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5 : 머무는 신앙, 오르는 신앙

브라가에서 만난 두 개의 믿음

by 김지영

포르투에서 한 시간 남짓,
브라가(Braga)로 향했다.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도시,
신앙이 가장 오래 일상으로 살아 있는 곳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차는 잘 나가는데 통행료가 만만치 않다.
유럽에서 프랑스가 살인적이라 들었지만,
포르투갈도 구간별 요금소가 많고 비용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보다 체감상 1.7배쯤은 되는 느낌이다.


브라가 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몰래 엿들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포르투갈의 성당들은 대체로 크다.
그런데 이곳은 화려하다기보다 투박하다.
권력과 통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지역 사람들 곁에 오래 있어 온 공간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실제로 미사가 열리는, 살아 있는 성당이다.




포르투갈은 로마 가톨릭 국가화가
가장 일관되게 유지된 나라 중 하나다.
이곳은 그 상징처럼,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이다.
나는 교회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종교사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지 않다.
신앙의 깊이를 말하자면 아직 초보다.


그래서 이런 공간에 서 있으면
경외심과 함께 묘한 위축감이 밀려온다.
이방인에, 신앙 초보자인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이 대성당은 머물러 있는 신앙 같다.
반면 나는 계속 움직이고, 생각이 많다.
정착보다는 이동에 가까운 신앙을 가진 사람처럼.




브라가 대성당은 11세기말에 지어졌고,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계속 증축되고 고쳐졌다.
그래서 건축 양식도 단일하지 않다.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가 겹쳐 있다.


로마네스크
어떻게 하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를 고민한 건축이다.
고딕
어떻게 더 높이, 더 밝게 올라갈 수 있을지를 묻는다.
바로크
어떻게 감정을 흔들어 믿음을 강화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10세기에서 18세기까지,
시간이 살을 붙이고 또 붙여 완성된 공간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인물 조각을 보다가
문득 회사 동료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다 보니
라틴계 국적의 동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이름 대부분은 성경이나 성인의 이름이다.
가톨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세례명이 곧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이 곧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역사적 인물처럼
자기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이름은 선택이 아니라 배정의 결과다.
세례명, 관습, 가문의 전통.
그 이름을 가질 당시의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존재였을 테니까.




엄숙한 분위기를 벗어나
나는 봉 제수스 드 몽테(Bom Jesus do Monte)로 향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 위의 선한 예수’라는 뜻의 성지다.


왜 하필 산 위일까.




굽이진 길을 따라 올라가
정상 근처에 차를 세웠다.
주차비는 1유로.
역시 유럽에는 공짜가 없다.
재밌는 점은,
이곳의 주차장은 처음부터 계획된 공간이 아니라
건물과 자연 사이, 애매한 공간들이
나중에 주차장으로 지정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먼저 쓰이고, 나중에 이름 붙여진 공간들이다.




스케일에 압도됐다.
여기서는 성당이 끝이 아니다.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지그재그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맨 아래에서부터
계단을 따라 성당까지 올라오며 순례하도록 설계된 구조다.
막상 올라보면,
끝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신에게 다다르는 길이
쉽지 않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된다.


오르는 동안 라틴어 문구들이 나타나고,
예수와 마리아의 삶이 서사처럼 이어진다.
마지막에 이르면
Longuinhos, 롱기누스의 동상이 나온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 병사.
전승에 따르면 그는 그 행위를 평생
후회와 신앙으로 짊어진 인물이다.




계단을 오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있을까.
대속이란 어떤 마음일까.
속죄의 마음으로 순례길에 오른다는 것은
어떤 각오를 요구하는 일일까.


그리고 문득 든 질문 하나.
왜 브라가에는
대성당과 봉 제수스 드 몽테가 함께 존재할까.
둘 다 성당이지만 역할은 다르다.
대성당은 정착의 공간이고,
봉 제수스는 이탈과 상승의 공간이다.
하나는 머무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움직이는 신앙이다.




신앙은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살아내는 방식은 늘 움직일 수밖에 없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
지금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작동한다.


아마 신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심은 하나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중심을 전부 이해하지도,
완벽히 행하지도 못한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오르내리는 수행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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