 부담, 예비타당성 조사와 발주, 제작, 시운전, 인수 등의 복잡한 과정을 고려하면 7~8년의 기간도 촉박하다. 특히 5조 원 이상의 예산 부담이 문제였다.


예산 확보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했다. 국회 토론회를 진행하고, 학술대회에서도 발제했다. 관련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기획기사도 보도되었다. 관심 있는 기자가 토론회와 학술 대회에 참여해 취재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어느 정도 여론은 형성되어 있었고, 전문가들과 관계기관에서도 공감대가 있었다. 지상파 뉴스에서도 보도되어 국회 입법까지 탄력을 받을 수 있는 지원이 필요했다. 마침 최근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상파 방송팀과 오찬에서 관련 대화를 나눴다.


“KTX는 공공 교통서비스이기에 차량을 새로 구입하기 위해서는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더욱이 5조 원이라는 큰 돈은 공기업 코레일 혼자 부담할 수 없다. 수도권 등의 광역전철과 기차역 등 새로 들어오거나 새로 짓는 철도시설은 정부에서 지원을 한다” 홍보실 일행 설명의 요지였다. 이후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내 설명이 이어졌다.


“행신역 근처에 KTX차량기지가 있다.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축구장 200배 크기다. KTX가 일렬로 쫙 정차되어 있다. 그사이에 한 대 들어오면 또 한 대 나가면서 쇳덩이 마찰음을 내는데 장관이다. 예전 20년 전 KTX 개통 때는 기지가 많이 보도되었는데, 최근에는 고속열차도 KTX-산천, KTX-청룡까지 들어와서 더 그림이 멋있다. 고속열차 세 종류가 한꺼번에 나온 기지 장면은 최초이다” 등등 자식 자랑처럼 두서없었다.


사실 차세대 고속열차와 KTX 차량기지가 꼭 1대 1로 맞는 옷은 아니다. 차세대 고속열차이기에 아직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다. 교체가 필요한 KTX도 오래되고 낡은 외관인 것만도 아니다. 수시로 정비를 하고 페인트칠도 해서 잘 관리되어 있다. 다만, 연관시킬 수 있는 화면이 있고, 기자의 현장에서 설명할 수 있으면 방송 뉴스가 만들어진다. 그날의 설명은 그렇게 마쳤다.


이후 뉴스팀에서 고양 KTX차량기지에 대해 문의했다. 보통 언론매체에 따라 궁금한 부분이 차이가 있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3가지 정도의 설명으로 구분된다.


<1. 신문기자 대상>

경부선 서울역과 부산역, 호남선 용산역과 목포역 등 전국 400km 넘는 선로를 하루 4.5회 운행하고 이튿날까지 총 5,000km 거리를 운행하고 기력을 다한 KTX가 회복하는 쉼터. 국내 3곳 고속철도차량기지 중에서 가장 기술력이 뛰어난 기지, 매일 밤낮으로 진행하는 점검과 전체 수명의 반, 15년에 한 번 주요 부품과 본체를 모두 분해해서 진행하는 ‘반수명 점검’ 등 KTX의 전 생애에 걸쳐 최상급 상태로 유지하는 곳.


<2. 사진기자 대상>

KTX 10여 대를 동시에 촬영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차량기지. 700t이 넘는 KTX를 한 번에 공중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동시 인양기’가 있는 곳, 차량정비원 수백 명, 최첨단 설비 수십여 대가 차량 하부부터 지붕 위까지 집중 점검하는 장소.


<3. 방송기자 대상>

해가 떨어질 때 운행을 마치고 종점인 행신역을 지난 걸음만큼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KTX. 노을빛에 붉게 달아오른 곡선 선로를 따라 천천히 기지로 들어온다. 400m 가까운 길이도 휘어진 선로 위에서는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한 모양. 기지에 들어온 KTX는 밤샌 정비작업을 마치고 새벽 첫차로 다시 운행을 시작한다.


명확한 구분보다는 언론매체 필요에 맞게 설명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최근에는 취재하겠다는 언론매체가 많아서 대부분 거절하고 있다.


지상파 방송에서 차세대 고속열차 도입 뉴스를 만들기로 했다. 실제 취재는 다른 기자가 맡았다. 설명을 들은 기자도 관심을 보였으나, KTX차량기지에 더 흥미를 보였다. 대신 다른 기자에게 좋은 아이템이라고 소개를 해줬다. 2주 후 사회부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바로 섭외를 진행하고 다음 날 촬영하기로 했다. 급히 진행하는 걸 보니 뉴스 아이템이 꼭 필요한 상황인 듯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현장을 직접 섭외하면서 본사 총괄부서에도 통보했다.


기자에게 세부적인 자료를 전달했다. 이후 구체적인 촬영 동선, 인터뷰이, 기자가 멘트를 촬영할 장소 등을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장면은 KTX가 차량기지로 들어오는 순간과 정비를 마치고 출발하는 모습이었다.


도착 열차와 출발 열차가 꼭 같은 필요는 없었다. 뉴스제작에는 편집 과정도 중요하다. 충분한 영상을 촬영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최대 2시간 동안 KTX가 가장 많이 드나드는 시간대를 정했다. 되도록 시간 간격이 조밀해야 촬영하기 수월하다. 일일 점검이 이뤄지는 경정비동의 길이만도 400미터를 훌쩍 넘는다. 두세 번만 왕복해도 2km를 걷게 되기에 기지 직원들도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짧은 동선에도 정비작업을 압축적으로 다양하게 보여줘야 했다.


2025년 9월 5일 금요일 오후 13시부터 15시까지로 정했다. 기자와 촬영감독, 보조 감독을 열차가 들어오는 쪽으로 안내했다. 입구를 잘못 안내하면 한참 헤맨다. 10여 개가 넘는 선로 중에서 KTX가 들어오는 선로를 아직 알 수 없었다. 선로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너 6번째와 7번째 선로 사이에 자리 잡았다. KTX가 들어올 선로가 정해진 직후였다.


선로와 선로 사이에 삼각대와 카메라를 설치했다. 작은 액션캠도 선로 옆 자갈 바닥에 놓았다. 들어오는 KTX에 액션캠이 부딪치지 않고, 진동에도 쓰러지지 않는 위치였다. 취재진이 조심스럽게 촬영장비를 세팅하는 사이 기자는 질문을 이어가며 취재를 보강했다.


촬영에 집중하다 보면 구도를 잡느라 무리하게 자리를 옮기곤 한다. 열차가 들어오면 위험하지 않은 이상 되도록 움직이지 말고 열차가 멈출 때까지 정해진 위치를 지켜달라고 정중히 부탁드렸다. 열차가 기지로 들어왔다. 열차를 따라 카메라를 팬(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수평 방향으로 피사체를 따라 회전시키며 촬영하는 기법)으로 촬영시켰다.


다시 출발하는 열차를 촬영하고, 최신 KTX-청룡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차량 하부 레이저 탐상, 차바퀴 균열 탐지 등등 정비작업 촬영도 이어갔다. 1시간 남짓 촬영 이후에 기자의 스텐딩으로 마무리했다.

방송은 성공이었다. 지상파 뉴스의 파급력답게 여러 언론매체에서 문의가 왔다. 이후 국회의 전폭적인 지지로 차세대 고속철도 도입에 관계부처가 도울 수 있는 근거가 입법발의되었다.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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