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이 Aug 31. 2019

[안식년 3화] 안식년 일과


아침 6시의 남편은 분주하다. 핸드폰 알람에 눈을 뜨고 뭉그적거리는 시간을 약 10분 정도 보낸다. 수영장 이름이 쓰여있는 파란 수영가방에 햇볕에 말려둔 수영복과 모자, 물안경을 조심스레 넣어 수영장 갈 준비를 한다. 기관지에 좋다는 배도라지 즙을 하나 마시며 일단의 요기를 해결한다. 아직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살짝만 깨우기 위해 등을 한 번 쓸어주고 집을 나선다.

남편은 수영이 좋다고 했다. 9988(99세까지 88 하게)이라고 쓰인 모자를 쓰고 힘차게 아쿠아로빅 하시는 어르신들, 방학을 맞아 아침부터 물놀이 나온 아이들, 출근 전 운동을 위해 나온 젊은 남녀들이 물속에서 숨을 맞춰 움직인다. 25m 레인에는 지켜야 할 룰이 있고 제각기 다른 목적의 사람들이지만 모두 나란히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남편은 물속에서 움직일 때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그 순간, 오직 팔과 다리만 힘차게 움직이는 근 순간, 그리고 레인을 3번 돌고 한쪽에서 조용히 쉴 때가 좋다고 했다.

잠을 쫓지 못한 나는 6시 반에 느릿느릿 일어나 5분간 멍 때린다. 관리가 번거로워 커튼조차 달지 않은 창은 얄짤없이 여름 햇살을 쏟아낸다. 8월까지는 늦잠 자기 글렀다. 아침 햇빛에 슬슬 더워질 때쯤 마지못해 스탭퍼를 꺼낸다.


바닥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스텝퍼를 시작한다. 심심하니 티브이를 튼다. 간 밤에 나스닥은 폭락했고 아직 한 일 관계는 소원하다. 한숨 나오는 뉴스를 돌아 결국 미국 드라마로 간다. 그동안 미뤄뒀던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하루에 최소 40분은 자막 없이 드라마 보는 게 목표다. 30분쯤 지나자 온몸이 땀범벅이 된다. 이제 10분 뒤면 남편이 올 시간이니 그전에 샤워를 끝내야 한다. 10분 남은 미드 모던 패밀리가 아쉽지만 얼른 씻고 나와야 한다. 수영하고 뽀송해진 남편이 집에 오고 시리얼 한 그릇을 해치우면 집 앞 별다방으로 간다.

매장 안은 에어컨에 시원하지만 밖에서 가지고 들어온 열기가 아직 몸에 남아있다. 자연스럽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안식년의 좋은 점은 남들 놀 때 놀고 남들 놀 때도 놀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라면 모닝커피를 위해 북적거리는 별다방도 휴가를 맞아 한산하다.

오늘 수영장에서 옆집 할머니 만났어. 요즘 출근 안 하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뭐랬어?
가게 정리하고 잠깐 쉰다고 그랬어. 그랬더니 젊은 사람이 안 됐다고 힘내라고 하시더라.
안식년이라 하지 그랬어.
일일이 설명하기 싫어서 그냥 알았다고 하고 나왔어.

수다 떨기 좋아하는 옆집 할머니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말해줬나 보다. 나에게는 빨리 아기 가지라고 남편은 얼른 일하라고 채근당하고 있다. 갑자기 아메리카노가 쓰게 느껴진다. 다시 한 모금 물며 태블릿 pc 속 신문으로 눈을 돌린다.

나 신문에서 엄청 웃긴 거 봤어. 이제 중국에서 윗도리를 안 입으면 벌금이래.
왜 윗도리를 안 입고 다닌대?
배에 열이 모이기 때문에 열을 빼내기 위해 윗도리를 안 입는데.
너랑 똑같다. 너도 이제 집에서 윗도리 안 입으면 벌금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신문을 다 읽으면 재미난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탈영 전력이 있는 말썽꾸러기 군견이 드디어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와 새로 나온 신간 이야기, 맞을 듯 안 맞을 듯하는 오늘의 운세까지 모두 훑어 나간다.
11시쯤 되면 슬슬 사람이 많아지고 슬슬 배고파 온다.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제일 중요한 고민. 오늘 뭐 먹지?

어머님이 주신 콩물에 호두, 땅콩과 아몬드를 넣고 갈아서 콩국수를 해 먹기로 했다. 밥 한 끼 만드는데 이렇게 힘이 들다니. 아몬드는 슬라이스 되어 있는 거 그냥 갈아 쓰기로 했고 땅콩 껍질을 벗겨 넣는다. 잣도 있는데 넣을까? 고소하다 싶으면 다 집어넣자. 계란도 하나 삶을까? 아, 오이 없다. 내가 얼른 사 올게. 좀 멀어도 역 근처 마트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집 옆에 있는 마트는 채소를 너무 아무거나 갔다 놔. 맛도 없고 하나도 안 신선해. 대충 먹을까 하다가도 이제 제대로 먹고 싶다는 마음에 굳이 멀리 있는 시장에 가서 사 온다.

콩보다 견과류가 많은 콩국수에 김치. 오늘은 간단히 해 먹어야지 했는데 벌써 2시다. 직접 차려 먹고 치운다는 것은 실로 많은 시간을 요한다. 더 이상 식사가 해치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거나 먹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있다는 마음에 뿌듯하다.

1일 1 책이 목표인 나는 오후 시간을 책으로 보낸다. 다독에 집착하냐는 사람도 있지만 자칫하면 무료해지는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특히 식당을 하는 2년간 책에 대한 갈증은 항상 있었기에 이 시간은 지식과 쾌락을 동시에 준다는 것만으로도 안식년에 딱 맞는 목표이다.

‘어깨에 입 맞출 때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졌다. 커다란 오렌지 사탕 같은 태양이 지는 시간에 입안에 남은 소금기에 끌려 테킬라를 희석시킨 칵테일을 마시러 갔다. 밤늦게 돌아가 키스하면, 연인의 입술 사이에 우주가 있었다.’
-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작가는 오렌지 사탕 같은 태양이라고 했다. 작년 여름은 유난히 더워 끊임없이 불 앞에서 일해야 하는 우리에겐 정말 지옥 같았다. 오렌지 사탕 같은 태양보다는 불짬뽕의 매운맛 피시볼 같은 느낌이었고 식당 경영의 어려움은 우리를 더욱 지치게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버텼는지. 이제 다 옛날 일이다 싶으면서도 책장을 넘기다 잠시 생각을 돌리면 그때 일이 떠오른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렇게 쉬는 것도 다 보상이야. 8월의 오후를 책장 한 장, 복숭아 한 입으로 버텨낸다. 더위에 잠이 살짝 와 남편과 한숨 잔다. 딱 한 숨이야. 오렌지 사탕 같은 태양이 지면 다시 일어나자.

저녁 장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선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짝 가려져 한 낮보다는 낫다. 한 번에 많이 사두고 많은 양을 요리하면 먹기 싫은 것도 먹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조금씩 장을 본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불현듯 오징어 초무침과 감자전이 먹고 싶어 졌다. 어머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정말 쉽다고 하셨는데 오징어부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 과감하게 생물 오징어를 집어 들다가 손질 오징어로 방향을 바꾼다. 제각기 다른 크기의 야채들로 엉망이 된 초무침과 한없이 커진 감자전을 대충 잘라먹는다. 내일은 좀 동그랗게 하고 야채도 좀 맞춰서 잘라야겠어. 내일도 모레도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이다.

저녁 산책 후 간단한 샤워를 하고 노닥거리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모기향을 찾기 위해 서랍을 뒤지다 수면유도제를 발견했다. 지난 2년, 수면유도제 없이는 잠들지 못한 수많은 나날이 생각났다. 눈을 감으면 과연 내가 이 직업을 평생 할 수 있을까? 남편은 지금 정말 행복한 것일까? 이렇게 매일 여유시간에는 잠만 자는 우리는 괜찮은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수면 유도제도 소용없는 날들이 많았다. 작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수면유도제를 한쪽으로 치워 둔다. 당분간은 필요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안식년 2화] 허난설헌과 서피 비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