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도 남지 않을 때, 나는 쓰기 시작했다

경계(boundary)에 서 있는 사람

by 김지영

2025년 말, 한 해를 정리했습니다.
AI와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두루 공부했습니다.


업무와 육아는 매 순간이 실전이어서
회사와 가정에서는 배운 것을 써먹기 좋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으로서 나는 공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새벽 5시, 어제 읽은 경영서 100페이지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는 지식이 아니라 잔해만 남아 있었습니다.


배웠고, 수집했고, 생각했고, 사유했습니다.
나는 더 배우면 해결될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재해석에 그쳤습니다.
전문가와 지식인에 대한 경외심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에
철학자 최진석 교수의 강의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읽기와 쓰기, 배우기와 표현하기, 듣기와 말하기의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쩌면 계속해서 읽기, 배우기, 듣기만 해온 것은 아닐까.
내 기준의 생산자로, 내 지식의 생산자로 살아본 적이 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배우는 것도 지칠 때가 있습니다


읽고, 배우고, 들은 후에 삶에 적용하는 것이 배움의 사이클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체 활동이나 운동은 즉각적인 적용과 피드백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머리와 마음을 쓰는 지적 활동은 때로 번아웃을 느끼게 합니다.


나는 기존 지식과 관념 체계의 개선과 변화를 즐기는 편입니다.
그래서 ‘자발적 불편함’을 좋아합니다.


의도적인 불편함과 고통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나의 호기심을 실험하는 일과 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다 보면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콘텐츠를 소비하게 되고
그것을 반드시 실전까지 적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식의 양이 성장을 증명하는가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공허함과 함께 지친 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배우고 또 배우는데 왜 헛헛할까요


배워도 배운 것 같지 않고
내 것이 아닌 느낌이 들었습니다.


퇴근 후 유튜브 강의를 3배속으로 들으며
‘오늘도 뭔가 배웠다’고 스스로를 속이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요.


누군가가 생산한 것을
소비하고 수입하는 사용자로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최진석 교수 강의 중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세계 최초 B형 간염 백신은 한국에서 먼저 만들었지만
이 백신을 바로 인증하지 못했고
결국 세계 3번째 상용화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보건 당국에 백신을 어떻게 인증할지에 대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스로 기준을 만들지 못하고
미국과 프랑스에서 상용화된 이후 그들의 기준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생산자가 되려면


내가 몸담고 있는 제조업을 떠올려봤습니다.


질문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무엇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
누구에게 팔 것인가.
팔고 난 뒤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나에게 적용해 봤습니다.
무엇을 읽고, 배우고, 들을 것인가.
어떻게 쓰고, 표현하고, 말할 것인가.
어디에 내놓을 것인가.
내놓은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결국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고
그것을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게시하는 일이었습니다.
게시가 전부가 아니라
계속해서 나를 표현해 나가는 일 말입니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생산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존의 지식에 새로운 관점을 접목해
브런치 글쓰기를 선택했습니다.


회사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포트 존에 속하는 지식과 업무만 반복하지 않고
문제를 찾고, 기존 방식이 아닌 다학제적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관세 절감을 위해 수출 제품의 핵심 부품 판정 과정에서
‘제1원리 사고법(물리법칙)’을 차용했고
그 결과 실제 성과로 이어진 사례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관점과 기준을 제시한 셈입니다.


‘연결’을 시도하자


나는 배움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배운 것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더 배우기보다는
다르게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무언가를 설명하는 기술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다른 각도로 보게 만드는 렌즈의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회사는 정글입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생존 전략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은 등대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비춰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시도하는 은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명함 뒤에 숨은 직장인들: 내세울 것이 없을 때 ‘회사 = 나’로 인식하는 상태

삼체문제의 이체화: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구조로 환원해 보기

온톨로지: AI 시대에 개념 관계망을 구축하기 위한 사고 틀


에디톨로지적 사고


다만 이렇게 렌즈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은유는 생각의 출발점일 뿐
그것만으로는 하나의 이야기나 관점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은유가 ‘보는 방식’, 즉 식재료를 바꿔줬다면
이제는 그 시선들을 어떻게 엮을 것인가,
조리법이 문제가 됐습니다.


에디톨로지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내 기준으로 편집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브런치 글감을 고민하던 중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을 풀어내는 서사와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내가 쓰려는 글은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내가 가진 생각들을 어떤 순서와 맥락으로 엮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는 지금

배움을 계속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 배움 위에 무엇인가를 올려놓는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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