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끝. 그의 문장을 통해 나를 다시 바라보다

에필로그

by 김지영

이 연재는 처음부터 철학을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전문적인 철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다만 마흔을 넘긴 어느 시점부터
내 삶을 조금 더 이해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삶.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삶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서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파트 가격 이야기, 주식 이야기,
자녀 교육 이야기.


세상은 늘 같은 기준을 제시한다.


좋은 직장
안정적인 소득
자산의 증가
그리고 성공적인 자녀 교육.


이 기준들은 분명 중요하다.
나 역시 그 기준을 완전히 벗어나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기준들만으로는 나 자신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철학서를 펼쳤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온 사람이
쇼펜하우어였다.


그의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솔직했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존재라는 말.


즐거움과 만족은 잠깐이고
삶은 대부분 고통이거나 무료함이라는 말.


처음에는 지나치게 냉소적인 철학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읽다 보니
이상하게도 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문장을 빌려
내 삶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연재의 방식은 단순했다.


쇼펜하우어의 문장을 하나 읽고,
그 문장을 통해 떠오른 나의 생각을 적는 것.

정말 필터 없이 나의 생각을 갈겨썼다.


정답을 찾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점검하기 위한 기록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권태로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만들고
일을 시작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글을 쓰고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한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고통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통을 선택하며 살 것인가일지도 모른다.


이 연재를 쓰는 동안
나는 한 가지 태도를 스스로에게 정해 두었다.


강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종교든 철학이든
누군가의 생각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생각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면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의 토대 위에서 발생한 인식”에
조금 더 가까운 태도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신이 존재하는지
인간의 삶에 어떤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지
그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나는 진리를 좇거나 사용하고 싶지 않다.


다만 생각할 언어를 찾고 싶다.


철학을 읽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세상을 설명하려 했고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나에게 철학은
그저 나 자신을 조금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하나의 거울에 가깝다.





쇼펜하우어를 통해
나는 삶의 모든 답을 얻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문장을 통해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 연재는 충분한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하나의 질문을 붙잡고 살아가게 될 것 같다.


나는 지금 고통을 피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변모시키는 고통을 통과하며 살고 있는가.