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는 발견이 아니라 축적이다 4

운의 정체

by 김지영

운은 갑자기 왔다


8년 차 즈음이었다.
두 공장의 기술을 엮어 새로운 사업을 운영하는
총괄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1년 전부터
나는 이런 리딩 커리어를 쌓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실행자가 아니라 판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조용히 올라오던 시점이었다.


그러던 중 HR에서
회사 성장 전략 발표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틀 동안 거의 몰입에 가깝게 집중해
52페이지 분량의 전략 안을 완성했다.


겉에서 보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타이밍이 맞았고, 기회가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이게 정말 운이었을까.




이틀은 이유가 아니었다


이틀 만에 전략 문서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사실 그 이틀 때문이 아니었다.


대학 시절 나는 증권사와 컨설팅 리포트를 유난히 많이 읽었다.
산업 분석 보고서, 시장 전망 자료, 기업 가치 평가 리포트들.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많은 숫자와 그래프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
공신력 있는 데이터는 누가 만들고, 어떤 가정을 깔고 있을까.


나는 보고서를 정보로 읽기보다
형식으로 읽었던 것 같다.
논리를 어떻게 쌓는지,
결론을 어떻게 끌어내는지,
숫자를 어떻게 설득의 도구로 배치하는지.


감각이 그날 다시 살아났다.


경제·경영 교양서는 대학 시절뿐 아니라
군 복무 시절에도 틈틈이 읽었다.
당장 써먹을 곳은 없었지만
산업을 구조로 보는 눈은 그때 만들어졌다.


여기에 12년 실무가 더해졌다.
수주와 원가, 고객과 조직의 제약을 읽는 감각.
현실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감각.


특히 영업이라는 직무는
전사적 관점을 강제로라도 익혀야 한다.
개발, 생산, 구매, 재무, 품질.
모든 이해관계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반복해서 던졌던 질문,
“이걸 왜 우리가 해야 하는가.”


그 질문의 흔적이
자료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다.




촉매는 보이지 않는 준비였다


축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촉매가 있었다.


나는 업무용 PC로는 돌리기 어려운
계산과 추정을 대신 수행해 줄
외부 모델들을 꾸준히 활용하고 있었다.
산업 성장률 가정, 제품 생애주기 추정,
빈약한 논리의 연결을 빠르게 검증하는 작업들.


자료를 쓰는 것은 내가 했지만
구조를 점검하고 허점을 드러내는 과정에는
이 도구들이 큰 역할을 했다.


하드웨어도 마찬가지였다.
업무 환경과 분리된 별도의 장비를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회사 PC로는 한계가 있는 소프트웨어 모델을
빠른 속도로 굴릴 수 있는 환경을
미리 갖춰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 모든 것이 맞물린 날,
나는 준비를 한 번에 회수했다.


운처럼 보였던 순간은
사실 오래 쌓인 것들이 동시에 반응한 결과였다.




돌아보니 이론 안에 있었다


‘운’이라 생각했던 일들을 되짚어 보니
존 크럼볼츠 교수의 ‘계획된 우연이론’이 떠올랐다.


그는 말한다.
커리어에서 중요한 것은
호기심, 끈기, 유연성, 낙관, 위험 감수.
하지만 결과는 알 수 없다고.


나는 이 이론을 알고 살지 않았다.
호기심을 훈련한 적도,
위험 감수를 전략으로 세운 적도 없다.


다만,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었기에 남았고
남아 있는 김에 계속했다.


읽고, 묻고, 시도했다.
돌아보니 그 모든 선택이
이 이론이 말하는 조건 안에 있었다.


나는 이론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살고 보니 이론의 언어로 설명될 뿐이었다.




운은 통제할 수 없다, 확률은 설계할 수 있다


준비가 되었다고
기회가 반드시 오는 것은 아니다.


커리어는 복잡계에 가깝다.
종속변수를 간소화한 버전으로 표현하자면
f(x) = {조직, 산업, 대표자, 동료, 고객, 타이밍}.


그 어느 하나도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통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나누기 시작했다.


통제 가능한 것.
지식과 경험의 축적, 태도, 학습,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선택.


통제 불가능한 것.
고객의 상황, 경기 사이클,
누가 결정권을 쥐고 있는가,
지금이 어떤 국면인가.


우연은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우연을 만날 확률은 설계할 수 있다.


그 확률을 높이는 재료가
의도가 담긴 축적이다.




나는 운이 좋았던 사람이 아니라,
운이 와도 흘려보내지 않을 준비를 해두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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