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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탱볼 Oct 27. 2023

Ep.02 캔버스 앞에서 가장 솔직했던 사람들

반고흐와 피카소


"제일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인가요?"


아마도 이 두 화가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바로 반고흐와 피카소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이 두 화가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매우 달랐지만 공통점 또한 존재합니다. 오늘은 두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봅시다.






독학으로 시작된 반고흐 Vincent van Gogh(1853-1890),

화가 아빠에게 조기교육 받은 피카소 Pablo Picasso(1881-1973)


고흐는 엄격한 목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학교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자퇴를 했고 돈을 벌기 위해 화랑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가 일한 화랑은 런던, 헤이그, 브뤼셀, 파리에 지점이 있는 당시 꽤나 자리 잡은 구필 화랑이었고 화상일도 그와 잘 맞았다. 그는 16살부터 7년간 일하며 편지를 주고받을 때 설명을 위해 사용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23세의 고흐는 상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목회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었는데 과도한 헌신과 예전부터 앓아왔던 우울증의 영향으로 고흐의 상황이 나빠지자 역시 화상이었던 동생 테오의 제안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네덜란드 화가지만 프랑스 파리와 아를, 오베르 등을 이동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공립 미술 학교 교사로 피카소가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게 화가로서 교육을 시켰다. 물려받은 재능과 교육 덕에 피카소의 그림 실력은 어릴 때부터 뛰어났지만 아버지가 알려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어린 피카소를 데리고 성매매 업소에서 첫 경험을 하게 했고 동물들을 해부하는 등의 잔혹한 경험을 주었다.

화가로 성공하지 못했던 그의 아버지는 피카소가 15살이 되던 해 지역미술전에 입상하자 붓을 꺾고 피카소에게 자신의 꿈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피카소는 점점 아버지와 다른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가고자 했고 이를 계기로 아버지와 관계가 멀어졌다. 피카소는 아버지 호세 루이스가 아닌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았다.



반 고흐, <닳아빠진 것을 위한 연구>, 1882, 반고흐 미술관 / 피카소, <과학과 자비>, 1897, 피카소 미술관






사랑에 몸을 던졌던 고흐, 사랑을 영감의 발판으로 삼았던 피카소


반고흐는 가난하고 고단한 사람들의 대한 사랑과 연민이 많은 사람이었다. 때문에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로 일하던 시절 밀레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아 자신이 일했던 탄광의 사람들을 많은 작품에 담아냈다. 고흐는 사랑에 있어서도 연민이 많았던 것 같다. 아이가 있던 매춘부와 사랑에 빠져 그의 어머니까지 모시고 살기도 했을 정도다. 사랑하는 대상들 때문에 항상 가족과 갈등을 빚었지만 그 이유로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사랑은 축복보다는 고난이었다.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반면 피카소는 여러 여자들과 사랑을 통해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피카소와 스쳐 지나간 여자들도 많다지만 두 아내를 포함한 8명의 뮤즈가 유명하다. 이들 대부분(한 명을 제외)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으며 그의 무관심과 무책임함에 그의 자녀들 역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의 6번째 뮤즈였던 프랑수아즈 질레는 피카소의 실체를 폭로하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지만 피카소가 연금을 지불과 그들 사이 자식들에게 성을 물려주는 것으로 하고 책을 전량 폐기시켜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유일하게 그를 먼저 떠난 뮤즈인 그녀는 피카소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내 사랑의 노예이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다

그는 평생 두 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아내가 죽을 때까지 이혼하지 않았다. 이유는 재산분할과 양육비 지급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첫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40살 연하의 자크린 로크와 두 번째 결혼을 했으며 죽을 때까지 함께했다. 그는 1만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 약 3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1885, 반고흐미술관 /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뉴옥 현대미술관






빛을 보지 못한 고흐, 빛났던 피카소


반고흐는 37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졌다. 죽음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흐의 생애 단 한 점의 작품만이 팔렸다는 것이다. 동료화가였던 안나 보쉬가 '붉은 포도밭'을 400프랑(400만 원) 정도에 구매했다. 하지만 고흐가 세상을 떠난 즈음부터 고흐의 작품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충격으로 동생 테오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 요한나 반고흐 - 봉허는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반고흐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고흐 사망 15년 후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에서 480여 점을 선보였으며 런던 국립 미술관에 해바라기를 판매하여 그의 작품을 대중화시켰다. 그 뜻을 반고흐의 이름을 물려받은 조카(동생 테오의 아들) 반고흐 주니어가 이어받아 1973년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뮤지엄을 개관했다.


반면 피카소는 살아있을 때 부와 명성을 누린 몇 안 되는 행운아다. 19세에 파리로 넘어와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20살이 되는 해 첫 전시회를 열어 주목받기 시작했고 파리에 온 지 5년 만에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다. 이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로 부와 명예를 누렸다.



반 고흐,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88, 푸시킨 미술관 / 피카소, <꿈>, 1932, 개인소장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예술가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그림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가의 이름, 아니면 얼굴 그 무언가라도 떠올릴 것이다. 너무나 다른 삶의 두 예술가이지만 이 두 화가는 모두 자신만의 화풍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화풍이 이름표인 화가들


예술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실력은 기본이요, 자신만의 스타일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릴수록 실력이 좋은 사람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들이 타인의 필요에 의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대가를 받는 방식인 반면 예술은 조금 다르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의 요청에 의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작업의 목적이 타인, 사회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예술가는 그림이라는 방식을 통해 말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신만의 방식이 정립되고 동시에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차별성이 요구된다.


반고흐는 탄광에서 밀레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구상회화를 발전시켰다. 파리로 이동해 당시 활동했던 여러 화가들과 일본 이키요에의 영향으로 원색을 활용하게 되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던 그는 해가 더 밝은 남부 아를로 이주해 야외에서 많은 작품을 그렸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그림도 이때부터 많이 그렸다.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와 마드리드 산페르난도 왕립학교에서 고전적인 화풍의 그림을 그리다 파리 몽마르트르로 넘어가 모네, 마티스, 폴 세잔, 로트렉 등의 다양한 화풍의 화가들을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후 친구의 죽음으로 청색 시대, 첫 뮤즈인 페르낭도 올리비에를 만나 장밋빛 시대를 거쳐 삶에 따라 다른 입체주의(큐비즘),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화풍을 보여주었다.



반고흐와 피카소는 삶의 여러 과정을 통해 새로운 화풍을 배우고 시도하며 결국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시켰다.

누구보다 캔버스에 솔직했던 태도. 이것이 이들을 오늘날까지 역사에 남는 것을 넘어 살아있게 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뉴옥 현대미술관 / 피카소, <우는 여인>, 1937, 테이트 모던






반 고흐의 삶, 특히 후원자였던 남동생 테오와의 편지를 보면 그는 누구보다 예술가의 삶을 잘 알려주는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림. 짧았던 작업 기간에도 수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화상이었던 테오가 자신을 도와준 만큼 자신의 그림을 팔아 얻을 수 있는 값어치였다고 하니 그의 인생의 고단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반면 예술가로서의 피카소는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하지만 인간으로서 그는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아내와 연인들, 남은 자식들의 삶까지 파괴했던 그의 예술혼. 하지만 그는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학행위를 비판하는 '한국의 학살'을 발표하였고 스페인 내전에서 게르니카 민간인들이 나치 공군의 폭력으로 학살당한 게르니카 학살사건을 고발한 '게르니카' 등 작품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준 영향이 그가 좋은 가정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 것은 아닐까?



반 고흐, <아몬드 나무>, 1890, 반고흐 미술관 /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피카소 미술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에서 발전과 성취만큼 아니 그보다 먼저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2023년 반고흐


2023년 GIDC 광명역에서는 반고흐 몰입형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다. 이 전시는 CNN이 선정한 12대 몰입형 전시 중 하나로 전 세계 500만 누적관객이 다녀갔다. 반고흐의 작품과 그에게 영향을 준 다양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으며 VR체험을 통해 반고흐의 예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2023년 피카소


국립현대미술관(MMCA) 청주 미술품수장센터에서 피카소 작고 50주년을 맞아 도예가로서의 피카소를 조명하는 <피카소 도예> 전을 개최 중이다. 20세기 현대미술사뿐만 아니라 도자 역사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그의 예술 여정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는 취지로 개최되었다. 9월부터 2024년 9월 1일까지 진행되는 이 전시는 소장품 전으로 2021년 기증된 이건희컬렉션 중 피카소의 도예 107점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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