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고독 그리고 행복
요즘은 단어를 자주 곱씹게 됩니다.
특히 철학자의 콘텐츠나 책을 읽을 때 그렇습니다.
단어 하나가 문장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 유난히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 단어들을 피상적으로, 관념적으로만 사용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 닿습니다.
예를 들어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하지만 그 단어가 정확히 어떤 감각을 가리키는지는 잘 묻지 않습니다.
느낌은 알 것 같지만, 설명하라 하면 막연합니다.
단어를 쓴 것이 아니라, 빌려온 셈입니다.
단어는 생각보다 매우 주관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사전에 정의된 뜻이 있음에도,
누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집니다.
말하는 사람뿐 아니라, 읽고 듣는 사람도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단어가 유난히 생경하게 느껴질 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단어를 나만의 사고로 해석해 본 적이 없거나,
나만의 언어로 사용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떨까요.
듣기만 해도 부정적인 단어입니다.
하지만 1년 365일 중 맑은 날이 100일도 안 되는 것처럼,
삶 역시 고통이 기본값에 가깝습니다.
고통을 예외로 생각할수록 삶은 더 버거워집니다.
조던 피터슨 교수가 전역 군인에게
군 생활 중 언제 가장 행복했는지를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군인은 가장 혹독한 훈련을 받을 때였다고 답합니다.
당시는 너무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지나 성장한 자신과 동료들을 보며
강한 행복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행복은,
고통의 일시적 부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은 분명한 대상을 가집니다.
그래서 고통은 추적 가능합니다.
그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무엇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는지도 보입니다.
종종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입니다.
외로움은 홀로 됨을 느끼는 부정적 감정에 가깝습니다.
심해지면 병리적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반면 고독은 다릅니다.
고독은 철저히 혼자 사유하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고독은 오로지 내 것입니다.
공유될 수 없기에 더 지독합니다.
내 생각은 전달되지 않고, 대신 경험만 남습니다.
그래서 고독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고독하지 않은 삶은,
결국 내 생각이 아닌 타인의 생각으로 채워진 삶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쇼펜하우어가 고독하지 않은 인간을
‘영구적 타인’이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행복은 고통의 반대편에 고정된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을 통과한 뒤
잠시 드러나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행복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온 속에서만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며,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삶을 흔드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짧고, 고통은 깁니다.
배고프다 → 먹는다 → 행복하다
외롭다 → 사랑한다 → 행복하다
불안하다 → 성취한다 → 행복하다
이 모든 구조의 출발점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고통이 잠시 멈춘 지점에서 느끼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단어를 그냥 사용하는 데서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그 단어가 내 삶에서 어떤 감각으로 남아 있었는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려 합니다.
고통, 고독, 행복.
이 단어들이 정말 남의 언어로 남아 있어도 괜찮은지,
아니면 각자 한 번쯤은
자기만의 언어로 다시 불러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